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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칼 누룩에 취해 있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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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03월호>
“성경적인 성별”(Biblical Separation)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메지 말고, 불의와 관계를 맺지 말며, 어두움과 사귀지 말고, 마귀와 어떤 조화도 이루지 말며, 불신자들과 같이하지 말고, 우상들과 결코 일치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런 자들에게서 “나옴으로써”(come out) “성별”해야(separate) 하는 것이다(고후 6:14-17). “죄”는 물론이거니와, “거짓 교리”로부터도 성별해야 한다. 이는 그것들 모두가 다 교회를 부패하게 만드는 “누룩들”(고전 5:6, 갈 5:9)이기 때문이다.오늘날 배교한 기독교계에 유행어처럼 만연해 있는 “교회의 일치, 연합, 통합, 화해, 협력”을 위한 모든 시도들은 이 “거룩한” 명령을 뒤집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성별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이 명령을 신중하게 받들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교의 물결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런데 이 명령에 가장 크게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다름 아닌 “세상을 사랑하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두려움”이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될까봐(요 9:22; 12:42,43), 그리고 세상의 미움을 사게 될까봐(갈 1:10) 두려워한다. 사실 이 마지막 교회 시대에는 용맹한 그리스도의 군사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성별”은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결단력 있는 행동임을 기억해야 한다.
지난 2월 10일, 한 무리의 “겁쟁이들”이 “한국 교회의 화해와 협력 방안”을 모색한답시고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그들은 소위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복음”에 관한 한 어떤 향기도 맡을 수가 없었는데, 이는 그들이 그것을 원만하게 감당할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고후 2:16). 그들은 스스로 복음주의자들이라 자처하면서도 에큐메니칼 누룩에 취해 있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복음주의”(evangelicalism)란 말은, 은사주의자들까지도 스스로를 그렇게 부를 만큼 오늘날 너무도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본래 16세기의 종교개혁 때 로마카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온”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를 지칭하던 용어[evangelical(영), evangelische(독), evangelique(프) 등]에서 파생되었다. 여기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복음주의”는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빌립보서 1:27에서는 『오직 너희의 행위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되라.』고 말씀한다. 여기서의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순히 고린도전서 15:1-4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 부활”에 관한 “구원의 복음”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서 성도들이 구원받은 이후에 지켜야 할 성경 전체적인 진리의 말씀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죄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다면, 그 이후로는 옛 생활들을 버리고 “성경대로” 믿고 실행해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적이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성별해야 함이 마땅하다. 심지어 같은 구절 안에서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복음의 믿음을 위하여 함께 싸우라.”는 명령을 보게 된다. 즉 성도들은 성경적인 믿음을 위해 함께 싸워야 하는데, 이런 투쟁이 없이는 결코 “성경적인 성별”을 이루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복음주의”가 로마카톨릭과 어떤 면에서 분리해야 하는지 분명해지는데, 곧 “구원의 복음”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적인 믿음과 실행”에 있어서도 분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주의”의 진정한 의미다.
이러한 사실에 유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구원의 복음”이나 “기본적인 교리들”의 내용만 서로 같다면, 그 외의 다른 내용들이 설령 교리적으로 차이가 있을지라도 논쟁을 일삼지 말고 사랑으로 화합하며 연합하자는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아래 모인 겁쟁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신학적 성향이나 교리적 입장을 말하기 전에... 일치를 이루자는 것이다』(박종화 목사, 경동교회). 이들은 성경적인 교리적 입장을 밝히기를 매우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러한가? 그들의 무지가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교리적 입장이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신약 교회의 “교리적인 입장”에 대하여 13권의 서신을 통해 분명하게 밝히면서, 그에 역행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로부터 분리하라고 권면한다.『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열을 일으키고 공박하는 자들을 주의하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분열이라고 하는 것은 교리적인 입장을 밝힌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비성경적인” 교리를 주장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문제는 그와 같은 분열이 나타날 때, 그들로부터 성별하지 않고 오히려 짖지 못하는 개들(사 56:10)처럼 입을 다문 채 그들과 “연합”하려 한다는 데 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의지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거침”을 감수하면서까지 그의 교리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갈 5:11).
