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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을 마비시키는 박옥수 목사의 창세기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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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4월호>
어리석은 자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릴 때 그것은 얼마나 위험한가? 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어 버릴 만큼 치명적이다. 더욱이 성경 말씀을 들이대며 복음 비슷한 것으로 속인다면, 그 회중들은 무지와 무능에 휩싸여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서게 될 것이다.지난 3월 3일자 동아일보에는 구원파의 박옥수 목사의 창세기 강의 중 일부가 전면광고로 게재되었다. 말이 창세기 강해지, 사실은 그들이 항상 말하는 바 “거듭남의 비밀”을 설교한 것이다. 창세기 1:1-5을 가지고 강해를 하는데, 본문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 잡아놓았지만, 마음에 빛이 임한다고 하더니 갑자기 자신의 위궤양 치유에 대해 간증을 하고는 곧이어 우리의 죄가 100% 씻겼다고 말함으로 결론을 짓고 있었다.
어찌 보면 참 “대단한” 설교일 수 있다. “빛이 있으라.”는 한마디 말씀만 가지고 치유에 대한 간증에 복음까지 전하니 말이다. 이 정도면 성경의 어떤 구절을 가지고도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 아니겠는가? 하지만 정말 그런가?
우리는 그의 강해 아닌 강해를 보고서, 이 얼마나 회중들을 무지의 사슬로 묶어 놓는 어리석고 악한 메시지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먼저, 그는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신 말씀을 우리 마음에 빛이 임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전에는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하셨구나, 하나님이 빛을 주셨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인데, 깨닫고 보니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주시어 온갖 더러운 것들을 제거해 주시는 것이라고 강조해 말한다. 하지만 이 말씀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이심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누가 있겠는가? 요한복음 1장에서는 그 빛이 우리들에게 오셨다고 말씀한다. 하지만 창세기 1장을 가지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지극히 은유적인(allegory) 해석일 뿐이다.
박옥수 목사의 주장대로라면 창세기 1장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아는 것은 껍데기뿐인 지식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씀 이면에 숨겨져 있는 영적인 깊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필로와 오리겐, 그리고 그들을 따랐던 알레고리 학파의 해석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깨닫는 것은 영적 지식이 아닌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창세기를 아무리 읽어도 그 말씀을 “창세 신화”로 이해하지 “창조 사역”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성령님께서 일깨워 주시기 때문에 그 말씀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신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오히려 창조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자들이 성경을 위대한 문학 작품으로 해석할 때 “우리 마음속의 빛...” 운운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정도는 도올 김용옥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 다음에, 박옥수 목사는 갑자기 자신의 위장병 치유에 대한 간증을 한다. 그는 몇 년 전 위궤양으로 고생했었는데, 갑자기 『너희가 기도할 때에 바라는 것들은 무엇이나 받은 것으로 믿으라...』(막 11: 24)는 말씀이 떠올라서, 더 이상 아프지 않다고 여기고 아무거나 먹었더니 한두 끼 정도 고생한 후 멀쩡히 나았다고 한다.
