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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택트(Untact) 시대와 “비대면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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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11월호>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강력한 전파력으로 전 세계에 퍼지면서 사람들의 일상과 사회 현상에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변화들을 가져왔다. 그 변화의 정도가 너무나 커서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인 B.C.와 A.D.를 들먹이며 시대를 바꾸어 놓았다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물론 예전에도 B.C.와 A.D.를 사용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하는 “Before Christ”와 “Anno Domini”의 의미로 썼다면, 지금은 코로나 발병을 기점으로 하는 “Before Corona”와 “After Disease”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우리 역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가져온 변화들을 일상생활에서 체감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개인 간의 거리가 멀어진 점이 그렇다. 밀접하고 밀집되며 밀폐된 공간은 피해야 하는 장소로 권장되고, 음식점에서 식사할 때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띄엄띄엄 앉아 최대한 말을 줄이고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이와 같은 사회적 거리 두기는 올해 추석 명절에 가족끼리 모이는 일도 다음으로 기약하게끔 했다. 심지어 무더운 여름에도 거리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다니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스크 착용은 일상이 되었고 생활의 기본 에티켓이 되었다. 또한 올해 초부터 초중고 학생들과 대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못한 채 온라인으로 수업을 받기도 했는데, 이러한 변화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언택트 시대의 도래”라고 말할 수 있다. “언택트”(untact)는 “비대면”(非對面)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 부정사 “un”과 접촉을 뜻하는 “contact”가 합쳐져서 만들어졌다. 즉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비말에 의한 감염 경로로 전파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서로 간에 얼굴을 맞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언택트 시대의 도래로 인해 전염병 발병 이전에 우리가 기존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대면을 전제로 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거의 모두 멈춰 버렸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불편이나 어려움 등이 당연히 뒤따라야 할 것이지만, 그런 언택트 시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생각보다 큰 어려움 없이 잘 적응해서 생활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술의 발전이 코로나19 바이러스 이전 시대의 공백을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제는 단순한 공백 메우기 단계를 뛰어넘어 교육에서부터 금융, 문화, 의료, 물류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언택트 산업들”이 확장되는 양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등장은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그에 반해 언택트 산업의 부상은 갑작스럽거나 당황스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불편한 소통 대신에 “선택적 단절”을 택한 사람들, 곧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 인프라에 익숙한 세대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언택트 산업이 이미 꾸준한 성장세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그 성장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언택트 시대에 언택트 산업의 부상이라는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것인지 현 문재인 정부는 “교회들”을 향해서도 “비대면 예배”를 강제하고 있다. 이렇게 강제적으로 조치하는 이유 중 하나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발병했던 초기에, 교회도 아니고 이단 축에조차 끼지 못하는 “신천지”라는 사이비 집단에 의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이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사이비 집단을 교회로 착각한 것이다.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어떤 의도에서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전파 요인으로 교회의 대면 예배만을 문제 삼아 지난 8월 19일부터는 수도권 교회들에 대해 대면 예배를 전면 금지했다. 이러한 조치를 마치 사회의 안녕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일처럼 포장했지만, 실상은 세상 정부가 교회 일에 관여하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 발생한 것으로서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핑계로 삼아 공공연하게 시행한 것이었다. 비록 지난 10월 11일에 정부가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를 1단계로 격하시키면서 수도권의 교회들도 예배실 좌석 수의 30% 이내로 대면 예배가 허용되었다고 하지만, 현 “아마추어 정부”가 또 언제 어떻게 대면 예배를 금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문재인 정부는 코로나19 발병 초기 우한시에 거주하던 중국인의 입국을 제대로 막지 않아 전염병을 확산시킨 실책을 저질렀으면서도, 이에 대한 사과와 반성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교회들을 자기들의 실책을 덮기 위한 제물로 삼아 모든 문제의 화살을 기독교계로 돌리고 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교회들은 나름대로 대응책을 찾아 고심하고 있는데, 그 결과 “언택트 시대”에 가장 적합한 예배 방식으로 “온라인 예배”가 최적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한국 교계는 사람들과 돈을 모으고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으로(딤후 4:3) 영상(멀티미디어) 예배, 열린 예배, 힙합 예배, 금요철야 예배, 새벽 예배 등 다양한 예배 방식을 개발해 왔다. 그래서 지금까지 개발해 온 여타 다른 “예배 방식들”과 “예배 문화들” 속에 “온라인 예배”를 하나 더 끼워 넣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온라인 예배”에 대한 “성경적”(?) 