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BB칼럼 분류

아버지와 아들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4월호>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는 세계적인 문학가들이 여러 명 있다. 그 가운데 이반 투르게네프는 그의 대표작 <아버지와 아들>에서 세대 간의 갈등을 그렸다. 격변기의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상적 갈등이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 사이에서 일자 치밀한 관찰력으로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 간의 갈등을 묘사한 것이다.
세상은 세대가 바뀌면 사상과 가치관도 바뀌는 경향이 있기에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을 피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성경”이 없다. 두 세대를 한 가지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줄 “절대적 기준”이 없기에 세대 간의 갈등은 영원한 숙제가 되고 만다. 하지만 성경은 세대 간의 갈등이 아닌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순종과 일치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야말로 세대 간의 갈등을 봉합하는 영원한 해결책인 것이다.


성경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하려고 하면 단연 “아브라함과 이삭”을 떠올린다. 아버지, 아들 이 두 사람의 관계가 그들처럼 온전한 신뢰 위에 구축된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갔다. 아들을 번제로 태울 나무를 그 아들에게 지우고, 자기 손에는 불과 칼을 들고 가던(창 22:6)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분명 눈물이 나고 괴롭기 그지없었겠으나, 정녕 그는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다.
아들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을 제단의 나무 위에 올려놓을 때, 또 칼을 잡고 자기를 죽이려 할 때 저항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 시간 자기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려는 아버지 아브라함과 그 아버지의 행위를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저항하지 않은 아들 이삭에게서 우리는 “세대 간의 갈등”이란 것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순종 아래서는 무의미해진다는 점을 깨닫는다.

성경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떠오르는 두 번째 예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이다(눅 15:11-32). 이것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을 유산을 미리 받아 챙겨서 먼 나라로 가 그곳에서 방탕하게 살다가 재산을 낭비해 버린 작은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은아들은 모든 것을 탕진해 버린 후 그 나라에 큰 기근이 들자 궁핍해졌고, 급기야는 남의 집에서 돼지를 치며 돼지가 먹는 곡식 껍질로 배를 채우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그가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는 말이 이것이었다. 『내 아버지의 많은 품꾼들은 먹을 것이 풍족하고도 남는도다. 그런데 나는 굶어 죽어 가는도다! 이제 내가 일어나서 내 아버지께로 가리라. 그리고 이렇게 말하리니, 아버지여, 내가 하늘을 거역하여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만한 자격이 없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소서 하리라』(눅 15:17-19).


작은아들과 아버지가 재회하게 된 극적인 전환점은 작은아들에게 일었던 한 가지 깨달음이었다. 바로 “아버지여, 내가 하늘을 거역하여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만한 자격이 없나이다.”였다. 작은아들은 자신이 하늘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음을 깨달았을 때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그가 굶어 죽어 갔던 것도 다 하늘을 거역한 죄 때문이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려 했을 때”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젊은 혈기에 세상적인 삶을 위해 유산을 미리 탐냄으로 불거진 일종의 “세대 간의 갈등”이 이렇듯 작은아들의 “회심”을 통해서 봉합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사도 요한의 기록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사랑의 사도”가 써 내려간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신비로운 관계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우선 요한복음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나의 손』이 곧 『나의 아버지의 손』임을 말씀하신 후에(요 10:28,29)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니라.』(30절)라고 가르쳐 주셨다. 주님께선 또한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라.』(12:45), 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14:9)라고 하심으로써 『아버지』와 『아들』께서 “일체”이심을 강조하셨다.


또한 『아들』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던 길에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기도하실 때 죄인들이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해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육체 위에 권세를 주신 것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사람들이 유일하시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옵니다』(17:2,3). 즉 『아버지』를 떠나서는 『아들』을 생각할 수 없고, 『아들』을 떠나서는 『아버지』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17 역시 『아버지』를 알고, 그분께서 보내신 『아들』을 아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하여 세상이 구원받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께서는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셨다. 그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다(마 26:39). 누가복음 15장의 작은아들처럼 먼 나라로 가서 방탕하게 살며 재산을 탕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으로서의 영예를 버리시고 이 먼 세상에 내려오셔서 창세기 22장의 이삭처럼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심으로” 인류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다(빌 2:6-8).

사도 요한은 그의 요한일서에서 말하기를 우리의 교제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1:3)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한 변호인』(2:1)이시라고 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함이 그 안에 있지』 않은 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2:15,16).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가 곧 적그리스도』(2:22)요,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으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있』다고 했다(2:23). 『아버지』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그럴 수밖에 없다. 요한은 『아버지』께서 육신이 되어 『아들』로 오셨다는 신비로운 관계를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고 요한이서에서도 강조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자들이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1:7).
사도 요한은 그의 요한이서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진리와 사랑 안에서 은혜와 자비와 평강이』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기를 기원했다(1:3).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떠나서는 영생은 물론, 은혜와 자비와 평강도 누릴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버지』와 그분께서 보내신 『아들』에 관한 진리 안에서 구원을 확신하고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이 진리를 부인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교회가 곧 적그리스도의 교회이다. BB

BB칼럼 309 / 2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