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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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신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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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5월호>

이름은 어떤 “존재”에 대해 그 “고유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름이 붙여지기 전에는 존재감이 희미하다. 마치 이름 없는 간판이 네모난 플라스틱에 불과한 것과 같다. 그래서 이름은 존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사람은 아기를 낳으면 이름부터 짓는다. 이름 없이 유기된 아기도 어김없이 누군가에 의해 이름이 붙여진다. 아기는 성장하면서 타인이 불러 주는 자신의 이름을 통해 자의식이 뚜렷해지고, 이름은 그 아기가 한 인간으로서 타인과의 관계를 시작하고 지속하는 발판이 된다.
인생은 이름과 이름의 만남이다. “통성명”은 새로이 만난 어색한 사람들의 단순한 형식적 의식이 아니며, 이제 관계의 문을 열자는 상호 간의 합의다. 인간은 이름을 주고받지 않고서는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가족은 이름들의 모임이다. 이름과 함께 한 나라의 시민으로 등록된다. 이름 없이는 친구를 사귈 수도 없고 학교에 다닐 수도 없다. 직장에 취직할 수도 없고 결혼할 수도 없으며 병원에 입원할 수도 없다. 망자의 이름을 걸어 놓지 않은 장례식장은 없다. 비석이 있다면, 그 위에는 분명 무덤 주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름이 노출되지 않더라도 어디서든 사람을 만나면 당연히 그에게 이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이름은 인생의 시작과 진행과 종말에 내걸리는 명패가 된다.


사람은 왜 이름을 짓는가? 그러한 본성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가? 그 근원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창조주께서는 존재의 시작과 함께 이름을 두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더라.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그 빛을 어두움에서 나누시더라. 하나님께서 그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더라』(창 1:3-5).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존재하게 하신 것들에 이름을 부여하셨다. 우주의 역사는 이름들로 점철된 여정이다. 『낮』과 『밤』 외에도 창공을 『하늘』(창 1:8)이라 부르셨고, 우주를 뒤덮은 물들이 물러가고 드러난 마른 곳을 『땅』(창 1:10)이라 부르셨으며, 그 물들이 모인 곳은 『바다들』(창 1:10)이라 부르셨다. 주님께서는 지으신 것들을 이름 없이 방치하지 않으셨다. 우주에는 수많은 군상이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지으셨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것들을 창조하였으며, 그들의 군상들을 수효대로 이끌어 내셨는지 보라. 그가 그들의 이름을 그의 막강한 위력으로 모두 부르시나니 이는 그의 권세가 강하고 하나도 부족함이 없으심이라』(사 40:26). 우주의 수없이 많은 천체의 개별적인 이름을 지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막강한 위력을 증명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형상대로 지으신 최초의 사람에게도 위대한 지혜를 주셔서 땅과 공중의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짓게 하셨다. 『주 하나님께서 땅으로부터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그들을 부르는가 보시려고 그들을 아담에게로 데려오시니, 아담이 모든 생물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그것이 그 이름이 되더라』(창 2:19).

한편 누군가에 의해 작명되지 않은 이름이 있는데, 그 “경이로운 이름”이 창세기 1:1에 나온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하늘들이나 땅과 달리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지어진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존재하심이 시작도 끝도 없으신 것처럼 『하나님』이라는 그분의 이름 역시 시작도 끝도 없으신 것이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부분은 따로 설명이 필요치 않다. 굳이 설명하려 하면 그것은 불필요한 해명이 되고 만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영원한 이름에 대한 “믿음”뿐이다. 『내가 하늘에 내 손을 들고 말하노니, 나는 영원히 사노라』(신 32:40). 성경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본질과 능력을 “이름”으로 계시하신다. 이름을 통해 그분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God)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인데, “서약으로 자신을 동여매는 강한 자”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창세기 1장에서 그 첫 구절에서부터 창조주의 강한 면모를 계시하고 있으며 구약 전체를 통틀어 약 2,500회 언급된다.


