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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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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1월호>

우리나라가 한국인 모슬렘 6만 명의 시대를 맞았다. “한국이슬람교중앙회”에 따르면, 국내 총 모슬렘 수는 26만여 명이고, 그중에서 한국인 모슬렘 수는 6만여 명으로 집계되었다(2018년 기준). 이러한 수치는 국내 모슬렘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데, 한국이슬람교중앙회가 설립된 1965년에 3천 7백여 명이었던 모슬렘 수가 2005년도에는 15만 명을 넘어 2018년도에 26만여 명에 이름으로써 53년 만에 약 70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아울러 모슬렘들이 예배를 드리는 이슬람 사원은 전국에 16개가 있고, 소규모 사원이나 기도원에 해당하는 “무살라”(mussalah)는 80개 정도가 있다. 이슬람교는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신도 수가 많은 종교이다. 미국 통계 조사 기관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 의하면, 전 세계 모슬렘 인구수는 약 18억 명에 이른다(2015년 기준). 22억여 명으로 규모가 가장 큰 기독교와는 4억 명 정도 차이가 나지만, 모슬렘들의 증가 속도가 빨라 2035년이 되면 모슬렘 수가 기독교인 수를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편 이슬람교에 대해 한국인들이 받는 인상과 이슬람교 관련 언론 보도 인식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이슬람교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고 있는가”를 묻는 조사에서 대상자 중 75%가 테러, 전쟁, 분쟁 등을 떠올리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더욱이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여러 만행이 언론에 보도됨에 따라, 모슬렘 수의 증가를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들의 증가로 인식하여 사회적 위험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것은 “이슬람 포비아”(이슬람 민족에 대한 혐오증 또는 공포증)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를 두고 소위 온건한 모슬렘들은 언론이 이슬람과 관련하여 편향되고 왜곡된 보도만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단순히 언론의 탓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은 실제로 이슬람 테러 관련 사건 사고들이 전 세계에서 끊이질 않기 때문이다. 일례로 지난 10월 16일에는 프랑스 파리 외곽에 있는 한 중학교에서 표현의 자유를 가르치려고 마호메트를 만평으로 그린 주간지를 보여 준 역사 지리학 교사가 참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달 29일에는 프랑스 남부 니스에서 북아프리카 튀니지 출신의 한 청년이(21세) 성당 안으로 들어가 흉기를 휘둘러 교인 2명과 성당 직원 1명이 살해당하는 일도 있었다. 튀니지는 국민의 절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이다. 2016년 12월에는 한 테러범이 독일 베를린의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트럭을 몰고 돌진하여 12명의 시민을 숨지게 한 적이 있는데, 그 역시 튀니지 출신의 이슬람 극단주의자였다. 지난 11월 2일에도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있는 카불대학교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무차별 총기 난사하여 최소 40여 명이 다치거나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같은 날 오후 8시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총격이 발생해 4명이 숨지고 17명 이상이 다쳤다. 당시 현장에서 경찰에 의해 사살된 북마케도니아 출신의 20대 테러 용의자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 “이슬람국가”(IS)에 가담하기 위해 시리아로 가려 했다가 적발되어 처벌받은 전력이 있다. 또한 27일에는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 섬” 중부에 있는 “름반통고아”라는 마을에서 이슬람국가(IS)에 충성을 맹세한 무장 단체 “동인도네시아 무자히딘”(MIT)으로 추정되는 무장 세력에 의해 한 명은 참수되었고 다른 희생자 한 명도 목이 거의 잘리는 등 기독교인 4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28일에는 나이지리아 북동부의 도시 “마이두구리” 외곽에서 이슬람 과격단체 “보코하람”의 무장 대원들이 “코쇼베 마을”의 한 논에서 일하고 있던 근로자들을 묶은 뒤에 목을 베는 등 최소한 43명의 농장 근로자들을 죽이기도 했다.


이처럼 언론의 편향된 보도로만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모슬렘의 잔인하고 끔찍한 만행과 테러는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이런 만행이 극히 일부 극단주의자들 및 과격주의자들의 잘못된 소행일 뿐, 테러는 <코란>의 가르침도, 이슬람교의 본질도 아니라며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 이슬람 하면 테러가 떠오르는 사람들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고, 이슬람의 본질은 “평화”에 있다고 계속 선전한다. 특히 <코란>은 평화를 강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를테면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코란 2:256), “타인 그리고 지상에서 아무런 해악을 끼치지 아니한 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살해하는 것은 모든 백성을 살해하는 것과 같으며”(코란 5:32), “적이 평화 쪽으로 기울인다면 그쪽으로 향하라”(코란 8:61), “너희에게는 너희의 종교가 있고, 나에게는 나의 종교가 있을 뿐이라”(코란 109:6) 등의 구절을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테러를 일으키는 모슬렘들도 “금지된 달이 지나면 너희가 발견하는 불신자마다 살해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거나 포위할 것이며 그들에 대비하여 복병하라”(코란 9:5), “내가 불신자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리니 그들의 목을 치고 그들의 각 손가락을 잘라라”(코란 8:12), “너희가 전쟁에서 불신자를 만났을 때 그들의 목을 쳐라”(코란 47:4), “선지자여,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에 대항하여 ‘성전’(聖戰, 지하드)을 하되 그들에 대해 엄격하라. 그들의 거주지는 지옥의 사악한 말로니라”(코란 66:9) 등의 구절들을 테러의 근거로 내세운다. 도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인가?