그가 믿음의 기도로 위장병을 치유 받았다고 한다면, 굳이 그 간증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문제는 그의 지극히 개인적인 간증을 믿음의 본으로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간증은 이렇다. 그는 죽을 먹어도 설사를 할 정도로 위궤양이 심했다 한다. 그런데 마가복음 11:24 말씀을 통해 “나은 줄로 믿고” 음식을 마구 먹었다. 그런데 배가 아파 설사를 했다. 그랬더니 마음속에서 사탄이 “너 이러다가 배 터져 죽는 거 아냐?” 하고 말했다 한다. 박목사는 “아니야, 내 배는 다 나았어.” 하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사탄은 “나았으면 아프지 말아야지. 그게 나은 거야?” 하고 말했다 한다. 박목사는 “지금은 아프지만 이건 나은 거야.” 하고 말했다. 그리고 저녁 때 호텔 뷔페에서 많이 먹었지만 더 이상 배가 안 아프고 다 나았다는 것이다.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이러한 상황을 커다란 영적 전쟁을 겪은 것처럼 거창하게 말하고 있다. 마치 바울이 육신과 싸우는 영적 전쟁을 묘사하듯이 말이다(롬 6,7장). 만일 그의 경험이 영적 전쟁이라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 박옥수 목사는, 만약 믿음으로 기도했는데도 낫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어떤 병에 걸려도 그와 같은 믿음으로 “나았다”고 여겨서 승리해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분명히 수많은 사람들은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만 낫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거짓말을 하셨다는 말인가? 이러한 신성모독적인 주장이 어디 있는가? 때로는 믿음이 부족해서 병이 낫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가운데서 낫지 않는 경우도 있다. 물론 대부분은 건강관리를 소홀히 하거나 약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낫지 않는 것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약이란 전혀 소용이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약으로 치료받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믿음 없다”고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간증을 구원의 복음으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병이 나았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므로 치유 받았듯이,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언뜻 보면 이 말은 매우 성경적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들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어 구원받은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지어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구원받는다. 구원받은 우리는 결코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박옥수 목사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우리 마음속에서 “그렇지만 너는 죄를 지었잖아.” 하고 말하는 것은 사탄의 음성이라는 것이다. 마치 “나았으면 아프지 말아야지 왜 아퍼?” 하는 것이 사탄의 음성이라고 주장하듯이 말이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짓는다고 말씀한다. 요한일서 1:8은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하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나』라고 말씀한다. 우리의 신분이 의인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과, 우리가 실제적으로 죄를 짓고 산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죄와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다. 다만 지옥에 가지 않는 것뿐이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죄의 경중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징계를 받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하지만 아직 “죄의 권세”로부터는 자유함을 얻지 못했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 되기 때문에(요 8:34) 죄의 권세에서 자유함을 누리려면 날마다 죄와 싸워 이겨야 한다. 또한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고백했던 바,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죄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육신을 벗어나는 그 날에야 죄 자체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을 “죄의 임재”로부터 자유함이라고 한다. 하지만 박옥수 목사는 죄에 대한 이 모든 상황들을 오직 하나 “죄의 형벌”로부터의 자유에다가만 적용시키는 것이며, 그래서 죄가 있다고 말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롬 7:24).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 때문에 괴로워했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그는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박옥수 목사에 따르면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것인가? 박목사도 아는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을 바울은 깨닫지 못한 것인가?
마지막으로 박옥수 목사는 죄에 대한 해결책을 자기 나름대로 설명해 주고 나서, “우리가 해야 할 한 가지 일”이란 “내 생각을 믿지 않고 성경이 말한 대로 내 죄가 씻겨져서 내가 거룩하고 의로워졌다고 믿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옳다. 그도 『너희가 주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영으로 씻음을 받았고 거룩하게 되었으며 의롭게 되었느니라.』(고전 6:11)는 말씀을 제시했듯이,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했을 때 이야기다. 예수님께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온 세상을 위한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들을 해결해 놓으셨다는 “사실”만 믿는다고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사실”을 깨닫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그 사실에 의지하여 그분을 영접해야 한다. 그때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죄사함의 역사가 내 것이 된다.
예수님의 역사적 존재를 믿는 것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그 사실을 믿고 그분을, 그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해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모셔들이는 것, 즉 영접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믿는 것이다(요 1:12, 계 3:20).
하지만 박옥수 목사의 복음에는 이것이 빠져 있다. 단지 “내가 실제로는 아프지만 안 아프다고 여기는 것이 치유”라고 주장하듯이, “내가 실제적으로 죄를 짓고 있으나 나는 죄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구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절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아파도 안 아프다고 “여기는” 것도 한두 번이지, 어떻게 치유받지 않고 계속 “나았다”고 여길 수 있는가? 그럴 때 나았다고 여기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마찬가지로 죄를 짓고 있는데 “죄가 없다”고 여긴다면, 그것도 한두 번이지 어떻게 계속 죄 없다고 여길 수 있는가? 이때 나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어찌 믿음이라 할 수 있겠는가?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가 짓는 죄들의 심각성을 잘 안다. 그래서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와 싸워 승리하려 한다. 오히려 “나는 죄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양심에 화인맞은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박옥수 목사는 성도들의 죄를 성령충만으로 해결해 줄 생각은 않고, 그들의 양심을 화인으로 지져 버림으로 무디게 만들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십자가의 공로로 완전한 죄 용서를 설교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복음과 진리를 왜곡하는 사람이다. 그가 진정한 목자라면 성도들의 양심을 마비시키는 행위를 당장 중지하고 죄와 싸워 승리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