둘째, “주”(LORD), 곧 “여호와”는 “자신을 계시하시는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여호와”는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을 계시하는데, 이는 최초의 인류가 죄를 지었을 때 그들에게 짐승의 피를 흘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분이 바로 “여호와 엘로힘”(『주 하나님』, 창 3:21)이셨기 때문이다. 구속주로서 갖는 여호와의 이미지는 히브리 노예들을 이집트에서 구속해 내시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났다(출 6:3). 인간을 구속하시는 것과 관련된 여호와의 사역은 그 이름과 결합된 다른 아홉 가지 이름들로도 계시된다. 즉 “여호와 이레”(주께서 예비하시리라, 창 22:13,14), “여호와 라파”(치유하시는 주, 출 15:26), “여호와 닛시”(주는 우리의 깃발, 출 17:8-16), “여호와 샬롬”(주는 우리의 화평, 판 6:24), “여호와 사바오스”(만군의 주, 삼상 1:3), “여호와 엘리온”(지극히 높으신 주, 시 7:17), “여호와 라아”(주는 나의 목자, 시 23:1-6), “여호와 칫케누”(주 우리의 의, 렘 23:6), “여호와 샴마”(주께서 거기 계시다, 겔 48:35)가 바로 그 이름들이다.


셋째,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곧 “엘 엘리온”은 창세기 14장의 멜키세덱을 통해 최초로 계시된다. 멜키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18절)으로서,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면서 『하늘과 땅의 소유주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브람을 복 주시옵소서.』(19절)라고 기도했다. 따라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소유주로서 하늘과 땅 모두에서 막강한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을 계시한다. “엘 엘리온”의 권세가 온 세상에 걸쳐 있는 것이다.
넷째, “주”(Lord), 곧 히브리어로 “아도나이”는 “섬김의 대상으로서의 주인”을 뜻한다. “아도나이”와 그분의 백성 간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다.
다섯째, “전능한 하나님,” 곧 “엘 샤다이”는 “가슴”을 뜻하는 “샤드”에서 나온 이름으로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여인의 가슴”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전능한 하나님”이란 이름은 성도들에게 힘을 주시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욥기에서 31회 언급되는데,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정련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계시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름”으로 계시하신다. 이 점을 모르면 하나님을 어떤 “알지 못하는 신”으로 헛되이 경배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마르스 언덕 한가운데 서서 말하기를 “아테네 사람들이여, 내가 보니 너희는 매사에 너무나 미신적이니라. 지나다니다가 너희가 섬기는 대상을 보았는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 놓은 제단도 있었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알지 못하면서 섬기는 그 대상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2,23). 바울이 사도행전 17장에서 그리스 아테네의 마르스 언덕에서 행한 이 설교는 “매사에 너무나 미신적인” 헬라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였다. 제단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기고 제물을 바쳤던 아테네인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한 것인데, 이름을 모르면 사람을 분간할 수 없듯이 『신』 또한 그 이름을 모르면 분간할 수 없다.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를 그 고유한 이름으로 호명하는 것은 “그”라고 막연하게 칭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바울은 『신』, 곧 『하나님』에 관한 이방인들의 본성적인 갈망을 간파하고서 그 미신적인 자들에게 하나님과 그분께서 하신 일에 관해 이렇게 알려 주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시니 그분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들에는 계시지 아니하시며 또한 무슨 필요한 것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아야 되는 것도 아니시니 이는 그분이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심이라』(24,25절). 이렇게 운을 뗀 바울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주조한 금이나 은이나 돌이 하나님의 신격과 같다고 생각지는 말아야 할 것』(29절)을 경고하면서 회개할 것을 촉구했고(30절),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신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으로 설교를 마쳤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정하신 그 사람을 통하여 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한 날을 정해 놓으시고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시어 모든 사람에게 확증해 주셨음이라』(31절).