사실 <코란>에는 이처럼 한쪽에서는 평화를 말하다가도 또 다른 쪽에서는 “지하드”를 말하는 식의 서로 상충하는 구절들이 많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려고 이슬람교에서는 “나시크”(Nasikh)라는 교리를 만들었는데, 곧 어떤 구절들은 다른 구절들에 의해 취소되거나 대체된다는 교리이다. 이와 연관된 구절이 바로 “어떤 말씀도 폐기하지 아니하고 망각하게 하지 아니하되, 더 나은 또는 그와 동등한 말씀으로 대체하시나니, 알라는 모든 일에 전지전능하심을 너희는 모르느뇨.”(코란 2:106)라는 구절이다. 이러한 계시는 어떤 유대인이 “마호메트의 명령이 마음에 드는가? 그는 자기 추종자들에게 어떤 것을 명령했다가도 금지하며, 그런 식으로 서로 다르게 명령하면서 오늘은 이 말 했다가 내일은 그 말을 취소하니, 이것은 경전이 될 수 없으며 한낱 마호메트 개인의 얘기가 아니던가?”라고 물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주어졌다고 한다. 말하자면 알라가 자신의 선지자인 마호메트에게 했던 말들이 앞뒤가 맞지 않자 그에 대한 변명거리를 만들어 준 셈이다.


일반적으로 “나시크 교리”에 따르면 나중에 주어진 계시가 이전에 주어진 계시를 취소하거나 대체하게 된다. “나시크 교리”를 잘 이해하기 위해 <코란>의 구성을 간략히 살펴보면, <코란>은 모두 114개의 장과 6,200여 개의 절로 되어 있다. <코란>은 “첫 번째 장”(개경장)을 제외하고는 길이에 따라 가장 긴 장부터 시작하여 점점 짧은 장의 순으로 나아간다. 이를테면 제2장은 286절인데, 제110장은 3절에 불과하다. <코란>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내용과 문체의 유사성 및 변화 등을 기준으로 삼아 그 내용을 시대순으로 구분하기도 했는데, 곧 <코란>을 크게 “메카 계시 장”(86개의 장)과 “메디나 계시 장”(28개의 장)으로 구분한 것이다. 연대기 순서로 보면 메카에서 받았다는 “메카 계시”가 먼저이고, 메디나에서 받았다는 “메디나 계시”는 나중이다. 메카에서 받았다고 하는 계시는 소위 “평화의 계시”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이후 메디나에서 받았다고 하는 계시는 “칼의 계시”가 주된 내용이다. 즉 평화의 계시에서 칼의 계시로 바뀐 것이며, 처음에 계시가 되었던 평화의 계시는 취소되고 칼의 계시로 대체된 것이다.


“불신자들을 살해하라!”라는 내용의 “칼의 계시”에 해당하는 코란 9:5만 놓고 보더라도, 메디나에서 계시가 된 이 구절 하나로 다른 124개의 구절을 취소시켜 버린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이미 취소된 구절들을 가지고 의미 없이 떠들어 대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코란>에 평화를 말하는 구절이 나온다고 해서, 또는 테러를 일으키고 전쟁과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진정한 모슬렘들이 아니며 극히 일부의 극단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한다 해서 “호전적인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되리라.』(마 7:20)라는 말씀과 『속지 말라, 하나님은 우롱당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라.』(갈 6:7)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그들이 심어서 맺고 거둔 그들의 열매를 따라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판단할 뿐이다. 그 열매로 보건대 이슬람교는 결코 평화의 종교가 아니다. “테러의 종교,” 곧 “지하드의 종교” 그 자체인 것이다.
사실 “나시크 교리”는 후대의 계시가 앞선 시대의 계시를 무조건 취소하거나 대체한다고 확정할 수 없을 만큼 상당히 복잡하다. 어디까지 취소할 것인지 그 범위를 놓고도 이슬람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시크”는 이슬람교의 율법인 “샤이라”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주석자들이 나시크에 완전히 숙달할 수 없고, 또 그것을 외우지도 못하며, 심지어 나시크와 연관된 구절들을 서로 혼동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라크 쿠파의 어느 모슬렘 사원에서는 나시크에 숙달하지 않은 어떤 모슬렘이 <코란>을 설교했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이처럼 <코란>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마치 뱀의 갈라진 혀처럼 한 입으로 두말하면서, 한쪽에서는 테러를 일삼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평화의 종교 운운하며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 특히 “PC주의”(정치적 올바름), “소수자차별금지법” 등에 힘입어서 모슬렘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평화의 종교로 나아갈 것인데, 결국 이들이 말하는 평화는 장차 적그리스도가 가지고 올 거짓 평화로 이어지게 된다. 환란 기간에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모슬렘 국가들은 적그리스도에게 동조하여 3년 반 동안 거짓 평화가 이 땅에 도래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날에 적그리스도는 성경의 예언대로 “평화롭게” 와서 술책으로 그 왕국을 얻고(단 11:21), “평화롭게” 이스라엘의 가장 기름진 곳까지 들어갈 것이다(단 11:24). 그런 다음 거짓 평화의 기간인 전 3년 반이 지난 시점에서 이스라엘과 처음에 맺었던 평화 조약을 파기하고, 유대인들의 조상이나 그들의 조상의 조상들까지도 하지 않은 가증한 짓을 하게 될 것이다(단 11:24). 그리고 그때 아랍 국가들도 본색을 드러내면서 이스라엘을 대적하게 된다.


마지막 때에 “평화의 바람”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진정한 평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만 이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하늘로부터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살전 1:10, 딛 2:13).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자비와 진리가 함께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출”(시 85:10) 진정한 평화의 때가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평화를 말하는 그 어떤 개인, 단체, 종교, 인종, 국가라도 경계를 해야 하고, 특히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고 자칭 평화의 종교라고 떠들어 대는 이슬람에 대해 더욱 주시하면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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