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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출발한 한국 교회의 신앙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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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8년 11월호>
잘못된 성경으로 출발하여 잘못된 성경을 고수해 온 한국 교회는 또한 실제로 성경적인 신앙의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했다(마 7:16-18). 이제 우리는 지난 120년간의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간단히 짚어가면서, 외관상으로는 번성해 왔으나 내면적으로 실패해 온 한국 기독교 신앙의 비극적인 실태를 조명해 볼 것이다.한국 기독교의 시작과 초기 교회의 실태
한국인 중에서 기독교 신자가 생겨나고 한국 땅에 교회가 시작된 시대는 1870-1880년대 조선 왕조 말기였다. 만주 땅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활동하던 로스(J. Ross, 1842-1872) 선교사와 매킨타이어(J. MacIntyre) 선교사는 이미 1870년대에 한국인들을 전도하기 시작했고, 한국인을 성경번역에 있어 조력자로 두었다. 로스 선교사가 본국에 다녀오려고 떠났던 1879년에는 4명이 정식으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로스 선교사는 이미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로마서의 한글성경 원고를 지녔다. 매킨타이어 선교사의 1880년 보고에 따르면, 그 무렵 한국인들을 위한 집회에 최소한 8명이 모이고 있었으며, 1년간 기독교 신앙을 교육받은 한국인들은 30명이 넘었다. 그 무렵 일본 땅에서도 1883년부터 한국인 기독교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미국 성서공회 소속 루미스(H. Loomis) 총무의 1883년 보고에 따르면, 이미 그때 일본 도쿄에 유학 온 청년들 중 12명 이상의 기독교인이 생겨났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국인 주일학교가 시작되었다.
1887년에는 서울 정동의 두 곳에 정식으로 교회가 세워졌다. 그 두 교회는 1885년에 함께 한국 땅에 들어온 장로교회 소속 언더우드(H.G. Underwood, 1859-1916) 선교사와 감리교회 소속 아펜젤러(H.G. Appenzeller, 1858-1902)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다. 그리고 그들의 서신과 일기 및 로스 선교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면, 서울에 교회가 세워진 데에는 만주와 일본에서 생겨난 기독교인들의 영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안한 사회 현실과 더불어 시작된 한국 땅의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순수하게 성경적 기독교가 되기 어려웠다. 장로교 소속 샤프(C.E. Sharp) 선교사는 1906년에 그의 논문에서 한국인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동기를 3가지로 정리했는데, 거기에 보면 첫 번째 동기가 불안한 시대에 서로 돕기 위한 단체를 만들어 힘을 갖는 것이며, 두 번째 동기가 과거의 문명으로 실패한 시대에 민족의 개화를 위해 서구 문화 및 문명을 배우는 것이었다. 세 번째 동기가 비로소 영적 갈망인데, 1906년의 그 논문에서는 "오늘에 이르러 기독교에 들어오는 제3의 동기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1870-1880년대 이래로 그 이전까지 있었던 한국 땅의 기독교가 성경적인 기독교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진 모습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증언이다.
한국 재래 종교에서 기독교로 유입된 관행들
한국 땅의 기독교가 순수한 성경적 기독교로 바로잡힐 것 같은 가능성을 보여 준 샤프 선교사의 진술, 곧 "제3의 동기"가 나타나고 있다고 밝힌 진술의 배경은, 1903년 감리교 소속 하디(R.A. Hardie) 선교사를 통해 일어난 원산 부흥 운동과 거기서 다른 지역으로 확산된 각종 부흥 운동들이었다. 그 부흥 운동들은 참석자들이 앞다투어 일어나서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구체적인 죄들을 자백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부흥 운동들은 점차로 한국인들이 기독교 전파 이전에 가졌던 종교적 관행들과 뒤섞이고, 구한말의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으면서 조금씩 한국 특유의 기독교를 만들어나갔다. 감리교의 존스(G.H. Jones) 선교사는 1910년에 한국인을 분석하면서 사회적으로는 유교인, 철학에서는 불교인, 곤경에 처했을 때는 샤머니즘 신앙인이라고 했으며, 언더우드 선교사는 1908년에 말하기를,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만나게 되는 적들 중 가장 끈질긴 것이 샤머니즘이라고 한 바 있다.