사실 구원자이신 『예수』(마 1:21)께서는 종교적인 이방인들이 갈망하는 『알지 못하는 신』을 계시하려고 오신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 예수”가 아니라 만물이 시작되기 이전에 영원 전부터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프라타야, 네가 비록 유다의 수천 가운데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통치할 자가 너로부터 내게로 나오리라. 그의 나오심은 예로부터요, 영원부터였느니라』(미 5:2). 그 나오심이 예로부터요 영원부터이신 예수님께서는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불리셨는데(마 1:23), 바울은 이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시어 『임마누엘』이 되신 사건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경건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 성령으로 의롭게 되셨으며, 천사들에게 보이셨고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셨으며,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셨고 영광 가운데로 들려 올라가셨음이라』(딤전 3:16). “미신적”이기는 아테네인들이나 한국 교회나 마찬가지다. 아테네인들은 자의적으로 규정한 『신』에게 제물을 드린 반면, 한국 교회는 교단 교리로 잘못 규정한 “예수,” 곧 사실상 『다른 예수』(고후 11:4)에게 미신적인 정성을 다했으니, 그들 모두 하나님을 미신적으로 섬긴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미신적으로 섬기는 것은 그들이 믿고 따르는 비성경적인 교단 교리 때문이다. 이교도 철학에서 비롯된 “칼빈주의”와 행위 구원으로 점철된 “알미니안주의”로 시작한 그들이 이내 토속 기복 신앙과 결합한 “오순절 은사주의”로 초토화되어, 이 나라에서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교회를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에서 나오는 바른 교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가! 『나의 교리가 비처럼 내릴 것이요,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힐 것이며 연한 풀잎 위에 이슬비 같고 풀밭에 소나기 같으리로다』(신 32:2). 하나님의 교리는 그분의 말씀과 같고 그 말씀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물과 같아서(엡 5:26) 그 말씀이 이르는 곳마다 생명이 움트고 싹이 올라와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는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땅을 적셔서 싹을 내어 뿌리는 자에게 씨를 주고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내 말도 그러하나니 그것은 내게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을 이루며, 내가 보내어 이루려 하는 일에서 번성할 것이니라』(사 55:10,11).


한국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성경적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바른 말씀을 거부하고, 그 말씀에서 나온 바른 교리인 전천년주의적 세대주의를 배척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주어진 첫 번째 목적이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교리를 치워 버리고 “교훈”으로 대체한 뒤 바른 교리도 없이 배교의 망망대해를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한국 교회는 저 옛날의 아테네 이교도들처럼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고 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 신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들은 그분을 미신적으로 섬김으로써 여전히 그들 안에서 『알지 못하는 신』의 위치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려면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구원자, 곧 『예수 그리스도』(마 1:1)를 잘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부터 계신 『말씀』(요 1:1)이시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신 『독생자』(요 3:16), 즉 『하나님의 아들』(눅 1:35)이시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에 제물로 드려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시고,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빵』(요 6:33)이시며, 첫 사람 아담이 망쳐 놓은 것을 회복하신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고, 신부인 교회를 휴거시키러 오실 『신랑』(요 3:29)이시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뻗은 『주의 팔』(사 51:9; 53:1)이신 그분께서는 죄지은 성도들을 위한 『변호인』(요일 2:1)이시며, 교회가 세워져 있는 굳건한 『반석』(고전 10:4), 기록된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알파와 오메가』(계 1:8), 어려워서 못 할 일이 없으신 『전능하신 분』(계 1:8), 말씀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아멘』(계 3:14), 초림 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도』(히 3:1), 현 교회 시대의 『대제사장』(히 3:1), 다시 오실 『유일하신 통치자』(딤전 6:15)이자 『화평의 통치자』(사 9:6), 곧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계 19:16),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신 『경이로운 분... 상담자... 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사 9:6), 또한 영원한 『빛』(요 1:9)이신 『빛나는 새벽별』(계 22:16)이시다. 이외에도 다양한 이름들로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그 각각의 이름에는 독특한 교리가 담겨 있다.


『예수』(마 1:21)께서는 『너는 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말라. 주는 그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는 자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아니하리라.』(출 20:7)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딤전 3:16)이시다. 성경은 “이름들”의 책이다(대상 1-9장, 롬 16장 등). 특히 우주에 있는 모든 이름 가운데 가장 높으신 이름은 “예수”이시다(빌 2:9,10, 엡 1:21,22). 인류의 『구원의 대장』(히 2:10)이시며, 하늘 아래에서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 또한 “예수”이시다(행 4:12).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대로 믿고 섬기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교회가 되고 만다. 무지는 변명이 될 수 없다. 바른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는 것만이(딤후 2:15)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알고 섬기는, 곧 하나님께 인정받는 교회가 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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