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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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도의 관상기도로 성경을 왜곡한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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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10월호>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가 비성경적인 이교도들의 수행인 관상기도를 통해 계속해서 한국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다. 처음 그가 그것을 한국 교회에 소개했을 때 관상기도의 위험성을 간파한 이들이 반론의 글들을 썼고, 이에 잠시 주춤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사명감이라도 가진 듯 관상기도를 다시 열심히 전파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너무도 유유자적하게 성경적인 수행인 양 가르치고 있다.

국민일보의 ‘로뎀나무’ 코너에서 ‘침묵의 영성’이라는 글을 게재한 그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러나 태초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성서는 창조주께서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뤄가는 거대한 창조의 파노라마를 펼쳐 보인다. 그러나 말씀이 시작되기 전 영원의 커튼 속에서 그는 실로 매우 오랜 세월을 침묵하고 계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오랜 침묵의 지성소에서 흘러나온 말씀이어서 그토록 위대한 창조가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까. 빛이 있기 전 영원한 어둠이 먼저 있었던 것이다.』라고 했다. 태초 이전에 주님께서 침묵하셨다는 것은 순전히 이목사의 상상이다. 이목사는 주 하나님을 영원한 어두움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이상한 신으로 묘사했지만, 그런 내용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영원한 어두움도 있는가? 어두움은 영원 전부터 계셨던 주님께서 이후 언젠가 지으신 것이다. 『주께서 어두움을 지으시니...』(시 104:20). 목사는 자신의 상상이 아닌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어야 함을 잊지 말라. 『그러나 너는 건전한 교리에 부합되는 것들을 말하며』(딛 2:1).
어두움이 지음받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목사는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의 창조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성경에서 전혀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창세기 1:1의 원래의 창조와 1:2의 재창조 사이에 있었던 사탄의 반란과 그에 대한 심판, 그로써 있게 된 우주적인 어두움에 관하여 무지함을 보이고 있는데, 그는 실로 성경을 가르친다는 목사의 직분을 취했으면서도 말씀에 대한 성령의 조명을 전혀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창세기 1:1과 1:2 사이에 이 우주에 어떤 ‘대격변’이 일어났음을 말씀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창 1:1,2). 창세기 1:2의 『땅은 형체가 없고』에서 “형체가 없고”는 히브리어로 “토후 바보후”이다. 이 말씀은 땅이 이미 큰 재앙으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일그러져 있음을 뜻한다. 창세기 1:3 이후의 창조 기사들을 보면, 사탄의 무리가 거하는 둘째 하늘을 창조하신 둘째 날을 제외하고는, 첫째 날에도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4절),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에도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12,18,21,25절)며 주님이 그것들을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 모든 개신교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창세기 1:2을 1:1과 시간적 연속선상에 놓는다면, ‘왜 주님께서 땅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 1:3 이후처럼 보기 좋게 짓지 않으시고 일그러지게 창조하셨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왜 하필이면 보기 흉하게 일그러뜨리셨을까? 이것은 창세기 1:1의 최초의 땅이 1:2 이전 어느 시점에 큰 재앙을 당하여 1:2에서는 그 재앙의 결과를 보여 주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구를 포함하여 “우주적인 대홍수 심판”이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후서 3:3-6이 바로 이 심판을 설명해 주고 있다. 『먼저 알 것은 이것이니 마지막 날들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그들의 정욕대로 행하며, 말하기를 “그가 온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의 시작부터 그대로 있다.” 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것을 고의로 잊으려 함이라.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다는 것과, 땅도 물에서 나왔고 물 안에 있었다는 것이니 이로써 이전에 있던 세상은 물이 범람해서 멸망하였느니라.』 일반적으로 이 구절들을 ‘노아의 홍수’ 사건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창조의 시작』이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하는데, 성경은 마지막 날들에 조롱하는 자들의 주장이 틀리며, 만물은 “창조의 시작”부터 그대로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씀하는 것이다. “창조의 시작”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는 창세기 1:1을 언급한다. 만물은 창조의 시작 이후로 큰 변형을 겪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 거니시더라.』는 창세기 1:2의 ‘물들’은 이전 세상을 멸망시킨 우주적 대홍수 심판의 결과 우주를 덮고 있던 물들이며, 『땅도 물에서 나왔고 물 안에 있었다』(벧후 3:5)는 것은 현재의 지구가 우주를 덮고 있던 그 거대한 물에 잠겨 있다가 나왔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 심판의 직접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보좌를 덮고 있던 다섯째 그룹, 곧 루시퍼가 하나님의 보좌를 탐내어 반역을 일으킨 데서 기인한다(사 14:12-15, 겔 28:12-19). 창세기 1:2에서 마치 영원 전부터 영원히 있었던 것처럼 이목사에게 비친 그 어두움은 사탄의 반역과 관련 있는 것으로, 사탄도 창조된 피조물이며, 어두움은 그의 반역으로 인해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창세기 1:28에서 주님께서 최초의 인간에게 “땅을 다시 채우라(replenish)”[한글킹제임스성경]고 하셨음을 볼 때, 재창조 이전에 누군가가 땅에 거주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창세기 1:1의 원래의 창조와 1:2의 재창조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말해 주며, 이전 세상에 존재했던 자들의 대반역으로 인한 심판과 멸망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하신 바른 성경으로만 진리의 지식을 알 수 있다. 이목사가 보는 변개된 성서로는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해 조금도 성령의 조명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성령께서 영감을 주어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성서를 보기 때문에 ‘그 오랜 침묵의 지성소에서 흘러나온 말씀이어서 그토록 위대한 창조가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까.’라며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는 헛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래 침묵하지 않으셨다면 이 우주를 위대하게 창조하실 수 없었다는 말인가? 침묵 수행으로 혼적 달관을 이룬 듯한 그런 무능력한 신은 성경의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다. 그런 신은 인도에 가면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다. 『보라, 나는 주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어려워서 못 할 일이 있겠느냐?』(렘 32:27)

