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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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에게 바쳐진 할랄식품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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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04월호>

지난 2015년 3월, 우리나라 대통령이 중동 순방을 마치고 돌아와서 17억 명의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한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는데, 그중 하나가 "할랄식품"이었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의 규칙에 따라 만들어진 할랄식품을 전 세계 무슬림을 대상으로 판매했을 때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에서 나온 것인데, 그에 따라 "제2의 중동 붐" 운운하면서 17억 명의 무슬림들에게 먹을거리를 공급하고, 국내 여행 중인 무슬림들에게 기도처를 마련해 주며, 전국의 식당들을 이슬람 친화 정도에 따라 5개 등급으로 나누어 무슬림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하자는 것과 같은 구상들이 솔솔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IS 같은 급진적 테러 단체들에 대한 국민적 공포심이 만연한 가운데, "근본주의 무슬림들이 할랄식품을 미끼로 자금을 끌어모아 경제계를 장악하려 한다," "무슬림이 아닌 우리가 왜 종교적 의식으로 만들어진 식품을 구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기독교계의 시위가 일어나면서 각 지자체가 사업 구상 단계서부터 좌초의 위기에 처했다. 대한민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지자체가 어떤 일을 추진하려 할 때 "시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하면 난항을 겪기 마련인데, 때로는 이 멸망할 세상의 "시민"이기를 자처하는 배교한 기독교계가 한몫을 단단히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문제의 "할랄"은 "허용된 것"이란 뜻의 아랍어이다. "할랄"이라는 용어는 비단 식품에만 붙여지는 것이 아니고, 무슬림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된 모든 의약품과 화장품에도 붙여지는 인증이다. 국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할랄식품"은 특히 그 육류와 관련하여 도축방식이 독특하다. 말하자면 ① 할랄 도축법 자격을 취득한 무슬림이 도축해야 하며, ② 죽일 짐승은 그 머리를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해 두어야 한다. ③ 짐승의 혈관을 끊을 때에는 반드시 "비스밀라," 곧 "알라의 이름으로!"라고 외쳐야 하고, ④ 매우 예리한 칼로 짐승의 식도, 기도, 경정맥 등을 단숨에 끊어야 한다. ⑤ 또 짐승이 죽을 때까지 산 채로 거꾸로 매달아 그 피를 완전히 빼내야 하며, ⑥ 피를 빼기 전에 죽은 짐승은 먹지 못한다. ⑦ 개나 돼지는 먹을 수 없으며, ⑧ 사냥한 짐승은 먹어도 되지만 사냥개나 매가 그 일부를 먹었다면 먹어서는 안 된다. ⑨ 그리고 비늘이 없는 생선은 먹을 수 없으며, ⑩ 타종교 의식에 사용된 것을 먹어서도 안 된다 등의 내용인 것이다.
이와 같은 도축과정은 무슬림들의 삶을 지배하는 이슬람 율법, 곧 샤리아에 근거한 종교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약의 레위기 음식 규정이 유대인들의 삶을 지배했듯이, 유대교를 흉내 낸 이슬람 역시 식품 규정을 만들어 실행하고 있다. 특히 짐승의 "피를 모두 빼고" 먹어야 한다는 것(레 17:10,11)과, "되새김질 못하는" 돼지나 개(레 11:7,27) 그리고 "비늘이 없는" 생선은 먹을 수 없으며(레 11:10,11), "사냥한" 짐승을 먹을 수 있다는(레 17:13) 규정 등은 이슬람교가 유대교를 도용(盜用)한 종교라는 점을 보여 준다. 마호메트는 자신의 두 유대인 아내에게서 들은 것을 이슬람 율법 조항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할랄식품과 관련한 이슬람 친화 정책은 분명 부정적인 면들이 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로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국내 유입을 통한 대국민 테러 위협이다. 코란은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들을 위협하고(코란 8:12,60) 알라를 위해 죽이고 순교하라고(코란 9:5,111) 명령하고 있는데, 돈에 눈먼(딤전 6:10) 정부가 국민의 안전을 뒷전에 두고 있다.
