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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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지한 목사의 “광대 설교”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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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10월호>

마지막 때의 교회들의 문제점은, 목사라고 불리는 자가 강단에서 떠드는 모든 말이 진리인 것처럼 포장되어 수용된다는 데 있다. 성경을 근거로 회중을 설득하고 계도하는 것이 목사의 사명인데, 본문의 참뜻을 왜곡한 것에 육신적 궤변을 더하여 회중을 오도하는 것이다. 그의 어설픈 장광설을 성경과 성경을 비교해서 판단할 "영적인 사람"(고전 2:12-15)이 부재한 고로, 회중 전체가 비진리 속으로 더욱 깊이 함몰되어 가는 것이 오늘날 교회들의 현실이다.

요사이 "광대 설교"라는 것이 관심을 끌고 있다. 이름 자체가 서커스단의 광대처럼 요란해서 눈길이 당긴다. 광대 설교라 해서 목사가 광대 복장을 하고 설교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설교자가 "설교 본문에 따라 웃거나 울거나 진지해지는" 설교를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끌어들인 것이 하필 "광대"였다.

새에덴교회의 소강석 목사라는 자가 이 설교법을 교회 강단에 도입했는데, 그의 주장인즉, 첫째, "광대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어리석어야 한다. 설교자의 바보스러움과 역설이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고, 둘째, "때로는 설교자가 망가지고 품격이 떨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마음과 숨겨져 있는 감정이 설교자를 통해 청중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광대 설교라는 것이다. 두 번째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 자신이 말씀을 전하심에 있어서 때로는 바보스럽게 망가지며 품격이 떨어질 때가 있으시다."라는 암시가 깔려 있다. 하나님의 마음과 감정을 광대의 감성을 가지고 전달하는 것이 광대 설교라는 것인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전파하는 강단에서 설교자가 광대처럼 바보짓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광대는 시대의 아픔과 한, 정서를 마음에 담아 말과 음악과 춤 등을 통해 인생의 희로애락을 전하며 마음을 치유하고 힘과 용기를 주는 존재"라고 소 목사는 모 칼럼에서 주장했는데, 강단에서 광대처럼 과대하게 웃고 울고 춤추고 노래하고 때론 어리석은 짓도 하는 것이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의 자세라는 얘기인가? 이것은 광대가 이 악한 현 세상에서 갖는 감성적 이미지이지, 세상에서 성별된 교회의 강단에서 본떠야 할 이미지는 아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 남자에게 "신중함"과 "근엄함"과 "진실함"을 요구하고(딛 2:2,7), 그리스도인 여자에게는 "거룩한 행실"과 "신중함"과 "정숙함"을 요구한다(딛 2:3,5). 목사의 자격 요건에는 "신중함과 거룩함"이 들어 있다(딛 1:8, 딤전 3:2). 이 모든 요구 사항에서 공통점이 바로 "신중함"이다. 팔랑대는 점박이 옷과 물감을 떡칠한 애처로운 얼굴과 경박한 몸짓으로 온몸을 흔들어 대는 광대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이미지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방지축에게서 신중함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광대 설교를 한답시고 품격을 내다 버리고 깃털보다 가볍게 말씀을 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아 그분의 말씀을 전달하는 종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은 자칭 목사들일 뿐이다. "본문의 절정을 극화시키기 위해 중간중간에 찬양을 하고 필요시 대중가요의 가사를 바꿔서 부를 때도 있다"면, 그것은 도저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일 수가 없다.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약 4:4).

하나님의 말씀은 엄중하다.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이 성경에서 최초로 언급되는 곳은 "이사야 13:1"이다. 『아모즈의 아들 이사야가 보았던 바빌론에 대한 엄중한 말씀 이라.』 『바빌론에 대한 엄중한 말씀 』은 영어로 " the burden of Babylon"이라 표현되는데, 이는 주님께서 바빌론에게 "무거운 짐"(burden)을 지워 그 무게로 인해 그들로 주저앉게 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제국이라도 주저앉게 할 수 있는 엄중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설교자는 그 엄중한 말씀을 자신의 인격을 통해 전달하는 거룩한 소임을 부여받은 일꾼인 것인데, 그 말씀이 하나님의 기쁨을 전달하든, 눈물을 전달하든, 진지하심을 전달하든, "광대처럼" 전달된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설교이겠는가? 기쁘면 기쁜 것이고, 슬프면 슬픈 것이고, 진지하면 진지한 것이지 왜 하필 광대여야 하는가?