또 이목사는 같은 글에서 『여호와는 모세의 출애굽 드라마를 시작하시기 전 40년 동안 미디안 사막의 침묵을 요구하셨다. 그는 또한 홍해 앞에서 절망하고 당황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보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는 모세의 승계자 여호수아가 여리고성 정복을 위해 그 성을 도는 엿새 동안 침묵으로 행진할 것을 요구하셨다. 예수님도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 들어가 40일 침묵의 시간을 보내셨다.』고 했다. 이목사의 논리는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관상기도를 했고, 홍해 앞의 이스라엘이 관상기도를 했으며, 이스라엘이 여리코 성 주변을 돌며 관상기도를 했고,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의 40일 금식기간 동안 관상기도를 하셨다는 식이다. 그는 성경에서 조금이라도 ‘침묵’의 단서가 발견되면 죄다 관상기도에 접목시키려는 잘못된 성경 해석 습성을 보인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그를 그렇게 높이고 있는 것인가?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한 이들이 그들 자신의 정욕에 따라 가려운 귀를 긁어 준 그를 높여 준 것 아니겠는가?(딤후 4:3)
붉은색 안경을 쓰면 세상이 붉게 보이고, 파란색 안경을 쓰면 파랗게 보인다. 관상기도 안경을 쓰니 성경에서 관상기도만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성경을 가르치려거든 색안경을 벗고 『안약을 네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는 성경의 말씀을 유념해야 한다.

관상기도라는 것은 거듭나지 않은 광야의 이교도 수도자들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신의 상상으로 신을 찾아 떠나는 행위였다. 그들은 관상기도를 통해 미지의 신과 주파수를 맞추어 그 신의 음성을 들으려 했다. 이것은 이교도인 카톨릭 수도원들에서 행해지는 기도임에도, 이동원 목사는 그것에 매료되어 마치 그것이 성경적인 기도인 양 가르치며 다니고 있는 것이다. 바른 성경이 없어 진리의 지식이 부재한 한국 교회는 그의 꾸준하며, 지속적이고, 또 무척 관상적인 글들을 통해 서서히, 깊숙이 오염되어 가고 있다. 관상기도는 성도의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를 차단시키는 영적 독극물이다. 마치 하나님이 귀가 안 들리시는 것처럼 통성기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던 한국 교회가, 이제는 그것이 너무 시끄럽다며 관상기도로 돌아서고 있다. 성경은 『모든 일을 시험하여 보고 선한 것을 붙잡으라.』(살전 5:21)고 말씀한다. 이동원 목사의 관상기도를 시험하여 보았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해 보았더니 거짓임이 드러났다. 거짓 앞에서 침묵하고 있기에 관상기도의 ‘침묵’에 당하고 있는 것이다. 거짓 앞에 침묵하지 않으려면 바른 성경으로 진리의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속지 않게 되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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