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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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의 헛된 소통을 꾀하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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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11월호>

지난 10월 9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이하 한복협)는 “기독교와 이슬람”이란 주제로 열린 월례발표회에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대화 및 공존 가능성”에 관하여 논의했다. 발제자들은 이 날 발표회를 통해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과 그 이면의 극한적인 대립에 관해 설명하면서, “비록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차가 크긴 하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상대를 인정하는 자세를 통해 대립과 반목을 극복함으로써 대화와 공존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이슬람과의 “소통”을 꾀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자는 것인데, 사실 그들이 이런 논의를 함에 있어 “성경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지”(롬 4:3, 민 23:17)에 대해서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니, 그들의 논의는 실로 헛된 것이었다.

소통이 불가능한 이슬람 집단
오늘날처럼 “소통”(疏通)이란 단어가 자주 강조되었던 때도 없다.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소통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어 버렸다. 심지어 배교한 기독교계조차 그 “소통”의 위력을 통해 성공적인(?) 에큐메니칼을 이루어가고 있다. 즉 대화와 소통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며, 모두가 하나 되는 최상의 인본주의적인 미래를 꿈꾸며 말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소통이 불가능한 집단 셋이 있으니, 로마카톨릭, 공산주의 그리고 이슬람이다. 이는 그들이 협상 테이블에 앉을 때마다 입으로는 대화와 소통, 약속과 공존을 말하면서도, 마음속에는 항상 거짓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황이 불리해지면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하다가도, 상황이 유리해지면 그들이 한 약속을 단번에 뒤집어 버린다. 도무지 그들에게는 협약이나 약속, 맹세 따위가 무색할 정도다. 특히 이슬람이 그러한데, 그동안 이스라엘과 다른 아랍 국가들 사이에 진행되어 왔던 중동평화협상만 보더라도 얼마나 아랍권이 모든 협약에 있어서 거짓말로 일관해 왔는지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음이 있다. 어떻게 이런 신뢰할 수 없는 거짓말쟁이들과 소통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본 발표회에서 김명혁 목사(한복협 회장)는 모슬렘 지도자를 만났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수용하는 자세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설교와 논쟁이 아니더라도 진정한 교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디 모슬렘이 단 한 번이라도 긍정적인 태도와 수용하는 자세로 다른 종교를 인정한 적이 있던가?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사실 모슬렘 국가들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다. 1948년 제3차 국제연합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에 따르면, “이 권리에는 자기 종교나 신앙을 바꿀 수 있는 자유가 내포된다.”고 명시함으로써, “종교의 자유”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모슬렘 국가들 역시 이 협약에 서명했건만, 그들 대부분은 이를 준수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의 자유”란, 다른 종교로 개종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슬렘에 있어 타종교로의 개종은 죽음일 뿐이다.
특히 그들은 성경을 믿는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을 결코 수용하지 않는다. 언제나 이들을 향해 적대감을 품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최종권위라 믿고 있는 “코란”이 그런 종교의 자유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 성도들이여!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여러분의 친구와 보호자들로 여기지 말라.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그들에게 향하는 이들은 그들에게 속한 것이다. 진실로 알라는 부정한 사람들을 인도하지 않는다.”(5:51). 심지어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라는 명령까지 하고 있다. “믿지 않는 자들과 서로 접전할 때 그들의 목을 쳐라”(47:4). “다신교도를 발견하는 즉시 죽여라. 잡아라. 억류하라. 모든 길에 복병을 두고 기다려라”(9:5). 이런 호전적인 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사실 김목사가 원했던 “진정한(?) 교류”나 “진정한(?) 소통”은 이슬람 “안”에서라면 모를까 이슬람 “밖”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이슬람은 예전과 다르다”든지, “이슬람은 일반적인 편견과 다르게 관대한 종교이고, 평화를 사랑하는 집단이다”라고 주장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이미 마귀가 쳐 놓은 연막에 속고 있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얼굴을 바꾸는 그들의 거짓 평화와 거짓 협정은 다른 종교, 다른 집단을 전복시키고 그 위에 군림하기 위한 정치적 수순에 불과하다. 겉으로는 평화와 공존을 외치지만 언제든지 상황만 되면 그들 속에 품고 있던 칼을 꺼내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칼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공존과 성별
발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김영한 박사(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초대원장)는 “양자의 대화와 협력은 다름을 인정하는 각 종교의 고유한 정체성의 기반 위에서 수행되고, 더 나아가 공존의 해법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공존의 해법”을 찾기 위한 노력이라고?
일전에 미국의 기독교 대표자들과 이슬람 지도자들로 이루어진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존을 위한 협의체”가 구성된 적이 있었다. 당시 이슬람 지도자들이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보낸 서신에는, 이슬람과 기독교 간에 갈등이 지속되는 한 진정한 세계 평화는 이뤄질 수 없고, 이제는 두 종교가 “공동의 기반”을 찾아야 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렇듯 “세계 평화”와 “공존”이란 용어는 인간존중, 종교다원주의, 열린 종교, 종교간 대화, 에큐메니칼을 표방하는 “마지막 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말들이다. 사실 그 이면에는 하나님도 없고, 절대적 진리인 성경도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죄인들의 욕망이 꿈틀대고 있다. 여기에는 진리와 비진리의 구분이 없으며 의와 불의가 나란히 공존하고 있다. 선과 악의 구분이 없고, 빛과 어두움의 경계도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자들을 향해 경고하기를,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과 빛 대신 어두움을, 어두움 대신에 빛을 두며, 단 것 대신에 쓴 것을, 쓴 것 대신에 단 것을 두는 자들에게 화로다!』라고 말씀한다(사 5:20).

