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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 없는 설교자들의 난상토론 - “정치적 설교 대 순수한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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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10월호>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목사(pastor)를 주신 것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기 위해서다(엡 4:11,12). 이 일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선 목사는 기본적으로 “교사”여야 한다(딤전 3:2).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못하는 목사는 강단에 설 자격이 없다. 하나님의 피로 사신 바 된 하나님의 교회가 그들에게 맡겨진 만큼, 목사들은 신실하게 양무리를 돌보아야 한다. 그들을 위해 늘 깨어 기도하고 눈물로 훈계할 수 있어야 하며 은혜의 말씀 가운데 그들을 굳게 세워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행 20:28-32).하나님께서 준비케 하신 말씀을 진리인 성경에 근거하여 정확하고 담대하게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만이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쓰시는 설교자들이다. 그러나 이 나라 교회들의 강단을 보면, 하나님께서 세우시지도 않은 목사들이 나와서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그들은 소위 “무자격 설교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온전한 설교를 할 수 있는 “바른 성경”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에 관해서는 정도를 벗어나 사람들의 믿음을 뒤엎는 현상들이 나타나고(딤후 2:18), 더러운 이익 때문에 가르쳐서는 안 될 것들을 가르침으로 교회를 온통 뒤집어 놓는 일들도 나타나는 것이다(딛 1:11). 한국 교회 설교의 문제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피에르 베르톤(Pierre Berton)은, “오늘날의 설교는 영이 부재하고 부적합하며 따분하고 잘못 전달되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성도들에게 죄에 대한 강한 찔림과 말씀을 통한 강한 도전을 심어 주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고, 세상과 죄로부터 성별케 하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여 신실한 자로 서게 해야 할 설교가 만담이나 도덕적인 훈화, 심지어 비진리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강단의 현실이다.
지난 9월 7일 기독교회관에서는 <기독교사상> 창간 5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 시대의 설교 - 설교는 비정치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날 패널로 참석한 5인의 목사들은 “정치적인 설교”에 관한 자신의 생각들을 소신 있게 피력했는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성경적 진리 안에 서 있지는 않았다.
“정치적인 설교”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는 단순히 설교 시간에 도입부 및 예화나 예증을 위해 정치적인 현안들을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을 말하진 않는다. 설교는 그 속성상 호소력을 지니고 있기에, 성도들로 하여금 특정 정치적인 현안들에 대해 어떤 관점과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자신의 말로 풀어가고, 그 말에 대해 동조하게 하며 더 나아가 그들을 “설득 및 선동”하여 그러한 모임이나 활동 및 운동에 동참토록 유도하는 설교를 “정치적인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일례로 “FTA 반대 문제”나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문제”를 설교 시간에 가져와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교인들에게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환기 및 주입시키고 더 나아가 이를 위한 운동에 동참토록 유도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정치적 설교나 정치적 참여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정도에 차이는 있어도 이 날 참석한 목사들 모두 동일한 입장이었다. 정치적 설교에 대해 다소 견해를 달리했던 정용섭 목사(대구성서아카데미원장)조차도 ‘설교에 있어서는 정치적 언급을 최소화한다 할지라도, 개인적으로든 연대적으로든 정치적인 행위에는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정치적인 설교”든 “정치적인 참여”든 그것은 목사의 임무에 속한다는 것이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그중에서도 조헌정 목사(향린교회)가 가장 “정치적”이었다.
그는 위에서 일례로 제시한 내용을 주일날 예배 때 설교했던 장본인인데, 소위 “설교의 현장성”을 강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예수도 회당 안에서 말씀을 선포하지 않고, 거리에서 민중과 어울리며 했다... 요즘 한국 교회의 일부 설교를 들으면, 현장성이 없어 안타깝다... 구체적인 현안을 주제로 설교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고백이며, 예수님께서 거리에서 행하신 설교의 역사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가 말하는 “설교의 현장성” 혹은 “설교의 역사성”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의 행위의 열매가 증거하는 바, 소수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일이라든지, 추방의 아픔을 당하는 자들을 부둥켜안고 눈물로 위로하는 일이라든지, 정의와 평화를 이 땅에 구축하기 위해 목숨 걸고 일을 한다든지, 차별받고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민중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다든지 하는 일을 가리킨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목사의 임무”라고 선언한다. 과연 이것이 설교자의 임무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인가? 이것이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이란 말인가? 그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오셨다는 구절을(마 9:13) 읽어 보지 못했단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사건이 겨우 그가 말하는 “설교의 현장성”을 이루기 위한 것이란 말인가? 예수님께서 거리에서 행하신 설교의 내용은 그가 주장하는 민중을 위한 “사회복음”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님을 단순히 “억압받는 민중의 지도자요 선각자” 정도로 폄하시키는 “그”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죄를 제거하신 그분의 자비와 은혜와 능력을 가리고 있는 “그”는 누구인가? 그는 “다른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개시키려는 자일 뿐이다(갈 1:7-9).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성도들을 “정치적 현안”에 끌어들일 것이 아니라,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로 양육시켜 “현장”에서 복음과 진리를 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수백 명의 대추리 도두리 농부들의 아픔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있어도 그들이 그들의 죄로 인해 지옥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연민은 왜 갖지 못하는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왜 목숨을 걸지 못하는가 말이다. 성경적인 설교자들 가운데 아무도 억압받는 민중의 인권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진리와 복음을 지키고 전파하다가 핍박과 고문을 당했을 뿐이다. “설교의 현장성”을 말하려면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다.
