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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적인 교회의 진상을 보여 준 ‘광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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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4월호>
육신적인 교회의 진상을 보여 준 ‘광성교회’필자는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52호에 ‘폭탄주 마신 목사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이는 대형교회 중 하나인 광성교회의 이성곤 목사가 2003년 9월 북한 지원을 위해 여러 교회 관계자들과 북한을 방문하던 중, 중국 곡물업자와 폭탄주로 러브샷을 하고 있는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돼 큰 파문을 일으켰다는 기사를 보고 쓴 글이었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당시에 다루었던 그의 문제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그 일이 있은 후 2004년 4월 16일에 임시당회에서 독주를 여러 번 마신 것을 시인하며 사과했다. 둘째, 그는 4월 21일 수요예배 때에 그 자리에 모인 교인들에게 폭탄주 사건과 인터넷에 떠돌던 모 여신도와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셋째, 그는 자신의 음주문제로 열린 임시당회에서 자신을 후임으로 세워 준 김창인 원로목사의 재정비리 문제를 걸고넘어지면서 자신에게 겨냥된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그런데 필자가 이렇게 다시 광성교회 문제로 펜을 들게 된 것은, 그 교회의 문제에 사사건건 개입해서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내려는 것이 아니다. 남의 집안 일이야 그 집안 사람들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성경이 그들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알려 주고자 한다. 또한 광성교회로 대표되는 한국식 기독교의 현실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전 문제를 다시 언급하지는 않고, 새로이 불거진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데, 말하자면, ‘광성교회 정상화대책위원회’에서 동아일보 하단을 다 차지하는 큼지막한 광고를 낸 일에 관해서다.
‘광성교회사태 진실을 알리며 참된 개혁의 길로 향하여!’ 이것이 그들이 내건 표어였다. 그들은 ‘저희 광성 교우들은 지면을 대하시는 여러분께 하나님의 은총과 평강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부득이 지면을 통하여 본 교회 사태와 문제의 본질을 교계 및 사회에 알리며 참된 개혁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하여, 그동안 신문과 인터넷상에 폭로된 사실들은 모두 왜곡된 것이며, ‘광성교회의 분규의 주체는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교인들과 교회를 개혁하고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신임 담임목사를 광성교회로부터 떠나게 하고자 잘못된 전횡을 일삼고 있는 은퇴목사 및 그를 지지하는 이권과 결부된 일부 분규 조장 무리들과의 의로운 다툼입니다.’라며 이목사를 변호하고, 광성교회 사태를 새로운 각도로 제시하는 네 가지 사항을 열거했다. 그 첫째는 은퇴목사에 대한 공격이었고, 둘째는 담임목사에 대한 변호였고, 셋째는 세상 법정에서 내린 판결과 그에 대치되는 서울동남노회의 결정에 대한 불만이었으며, 넷째는 또다시 은퇴목사에 대한 공격이었다.
독자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묻겠다. 이미 많은 세상 사람들이 이 광고를 봤겠지만, 만일 그들이 이것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 것 같은가? 짐작컨대, 아마도 다음과 같이 혀를 차지 않았을까 싶다. “쯧쯧,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들이 또 싸우는군 그래!”
그렇다. 교회의 분열과 다툼, 그것은 그 누가 봐도 바른 교회상이 아니다. 옳고 그른 것을 떠나, 그것은 사랑의 하나님의 이름에 조금도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교회를 두고 ‘육신적인 교회’라고 부른다. 그런 교회는 성령이 관장하여 사랑과 화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으로 서로 찢고 할퀴는 아주 추한 모습만 연출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제2의 고린도 교회’인 것이다.
인간 지도자들을 따르는 분파주의 교회
『나의 형제들아, 클로에 집안의 사람들이 너희에 관하여 내게 전해 준 바로는 너희 가운데 다툼이 있다는 것이라.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 각자가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폴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께 속한다.”라고 함이라』(고전 1:11,12).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첫장부터 분파주의를 책망했다. 말하자면, 육신적인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이 분파주의인 것이다. 그들은 서로 누군가에게 속했노라고 주장하며, 소위 자신의 영적 지도자를 자랑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그리스도”까지 그 분파 행렬의 선두에 모셔다 놓을 정도로 아주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들은 은사는 많았지만 영적인 어린아이들이기에, 서로 자신들의 지도자를 내세워 자만에 빠졌고, 내가 잘났네, 네가 잘났네 하며 상대방 위에 올라서려고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성교회도 은퇴목사와 담임목사를 놓고 두 파로 갈라져 있다. 어느 편이 잘했고 못했고를 떠나, 두 사람을 중심으로 교회가 갈라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교회의 육신적인 면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만일 진리를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그들은 아예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일들로 편을 갈랐다. 그렇게 갈라진 것은 오직 한 가지, 즉 “죄”가 그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인데, 자, 그들은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책망을 들어야 한다. 『너희는 여전히 육신적인 사람이라.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어찌 너희가 육신적이 아니며 사람을 따라 행하는 자가 아니리요?』(고전 3:3) “육신적”이라는 말에 공감이 가는가?