『한국교회 연합운동을 하려는 인사들은 가능한 한 서로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사이드에 제쳐놓고, 공통분모를 확인해 나가야 한다... 오히려 한쪽이 분명한 거부 입장을 가진다면 그것을 존중해 주는 것이 진정한 연합운동이다』(박명수 교수, 서울신학대). 이들은 성도들 간에 분열을 획책하는 “비성경적인 누룩”을 제거하는 데에 단 한 시간도 쓰지 않는다. 상대방의 거부감이 두려워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통분모”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가 성도들과 함께 지속되도록 하기 위하여, 거짓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과 마주앉아 공통분모를 찾는 데 단 한 시간도 쓰지 않았다(갈 2:5). 오히려 그런 자들이 베어져 버리기를 원한다고 말할 정도다(갈 5:12). 심지어 “성별되신”(히 7:26)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이 실족하는 것에 대해 개의치 않으실 만큼(마 15:1-14), 성경에 역행하는 자들과 함께 한가로이 앉아 공통분모를 찾지 않으셨다.
빌리 선데이는 말하기를 “성경이 말하는 것과 학자들이 말하는 바가 다르다면, 학자들이 마귀와 한편인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마귀와 한편인 자들과 함께 어떻게 연합할 수 있겠는가? 결코 진리와 비진리는 양립할 수 없다. 어떻게 “연합”이라는 이유로 비성경적인 주장과 양립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목적이 좋은 것이라 해도, 그것은 잘못된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성도들이 성별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벧전 1:15). 위대한 청교도 저자였던 차노크(charnock)는 이렇게 말했다.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본성에 속한 영광의 온전하심이다... 이것은 그분의 영광 중 가장 위대한 영광의 타이틀이다... 이 속성은 그분의 모든 다른 온전하심들 위에 빼어나게 우뚝 서 있는 속성이다.” 그분의 속성이 이러할진대, 진리와 양립할 수 없는 거짓이 버젓이 들어와 있는데도 어찌 “공통분모”를 운운하며 그분 안에서 연합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에큐메니칼 정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연합이 아니며, 성별을 기피하는 거룩하지 않은 악한 영에게서 나온 것이다.
『교회의 존립 근거도 그렇고 교회의 일치노력 목표 역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고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에큐메니칼 정신의 핵심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지나고 세계교회는 ‘교리는 갈라서게 하지만, 봉사는 하나 되게 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고 연합운동이 출범했다』(박종화 목사, 경동교회). 여기에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구원의 복음”을 전면에 내세웠다고 해서, 에큐메니칼 정신의 핵심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 뒤에 이어지고 있는, “교리는 갈라서게 하지만 봉사는 하나 되게 한다.”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이 말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구원의 복음의 내용”만 인정하면, 그 외에 어떤 비성경적인 교리를 가지고 들어온다 해도 용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봉사”이지 “교리”가 아니다. 교리적으로는 달라도 그들은 사랑으로 함께 연합하여 봉사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10년 에든버러(Edinburgh)에서 가증스런 에큐메니칼 운동이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그들에 의해서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복음이 증거된 적이 없었고, 성경적인 연합이 시도된 적도 없었다. 생각해 보라. 어떻게 “복음의 진리”와 예정론을 주장하는 칼빈주의가 양립할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거짓 은사를 자랑하는 은사주의자들과 양립할 수 있겠는가? 로마카톨릭은 어떤가? 불의와 비진리, 거짓, 어두움을 수용하면서까지 연합을 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겠는가? 또 그 일이 제대로 성사되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용기 있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결코 그런 비겁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런 연합운동을 통해 그들이 찾은 “공통분모”는 오직 한 가지일 뿐이다. 즉 바른 성경을 대적하고, 진리의 말씀을 대적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에큐메니칼이란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조롱한다(벧후 3:3,4). 세상 정치인이든, 종교인이든, 과학자이든 간에 그들이 연합을 이루려는 한 가지 주된 목적은, 『주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대적』하는 것이다(시 2:2). 그들이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그들 모두는 악한 영을 따라 주를 대적하기 위해 모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 모두는 그들을 향해 비웃으시고 조롱하시며 또 심판하시는(시 2:4,9) 위엄 있으신 만왕의 왕을 대면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참된 “복음주의”는 결코 에큐메니칼과 양립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그런 어리석은 시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얼마나 성경에 무지한 겁쟁이이며, 얼마나 악한 영에게 미혹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주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용맹스런 그리스도의 군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신다.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딤후 3:5).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