또 다른 패널로 참석한 유경재 목사(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사장)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는 역사에 관심을 갖지 않고서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면서 ‘설교는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무게를 실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룩하기 위해서 ‘정치적인 설교’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소위 인간적인 힘으로 이 땅에 의와 화평으로 통치되는 왕국을 이룩하려는 후천년주의자들의 망상에 불과하다. 이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오셔서 다윗의 보좌에 앉아 문자적이고 정치적인 나라인 천국을 세우시기까지는 결코 이룩될 수 없다. 굳이 “정치적인 설교”를 하고자 한다면,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왕국”에 대해 설교해야 할 것이다. 세상 정치의 현안이나 문제 따위는 단순 정보로도 족하다. 그것을 설교를 통해 재해석하고 환기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을 나그네요, 순례자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내용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성도들은 정치 현안에 관한 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준(마 22:21) 위에서 거리를 두고 판단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로마서 13:1-7과 디모데전서 2:1-4의 말씀을 벗어나지 않는 범주 내에서 분별력을 잃지 않으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고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는 역사를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관심조차 가질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의 존립 목적은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다. 교회의 존립 목적은 오직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시켜야 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가운데 선교에 전념하는 데 있는 것이다. 설교자들의 소임은 바로 이것에 집중되어야 한다. 기도하는 일과 말씀의 사역에 전념했던 열두 사도들의 모습(행 6:1-4)과 오늘날의 “정치적 설교”와 “정치적 행위”에 뛰어들려는 목사들과 얼마나 다른가?
다시 말해 설교자는 설교자로서의 본분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동호 목사(높은뜻숭의교회)는 이에 관하여 ‘상업적이냐 아니냐, 정치적이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면서, 설교자의 순수성과 양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순수해도 틀릴 수 있다... 순수해서 틀린 것을 정죄해선 안 된다... 그 순간 얼마나 양심적이었나, 순수했나 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했을 때는 실수해도 괜찮더라.’고 말했다. 실로 설교에 관한 한 기본에도 못미치는 주장이다. 그는 진리의 지식을 따르지 않는 “순수함”이 어떤 폐해를 낳았는지 성경을 통해서 배우지 못했단 말인가? 그 순수한 열성은 교회를 파괴시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빌 3:6). 순수함에서 비롯된 “실수”를 용납하는 것은 불의와 타협하고 비성경적인 교리를 뿌리 내리게 하는 길을 열어 주게 된다. 설교자이든 그가 전하는 설교이든, 그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성경적 기준 아래서 이루어져야 한다. 설교자의 순수성과 양심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그의 설교자로서의 분별 없는 주장은 무책임한 태도로 이어져 설교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을 설교를 듣는 회중들에게 넘기고 있다. 설교는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권위 있는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회중들을 진리로 깨우치고 인도하는 것인데, 어찌 그 판단을 회중들에게 맡길 수 있단 말인가? 회중들이 수용하면 좋은 설교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설교란 말인가? 이는 교인수가 많은 교회가 가장 올바른 설교를 하는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만일 회중들이 비진리로 오염되어 있거나 진리에 무지한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모습은 성경을 근거로 진리를 설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도 진리를 확신하지 못하는 설교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은 자신의 설교가 성경적으로 옳은지에 대한 분별력이 없다. 그래서 다른 판단 기준들을 찾는 것이다. 김목사는 마지막 때의 사람들의 상태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성경적인 권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딤후 4:3,4).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하고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이다(딤후 4:5). “만담”식의 설교를 하건(장경동 목사), 은사주의 거짓 교리를 선포하건(조용기 목사), 특정 대통령 후보를 옹호하는 정치적 설교를 하건(김홍도 목사) “순수성”만 유지하면 그만인 것인가? 또 회중들의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줄 수만 있다면 어떤 설교든 용납하란 말인가? 자격 없는 설교자들은 강단에서 내려와야 한다.
이 나라 교회들에 생명력이 없는 것은 강단이 죽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교인들에게 설교하는 것”만큼 쓸데없고 비참하며 슬픈 현실은 없다. 설교자는 그의 설교와 같다. 다시 말해서 설교는 설교자의 인격이다. 그렇기에 자격 없는 설교자들의 설교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격 있는 설교자라면 다음의 말씀이 주의 명령임을 명심하는 가운데 더 이상 설교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고 진리를 온전히 전파함으로써 그 임무를 완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며, 전도자의 일을 하고 네 직무를 완수하라』(딤후 4:5).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