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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에 관한 합동총회 신학자들의 진흙탕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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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3월호>
예장합동 총회신학부가 최근 국내에서 줄을 잇고 있는 자살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2월 11일 서울 대치동 예장합동(총회장 최병남 목사) 총회회관에서 공청회를 개최했다고 기독언론들이 보도했다. <크리스천투데이>에 따르면, 공청회 진행을 맡은 교단 신학부장 서창원 목사는 “오늘 논의된 내용이 교단의 입장은 아니다”라고 분명히 전제했다. 논문 발표는 이상원 교수(총신대원 기독교윤리학), 이한수 교수(총신대원 신약신학), 박혜근 교수(칼빈대 조직신학)가 맡았으며, 자살에 관한 교단의 입장은 올 정기총회에서 정해질 전망이다. 이들 신학자들은 자살한 신자의 구원 여부에 대해서는 대체로 “구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하는데, 그들의 주장을 살펴보도록 하자.신문에 따르면, 이한수 교수는 “믿음만 있으면 행위나 삶이 어떠하든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이 만연한 상태”라고 운을 뗀 뒤, 죄를 행하는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얻지 못한다는 내용의 성경 구절(엡 5:5 등)을 들며 교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자살에 대해 경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교수는 이에 부언하기를 “자살이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없앤다는 말이 아니다”라면서 “죄악에 대해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거나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한 것을 불신앙의 신자들을 흔들어 깨우기 위한 하나의 경고로 볼 뿐”이라고 하였다. 이교수가 믿음만 있으면 어떻게 살아도 구원을 받는다는 참으로 간증이 안 되는 믿음을 지적한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그의 자세는 가히 신학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볼 수가 없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불신앙의 신자들을 흔들어 깨우기 위한 하나의 경고일 뿐이라면, 주님의 어떤 말씀들은 과장된 엄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인즉, 하나님께서 빈말 하시는 분이란 말인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말하는 어떠한 빈말이라도 심판 날에는 그에 관하여 해명하게 되리라』(마 12:36). 인간의 빈말을 심판하실 하나님께서 빈말을 하실 리 없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롬 6:23),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고전 6:9,10, 갈 5:19-21, 엡 5:5)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은 성도가 거듭난 후에 주님을 섬긴 것에 대한 ‘보상’이며, 구원의 보존이나 상실과는 무관하고, 말 그대로 ‘상속받는 유업’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들이니 하나님의 상속자들이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 상속자들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받은 것은 함께 영광도 받게 하려 함이니라』(롬 8:17). “자살이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없앤다는 말이 아니다”라고 한 이교수는 후에 “어떤 의미에서는 자살이 구원 문제와 직결된 문제일 수 있다”고 함으로써 그 자신이 자살과 구원에 관해서 깊은 혼란에 빠져 있음을 보여 준다. 죄로 인한 죽음과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 상실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이 서 있지 않기에 모순적인 주장으로 이치를 어둡게 하고 있는 것이다.
<뉴스파워>에 의하면, 박혜근 교수는 “ ‘자살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느냐’라고 묻지 말고 ‘구원받는 믿음과 자살행위가 양립할 수 있느냐’라고 물어야 한다.”며 “구원받는 믿음과 자살행위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구원받은 신자라면 자살 충동을 느낄 수는 있어도 자살을 결행할 수는 없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는 믿음과 자살행위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부분적으로 옳은 주장일 뿐, 구원받는 믿음과 자살행위의 양립성은 달리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정상적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의식해 죄를 짓지 않게 되지만,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지속적으로 죄에 대해 경고하고 실제적인 예들을 제시함으로써 성도가 죄에 패배하고 변질될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너희가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너희가 순종하는 자의 종이 되어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든지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는 줄 알지 못하느냐?』(롬 6:16) 인간의 구원과 그 이후의 선한 행위를 반드시 필연성을 부여해서 연결시킬 수만은 없다. 전쟁에 전사자가 생기듯이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도 전사자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벧전 5:8).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후 영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들을 행하는 것이 주님의 원하시는 바지만(엡 2:8-10), 갓 거듭난 성도가 말씀을 먹고 자라지 못하면(벧전 2:2) 영적으로 고사하여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마귀에게 삼켜져 극단적으로는 자살까지도 범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자살을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여 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크리스천투데이>에 따르면, 이상원 교수는 성경과 개혁주의 전통이 자살과 구원의 연관성을 명시적으로 가르치지 않으므로 교회가 성급한 판단을 내려선 안 된다는 다소 중립적 입장을 취했으나, 이한수 교수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살이 구원 문제와 직결된 문제일 수 있다”며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으며, 박혜근 교수는 한 차원 더 나아가 자살이 구원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역설했다. 박교수는 “어떤 경우에 어떤 특정한 죄는 믿음을 버린 결과일 수 있다”며 “자살 역시 경우에 따라서는 믿음의 배교일 수 있다”고 했다. 즉 경우에 따라 자살이라는 행위는 이미 믿음을 버린 기독교인의 선택일 수 있으므로 이럴 때 “은혜의 교리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논문 발제의 상황이 마치 세 신학자가 진흙구덩이에서 만나 씨름을 하고 있는 듯한 형국이다. 확신 없는 “중립주의”와 소극적인 “가능성주의”와 적극적인 “단정주의”가 뒤엉켜 싸운다. 