1906년부터 평양의 장로교회에서는 새벽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기독교가 전파되기 이전 동양의 각종 종교에는 새벽 동트기 전 3-5시에 신들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여기며 신령과 통하기 위해 기도하는 전통이 있었다. 불교의 "새벽 예불" 의식도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같은 관행이 기독교에 유입된 것이다. 일례로 평양 부흥 운동의 주역인 길선주 목사는 기독교인이 되기 전 선도를 수행하며 새벽과 정오와 밤에 기도하던 습관을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그대로 유지했고 새벽 기도 후에는 선도 수행으로서의 체조를 계속했던 사람인데, 바로 그가 발전시킨 새벽 기도회가 1907년 평양 부흥 운동을 계기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또 1910년대에는 이미 전도인들에게 쌀을 헌납하는 성미 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쌀을 종교적인 의미로 바치는 것은 이미 불교와 천도교 등의 종교들에서 시행하던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귀신에게 바칠 쌀을 넣던 "성주 단지" 곧 "신주 단지" 항아리 바깥에 십자가를 그린 후 그것을 하나님의 단지라는 뜻으로 "주 단지"라고 부르기도 했다.
새벽 기도회와 더불어 1907년 평양 부흥 운동의 특징인 통성기도는 기독교 사상 한국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일제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침략이 고조되면서 본격적으로 국권이 상실되던 시대에 한국인들 마음속에 서려 있는 한이 부흥 집회에서의 통성기도로 표출된 것이다.
민족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기독교
구한말 한국 땅의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무력 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을 폈고, 때로 그것은 무력적인 저항 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당시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국권을 잃은 국가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나라를 잃고 있는 상황에서 하늘의 시민권에 더 가치를 두고 사는 것은 실제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앙과 민족 중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결국 민족이었다. 예를 들어, 1908년 구세군 교단이 한국 땅에 들어왔을 때, 선교사의 말을 통역하며 포교를 하는 사람들이 민족 독립 쟁취의 수단으로 구세군을 선전하고 입교를 독려하는 일이 많았고, 이로써 초기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당시 구세군의 찬송가 가사 중에는 예수님께 "만만세"를, 황상에게 "천만세"를, 그리고 동포 형제에게 "억만세"를 돌리는 내용도 있었다. 나중에는 구세군이 본질적으로 정치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과 구세군 선교사들 사이에 갈등과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가장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민족 문제였던 것이다. 1910년 이후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한국 땅의 기독교는 많은 탄압을 받았고, 보다 더 정치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1919년 3ㆍ1 운동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천도교, 불교, 유교, 천주교 등의 타 종교인들과 무 종교인들이 함께 연합하여 벌인 독립운동이었다. 3ㆍ1 운동을 전후하여 한국 땅과 만주, 일본, 중국 등에서 선언된 독립선언서 중 14종의 선언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 3ㆍ1 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1900-1910년대에 부흥 운동을 주도한 목사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운동의 결과 일제의 무력 탄압이 더욱 거세어졌다.
비폭력 평화운동이 탄압으로 무참히 짓밟힌 뒤 한국 땅의 기독교는 크게 두 가지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하나는 부흥회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강하게 반영되는 부흥 운동들이었는데, 때로 "기적"과 "신유," 신비한 환상 체험을 동반하기도 했고, 다소 성경에서 벗어난 형태의 "말세"와 "재림" 신앙이 드러나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현실 참여적, 계몽주의적인 민족 운동들이었는데, 국가 독립의 능력을 기르기 위해 민족 사회를 계몽시켜야 한다는 취지로 이루어진 출판문화운동, 문맹퇴치운동, 절제운동, 농촌계몽운동, 야학운동, 주일학교진흥운동 등이었다.