교회의 내부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교회
『너희는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세상이 너희에게 심판을 받을진대 너희가 지극히 작은 일들을 심판할 역량도 없느냐?... 그래서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고소하러 가며, 그것도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고전 6:2,6)
성경은 그리스도인들끼리, 형제들끼리 문제가 생기면 지역 교회 내의 성도들 앞에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인 성경이 있기에, 그 말씀으로 판단하여 시비를 가리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 말씀으로 정확한 판단이 내려졌을 때에는 말씀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교회 내의 잡음을 가라앉히고 정상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지역 교회의 참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식 기독교를 대표하는 광성교회에게 이런 성경적 실행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역시 광성교회는 교회 내의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갔다. 그들에게는 올바른 판단을 내려 줄 바른 말씀도 없고, 말씀에 대한 최종권위 의식도 없으며 그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불의한 자들 앞에서 재판을 받으려』고 서울동부지방법원에 고소한 것이다(고전 6:1). 성도와 세상 사람들의 문제라면 세상 법정으로 가져갈 수밖에 없지만, 자신들이 목사라고 따르는 이들의 문제를 동부지법에 가지고 간 것은 육신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참 성도’라 할 수 없는 이들이 성도를 자처하며 교회를 세워 놓고 교회놀이를 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육신의 수’를 자랑하며 목사를 변호하는 교회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도다. 너희는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자랑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그들에게 이것을 말한 이유는, 형제라고 하는 자가 음행을 저질렀는데도 『통곡하기는커녕 교만해져서 이런 행위를 한 자를 너희 가운데서 쫓아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은사’로 교만해져서 교회 내에서 실질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죄의 행위들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던 것이다. 적은 누룩은 온 반죽을 부풀리고 있고, 점차 온 교회가 음행으로 오염될 지경에 처해 있는데도 누구하나 성경적으로 지적하여 교회를 살려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만일 형제라고 하는 어떤 자가 음행을 하는 자거나 탐욕하는 자거나 우상 숭배하는 자거나 욕설하는 자거나 술취하는 자거나 약탈하는 자이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전 5:11)고 했고,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 육신은 멸망케』 하라고 했다(고전 5:5).
광성교회는 이미 술마신 것도 시인했고, 어느 여신도와의 (그의 말에 따르면) ‘부적절한 관계’도 인정한 이목사를 교인수를 ‘자랑하며’ 다음과 같이 두둔하고 나섰다. ‘그런 조작된 허위가 사실이라면 어떻게 담임목사가 부임한 지 4개월 만에 6,900명 정도의 평균 출석 교인이 8,400명까지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분규가 발생한 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담임목사를 지지하는 교인수가 줄어들지 않고 평균 출석 성인 교인수의 95%인 6,500여 명을 넘고 있겠습니까?’ 자, 만일 이목사에 대한 사실들이 허위였다고 해도, 이에 대해 할 말은 있다. 그들은 이목사에게 죄가 없다는 증거를 한낱 교인수로 자랑하는 것인가? [퇴임 목사는 7천 명의 교인수를 4만 명으로 노회에 보고하여 교세를 과장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다음의 말씀을 읽어 보라. 『또 내가 보니, 그의 머리들 가운데 하나가 상처를 입어 죽게 된 것 같았으나, 그의 치명적인 상처가 나으니 온 세상이 기이히 여겨 그 짐승을 따르더라. 사람들이 그 짐승에게 권세를 준 용에게 경배하고 또 그 짐승에게도 경배하며 말하기를 “누가 그 짐승과 같으며 누가 감히 그와 더불어 싸울 수 있으리요?”라고 하더라』(계 14:3,4). 『그 짐승』이 누구인가? 장차 등장해서 평화로 많은 사람들을 살육할 적그리스도가 아니던가? 데살로니가후서 2:3은 그를 『죄의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성경은 이 『죄의 사람』을 『온 세상』이 따른다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온 세상이 그를 따른다고 해서 그가 의로운 것인가?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가 “죄의”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죄로 똘똘 뭉친 죄덩어리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따르는 것이다. 하물며 교인수가 1,500명 늘었다고 이목사를 죄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따르는 것으로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다는 것을 성경이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육신의 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심중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는 주께서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더라』(요 2:24). 육신의 수를 자랑하는 것은 그들이 ‘육신적인’ 교회라는 것을 다시 한번 천명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육신적인 교회들이 교회간판을 바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교회라는 이름 대신 ‘대한일요일 모임회 광성회관’이라든지, ‘대한사회 복지회 광성센터’ 같은 것으로 말이다.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유일하게 인정하시는 기구인 ‘교회’를 자기들 멋대로 세우고 그 안에서 육신적인 일들을 자행하여,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들로 인해 하나님께서 모독을 받으시니, 차라리 그리하는 게 그들의 죄를 조금이나마 줄이는 길일 것이다. 육신적인 교회, 그것은 하나님께도, 그곳에 출석하는 교인들에게도, 그리고 세상에게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굳이 쓸 만한 구석을 찾는다면, 그것은 어느 스산한 늦가을 오후 갑작스레 퍼붓는 장대비를 피하는 곳으로나 적합할 뿐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