두 번째는 무슬림들의 활동을 통한 이슬람교의 국내 확산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할랄식품이 (그 도축과정에서 보듯) "알라에게 바쳐진" 제물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팔아" 수익을 올리려고 한다는 점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 이와 유사한 일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기시장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나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 10:25).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이 글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사뭇 첨예하다. 항구 도시인 고린도에는 적어도 열두 개 이상의 우상 신전들이 있었고, 지중해의 거의 모든 우상들이 숭배되고 있었다. 그곳 고기시장의 고기들은 그 신전의 우상들에게 바쳐진 것을 다시 내다 파는 것들뿐이었다. 그렇기에 성도로서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는 교회 내에 첨예한 논쟁을 일으켰다. 고린도 교회에는 믿음을 과시하려는 듯 우상 신전에 직접 찾아가 그곳 제물을 "강한 양심"으로 먹는 사람도 있었는데, 약한 양심을 가진 이가 그것을 보고 흉내 내다가 양심에 그만 상처를 받고 실족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전 8:10-13). 아무것도 아닌 우상을 대단한 존재인 양 의식하고 먹었던 것이 화근이었는데, 말하자면 그것은 우상을 양심으로 존중한 우상 숭배였던 것이다. 그는 『하늘에나 땅에나 신들이라고 불리는 (많은 신들과 많은 주들이 있어도) 우리에게는 오직 한 분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다는(고전 8:5,6) 성경적 지식 없이 먹었다가 죄를 짓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일에 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은 우상들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밖에 계시지 아니한다는 것』(고전 8:4)과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는다고 해서 더 나아질 것도 없고, 먹지 아니한다고 해서 더 나빠질 것도 없』다는(고전 8:8) 점을 들어, 양심이 약한 형제를 실족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행할 것을 강한 양심의 성도들에게 권고했다(고전 8:9).
위의 고린도전서 8장은 우상에 대한 지식 차원에서 각 성도에게 권면한 것이었지만, 『고기시장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나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 10:25)는 말씀은 믿지 않는 누군가가 교회 성도를 식사에 초대했을 때 그 차려진 고기를 우상에게 바쳐진 줄 알면서도 먹어야 하느냐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바울은 그럴 경우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차려진 것은 무엇이든지 먹으라고 했지만, 만일 어떤 사람이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임을 알려 준다면, 알려 준 그 사람과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명령했다(고전 10:27,28). 식사에 초대한 불신자를 위해서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에 거침이 되지 않도록 맛있게 먹어 주는 예를 보이라는 것이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임을 알려 준 사람에 대해서는 그것을 먹는 데 담대한 당신을 보고서 그가 실족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 바울의 명령이었다.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아무도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전 10:32)는 말씀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기록된 것이다. 마호메트의 이슬람교는 "타종교 의식에 사용된 것은 먹어서는 안 된다."라고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와 다르게 가르치고 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이교도들은 종교 간의 대립을 신들의 대결로 보나,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우상들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밖에 계시지 아니한다』(고전 8:4)는 말씀을 믿는다. 어떤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졌느냐를 따지지 않고 믿음으로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것이다.
할랄식품이 "알라에게 바쳐진" 것임을 강조하며 시위하는 자칭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에게 들려줄 "커피" 이야기가 있다. 커피는 A.D. 600년경 이슬람 사원의 수도승들이 밤을 새워 "알라"에게 기도하기 위해 끓여 마시기 시작한 것으로서 11-13세기 십자군 전쟁으로 유럽에 소개되었는데, 그때 "이교도들의 음료인 커피는 사탄의 음료이니 금지해 달라."는 고발이 교황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커피 맛에 빠져든 교황은 그것을 이교도 음료라고 금기하지 말고 대신 "세례를 주어" 카톨릭교도들도 마실 수 있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커피는 그렇게 해서 대중음료가 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1299년 오스만 1세가 셀주크 제국을 무너뜨리고 소아시아에 세운 "이슬람 제국"인데, 그 제국 사람들은 "카프베"라는 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친목을 도모했다. 이 카프베가 변하여 오늘날의 "카페"가 된 것이다. 그들 시위하는 목사들과 교인들은 "알라"를 섬기는 자들의 "커피"를 마신 적이 없는가? 혹시 이슬람교도들의 "카페"에 출입하지는 않았는가? 『그러나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는다고 해서 더 나아질 것도 없고, 먹지 아니한다고 해서 더 나빠질 것도 없느니라.』(고전 8:8)는 말씀에 유념하라. 우상을 의식하는 자는 양심이 더럽혀져 있기에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 그들의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성경의 하나님을 세상 종교들 가운데 하나처럼 섬기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양심이 정결케 된 그리스도인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을 똑똑히 알라!(히 9:14)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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