죄로부터의 성별, 비진리로부터의 성별, 세상으로부터의 성별이라는 성경적인 진리가 거부되는 한, 그들이 주장하는 바 “공존”과 “평화”를 위한 노력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위 협의체가 발표한 선언문에 따르면, “대화와 교육, 만남을 통해 두 종교가 각각 신성한 것으로 지키고 있는 것에 대한 상호 이해와 존중, 인정과 지원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 창설 목적을 밝히고 있다. “각 종교가 각각 신성한 것으로 지키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소통”을 통해 “공존”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공존”함으로 “성경적 성별”을 무너트리자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경고하고 있다.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의가 불의와 어찌 관계를 맺으며 빛이 어두움과 어찌 사귀겠느냐?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어찌 조화를 이루며 또한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떤 부분을 같이하겠느냐?』(고후 6:14,15) 성별이 없는 공존을 위한 소통은 헛될 뿐이다.

진리가 결여된 헛된 소통
물론 모슬렘인들에게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대비하고 지혜롭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구령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서도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말하지 않고서는 결코 온전한 복음을 전할 수 없다. 부정이 없이는 긍정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한국세계선교협의회가 제공한 “모슬렘과 대화 시 유의해야 할 7계명”은 복음을 전파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마호메트와 코란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라.” “성경을 함부로 다루지 말라.” “삼위일체나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 사용을 주의하라.” 그러나 그들에게 그들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종교와 코란, 마호메트와 알라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것은 구원의 복음의 근간을 흔드는 일인 것이다(요 20:31).
이렇게 복음을 온전히 전하지도 않고 진리를 전하지도 않는 교류와 소통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사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행하는 이슬람 국가들을 향한 선교가 명목상으로만 그치고 봉사활동 수준에 머무는 것은 다 이 때문이다.

이처럼 한복협이 헛된 소통을 꾀하는 오류를 범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그들 논의의 “기본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본 전제는 “양 종교가 공유하는 유산을 통해 복음 전달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양자의 대화와 협력은 다름을 인정하는 고유 정체성의 기반 위에 수행하는 것”이다. 즉 논의의 출발이 “같음과 다름,” 곧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공통된 것과 다른 것”을 찾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다른 것을 인정하고 공통의 기반을 찾아 소통과 공존의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올바른 전제가 아니다. 어떤 문제든지 “옳은가, 그른가” 혹은 “진리인가 비진리인가”의 논의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와 다르게 오늘날 에큐메니칼을 위한 모든 종교 간 대화의 논의는 득실관계나 정반합의 원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롬 4:3)의 관점에서 모든 문제를 논의한다면, 결코 한복협처럼 헛된 소통을 꾀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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