정당성을 찾겠다면서 관련된 책들을 출간하고 컨퍼런스를 개최하는 등 열띤 논의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면서 “온라인 예배”로의 길을 활짝 열기 위해 교회와 예배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지속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그 결과 단편적이긴 하지만, “교회”는 본래 “공동체 개념”이었기 때문에,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대면 예배가 아닌 온라인 예배나 비대면 예배를 여러 곳에서 흩어져 드리고 있는 현 상황은 오히려 공동체 개념이라는 초대 교회의 정신을 회복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예배” 또한 그 본질이 형식이나 의식적인 요소보다는 영적으로 드리는 것에 있으므로, 온라인 예배나 비대면 예배도 영적으로 드릴 수만 있다면 현 언택트 시대의 충분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와 예배의 본질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다. 우선 신약성경에서 “교회”는 기본적으로 “유기체”인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지역 교회의 두 가지 용례로 사용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세우신 지역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유기체를 이루고 있는 거듭난 성도들로 구성된 독특한 모임이다. 이 모임은 단순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순수한 모임으로, 지역 교회로 모인 성도들이 각자의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과 교회 내 지체들을 섬기는 유기적인 연합인 것이다(고전 12장). 교회란 단어는 성경에서 117회 사용되었는데, 그중 107회는 지역 교회와 연관해서 쓰였고, 10회만이 유기체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용례로 사용되었다(고전 12:27, 엡 1:22; 5:30, 골 1:18, 딤전 3:15 등). 지역 교회의 용례로 더 많이 사용된 이유는, 지역 교회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지상의 유일한 “가시적 조직체”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역 교회가 강조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조직체가 있지만, 하나님의 영적인 일을 수행하는 조직체는 오직 지역 교회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지역 교회에 바른 말씀과 복음과 진리의 전파 등 여러 사역들을 일임하셔서 수행케 하신다. 주의 만찬과 침례식도 바로 지역 교회 안에서 거행된다. 말하자면 교회는 단순한 공동체의 개념이나 “온라인” 등 가상의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예배”는 이렇게 거듭난 성도들로 구성된 “지역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리고 예배를 올바로 드리기 위해서는 경배의 참된 의미 또한 정확히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나 참된 경배자들이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경배드릴 때가 오나니 바로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경배드리는 그런 자들을 찾으심이니라.』(요 4:23)라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에서 “영으로” 경배드린다는 말씀은,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요 3:6)이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경배를 드리는 자들이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들이어야 한다는 점을(롬 8:14) 보여 준다. 그리고 “진리로” 경배드린다는 말씀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요 17:17), 곧 변개되지 않은 바른 말씀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통해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모든 진리로 이끄시는 역사를 따라(요 16:13)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곧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바른 성경에 기반을 둔 진리여야 하는 것이다.
또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경배 속에서도 형식적인 측면이 있기에 일정한 순서와 질서가 요구된다. 곧 “찬양의 제물”(히 13:15, 엡 5:19,20, 시 146:2)과 “기도”(딤전 2:8, 행 2:42, 골 4:2),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이 담긴 “헌금”(고전 16:2, 고후 9:5-7),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설교”(행 20:7, 고후 1:18-20, 살전 2:13), 설교에 반응하여 몸을 드리는 “헌신”(고전 6:19,20, 고후 5:15), 성도 간의 “교제”(행 20:11, 몬 1:6) 등이 포함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합당한 예배는 지역 교회가 모이는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이뤄지고(히 10:23-25, 고전 14:23), 이 예배에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일도 포함된다(롬 12:1). 따라서 거듭나지 않은 교인들을 데려다가, 변개된 개역성경으로 설교 아닌 설교를 하면서 CCM으로 사람들의 감정이나 사로잡는 “싸구려 예배 의식”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경배와 예배가 될 수 없다. 더욱이 예배의 여러 형식적인 요소가 배제된 온라인 예배나 비대면 예배 또한 성경적으로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다. 온라인상에서 예배를 보고 말씀을 듣는 것은 거리상 또는 일신상의 문제로 예배에 참여할 수 없는 성도가 임시방편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온라인 예배”가 언택트 시대에 가장 적합한 예배인 것처럼 제시하고 그러한 예배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위선과 변명으로 점철된 가증한 기만일 뿐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 자신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저버리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라고 권면한다. 예수님께서도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느니라.』(마 18:2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소위 “대면 예배”는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은 “비대면의 편리함” 속에 익숙해지면 전염병이 발병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온라인 예배나 비대면 예배가 “대면 예배”의 대안이 되어 버리면, 사람들은 온라인상의 편안함에 젖어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함께 모이는 것을 저버릴 것이고, 결국 지역 교회들은 와해되고 말 것이다. 거듭난 성도는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신약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합당한 예배, 곧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기독교계가 “온라인 교회”라는 허상을 내세우면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온라인 예배”는 결국 예배 형식과 진행에 있어서 어떤 질서와 품위도 없이 이루어지는 “비성경적인 예배”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