인간에게 그분의 말씀을 전달하는 소임을 맡기신 하나님께서 셋째 하늘에 앉아 계시는 그 위엄과 영광과 권세는 두렵기가 그지없다. 『그때 네 짐승 가운데 하나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 찬 일곱 금호리병을 일곱 천사에게 주니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권세로부터 나오는 연기로 가득 차서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끝나기까지는 아무도 성전에 들어갈 수 없더라』(계 15:7,8). 바로 그 하나님께서 땅에 다시 오시는 모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오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은 교묘하게 꾸며 낸 이야기를 쫓은 것이 아니라 그의 위엄 의 목격자들이었기 때문이라』(벧후 1:16). 사도 베드로가 자신이 변형산 사건에서 보았던 재림의 모습을 이렇게 기술했으니, 그 자신이 "그의 위엄"의 목격자라는 것이다! 경이로운 위엄으로 재림하실 만왕의 왕께서 초림 때 『이스라엘의 왕』(요 12:13)으로 지상에 계시면서 전파하셨던 말씀은 광대의 어리석음과 천박함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주의 교리에 놀라니, 이는 주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분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기 때문이더라』(막 1:22).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사역하신 분의 말씀은 그야말로 "왕의 권위"를 발산하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왕의 말이 있는 곳에는 권위가 있나니, 누가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무엇을 하나이까?"라고 할 수 있느냐?』(전 8:4) 백성들 앞에서 광대처럼 웃고 울며 의도적으로 어리석게 행동하는 왕을 상상해 보라! 소 목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과연 그러했다고 어리석은 말을 내뱉고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팔복 설교가 어리석다고 했다. "힘과 정복을 통해서 땅을 차지하는 것이지 어떻게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또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동과 설교를 봐도 당시의 정황으로 보면 바보스럽고 역설적일 때가 있지 않느냐"라고 했다.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는 말씀은 "온유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왕국의 땅을 실제적인 유업으로 상속받는 것을 의미한다.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의 박해에 대해 육신적으로 저항하지 않은 "온유한 환란 성도들"은 팔레스타인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계 13:10, 약 2:5). 교회 시대에 고난과 박해에도 육신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복음을 신실하게 전파한 "온유한 그리스도인들" 역시 천년왕국 때 땅을 상속받을 것이다(눅 19:12-27, 롬 8:17, 딤후 2:12). 『참 하나님』(요일 5:20)이신 주님을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지, 마귀의 일인지 판단해 보라.

둘째, 그는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구경거리," 곧 "광대"가 되었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도들을 죽이기로 정해 놓은 자같이 맨 마지막에 두신 것으로 내가 생각하노니 우리로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음이라』(고전 4:9).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죽이기로 정해 놓은 자같이 맨 마지막에 두셨다는 것은,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찢겨 죽는 장관을 연출하는 사람들 가운데, 사도들이 맨 나중에 등장하기로 예비된 검투사들과 같았다."라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순교의 절정을 장식할 사람들로 정해 놓으셨다. 따라서 『우리로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은, 콜로세움에 모인 로마인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또한 천사들도 지켜보는 가운데 순교하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코 "광대"를 의미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어리석게 여겨지는 것이지, 복음 전파 자체가 광대의 어리석음은 아니다(고전 1:18). 십자가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믿지 않는 죄인들이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광대 노릇을 하셨다는 뜻이 아니다(고전 1:25). 거듭나지 못한 광대가 성경을 모르는 것처럼 소 목사 역시 성경에는 문외한이다.

재림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계 19:13)이라 불리시며, 초림 때도 『말씀』이라 불리셨다(요일 1:1). 주님은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요일 5:7)의 삼위일체 가운데 『말씀』이라 불리시는 하나님이신즉, 그분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시다(요 1:1, 요일 1:1). 바로 그분께서 오셔서 종들에게 말씀 전파를 위탁하셨다(마 28:19,20, 딤후 4:1,2). 멸망의 광대한 길에서는(마 7:13) 세상과 함께 웃고 울고 노래하는 광대 목사가 환영받을지 모르지만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림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하고 삭제하고 그 뜻을 아무렇게나 왜곡해서 전달하는 자들은 그 변개된 성경만큼이나 망가지고 품격이 없다. 틀린 성경으로는 설교다운 설교를 할 수 없다. 다만 망가지고 또 망가지는 광대의 어리석음만 전달할 수 있을 뿐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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