제자리에서 엉거주춤하는 앞의 두 신학자들은 제쳐 두고, 자살은 구원상실이라고 단정해 버린 박혜근 교수에게 묻고 싶은 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어찌하다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여 죄를 짓고 믿음을 버렸다면, 그는 더 이상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없고 그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가?”이다. 이것은 이들 신학자들이 따르는 칼빈주의 5대 강령 중 다섯 번째인 ‘성도의 견인’과 무관하지 않다. 침례를 받고 끝까지 거룩함을 유지하며 견인해야 택함받은 자라는 것이 ‘성도의 견인’이다. 칼빈주의라는 말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으로 인식되나, 칼빈주의 5대 강령의 전체 결론은 끝까지 견디지 않으면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친다. 구원의 보장이 행위로 증명되어야 한다면, 이 세상에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사람이 누구인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라는 표현 자체는 성경적이지만, 칼빈주의 5대 강령은 성경적인 구원의 영원한 보장과 모순되는 이단 교리이다. 하나님께서 값주고 사신 성도는 성령의 인침을 받아 영원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며, 우리와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가 “구속받는 그 날까지” 우리 유업의 “보증”이 되신다(고후 1:22, 엡 1:13,14, 요 14: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또 아무도 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니라.』(요 10:28)고 하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자는 아무도 없다(롬 8:39). 그러나 박교수는 “믿음을 버린 자살이라면 은혜의 교리는 적용될 수 없다”면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할 것이라는 바울 사도의 말을 빌어 자살이라는 죄가 심각하게 크다 해도 그 죄가 하나님의 은혜를 무력하게 하지 못한다는 의견은 자살한 사람을 무차별하게 정죄하는 것만큼이나 극단적 입장이다.”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은혜를 극단적이라고 매도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성경을 가르친다는 신학자의 자세인가? 구원받은 자가 죄를 짓고 지옥에 가게 된다면 주님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박교수는 자살이라는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보다 크게 보았다. 불을 끄는 것이 물이라면, 죄를 씻는 것은 피이다(히 9:22). “하나님의 피”가 씻지 못할 죄가 무엇이란 말인가?(행 20:28, 요일 1:7) 박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제한시킴으로써 주님의 구속 사역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제한적 속죄’라는 칼빈주의 제3강령을 가르치는 칼빈주의자들의 한계이다. 주님께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려고” 예정, 곧 “미리 정해놓으셨기” 때문에(롬 8:29), 믿는 사람의 운명은 절대적으로 확정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것은 아무도 변경시킬 수가 없다.
필자는 자살을 성경대로 죄라고 믿고 있으며, 인간은 오판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믿고 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며,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잘못 선택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의지했다가 자아로 돌아갈 수 있다. 교회에 다닌다는 이들이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것은 본인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그들에게 영적인 것을 공급해주는 교회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강단에서 복음을 전하여 양무리의 구원 여부를 확인하고 바른 말씀으로 그들을 양육하였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양을 치는 목자들이 양의 상태를 파악하지 않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도록 그들을 가르치지 않은 것이다. 교회만 오면 교적부에 올린 후 해당 부서에 넣어 버려 교회에 꼼짝없이 붙들리게 하고, 성경에도 없는 세례를 주어서 세례교인이라며 자부하게 한 것이다. 그들은 원래부터 영적으로 죽어 있던 자들을 자신이 구원받은 줄로 착각하게 만들었고, 주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없는 건조한 종교 행위를 지속하던 그 교인들은 상한 영을 추스를 길 없어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사람이 자살했다는 말이 나도는 것은, 교회에 출석하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 윤리적인 인간이 되며, 극단적인 선택을 거부할 줄 아는 지혜를 갖게 되는 줄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온 세상보다 소중한 것이 인간의 혼이거늘, 그들 교회들은 타락하고 멸망할 세상을 섬기는 데 혼들을 동원하고는 정작 혼의 생명에 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자살에 관하여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이들 세 신학자들의 궁극적인 문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성경적인 지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 건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성령에 의하여 들어가게 되는 영적인 유기체로(고전 12:13), 그 몸은 우리가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몸이 아니라 한 번 들어가면 영원한 구성원으로서 그 몸의 지체를 이루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이며, 교회는 그분의 몸과 살과 뼈를 이루는 지체라고 성경은 정의한다(엡 5:25-32). 교회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다. 육신은 썩고 병들면 잘라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영원한 영적인 몸으로 썩지 않으며 아무도 그것을 해체할 수 없다. 『이것은 위대한 신비라.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그 교회에 관하여 말하노라』(엡 5:32).
올바른 신학의 부재는 그릇된 구원관을 낳는다. 세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논의에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성도의 자살은 부끄러운 일이나, 그렇다고 구원을 잃고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주님께는 붙어 있으나, 자신의 육신의 몸을 잘못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수치스럽게 한 그 죄에 대해서 반드시 (모든 그리스도인만이 서게 되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심판을 받게 되며(고후 5:10), ‘살인’이라는 ‘육신의 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모두 잃게 되는 것이다(갈 5:19-21).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