1917년에 러시아가 공산화되고 1920년대에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한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한국 땅의 젊은이들에게 유입되면서부터는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국내에서 반기독교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주로 기독교가 현실에 저항하지 않는 측면을 부각시켜 독립정신을 말살시키고 일제에 협력한다는 식의 비난과, 기독교가 교인들을 미신으로 이끌어 문명의 발전을 막는다는 식의 비난을 퍼부었다. 이러한 사회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한국의 기독교는 결국 계속해서 사회 참여적이고 정치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박해 앞에 철저하게 무너져 내린 한국 기독교
그러나 성경적 신앙의 본질이 결여된 채 "현실 대처"를 표방한 기독교는 결국 비극적인 현실에 또다시 나름대로 "대처"하며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대륙침략을 뒷받침하는 사상의 통일을 위해 교육계에서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1938년경에는 한국의 교회들을 상대로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하게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의 강요에 맞서 강경한 입장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수많은 기독교계 학교들이 폐교되었으나, 계속되는 탄압으로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장로교 등 모든 교단들이 일제에 굴복하고 신사참배에 응했다. 교단의 신사참배 결정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지조를 지킨 사람들이 있었으나, 교단적 차원에서는 모두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했기 때문에 한국 교회의 변질은 급속히 진행되었다.
1940년경에는 신사참배에 굴복한 교단들이 결국 일제와 완전 결탁하거나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버렸다. 장로교는 교회의 헌법ㆍ교리ㆍ의식 등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여 "일본적 기독교"가 되도록 노력하고, 신사참배 등을 실천하도록 지도요강을 발표했다. 감리교는 일제가 표방한 "내선일체"를 실현하고, 일본적 복음을 천명하며, 교인들을 일제가 수행하는 전쟁 지원병으로 다수 참가하게 하기로 결의했다. 구세군도 "순일본적" 지도 이념 및 기구를 확립할 것을 선언했고, 성공회도 "일본 정신"에 의한 새 출발을 다짐했다. 이단인 안식교는 "자연인"으로 돌아가고 "황국신민"으로 일제에 순응하기로 맹세하며 해산했다. 성결교는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여호와 외에 신이 없다는 등 "불온 포교를 해온 죄"를 통감하며, 성경 자체로부터 이탈하여 "황국신민"의 자격을 실추시키지 않겠다는 성명서를 내고 해산했다.
현세 기복적 기독교, 샤머니즘적 기독교의 번성
1945년 한국 땅에 찾아온 국가 독립의 기쁨은 잠시, 북녘에서는 공산 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교회들이 줄곧 통제와 탄압의 대상이 되어 교세가 위축되고 있었다. 1950년에 벌어진 6ㆍ25전쟁 이후 북한 지역에 남은 목사의 수는 20명도 되지 않았다. 남한 지역의 수많은 교회들도 건물이 전쟁으로 파괴되고 소실되었으며, 목사들이 죽거나 납치당하고 교인들이 집단 학살당했다. 이처럼 전쟁으로 교회의 존립 자체가 위기를 맞는 상황들이 벌어졌으나, 또 한편으로 전쟁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각성시켰다. 전쟁으로 사람들은 더욱 신앙에 의지하는 경향이 생겼고, 피난민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고향에서와 같은 교회를 재건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 철수당했다가 1950년 미군 군목 신분으로 다시 한국 땅에 온 보켈(H. Voekel) 선교사 등은 포로수용소 선교를 활발히 전개하기도 했다. 1953년 <타임>지에 따르면, 휴전 직전에 군목들은 전쟁이 병사들에게 영적 부흥을 가져다 주고 있다고 보았다. 한국인에 의해 지어진 탁월한 찬송가들인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도 1950년대, 곧 전쟁 중과 전쟁 직후에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끔찍한 경험과 전쟁 후 계속되는 비극적인 생활은 한국 기독교 신앙에 여러 가지 장애 요인을 가져다 주었고, 한국 교회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무심한" 하나님에 대한 회의를 품은 사람들은 자유주의 신앙으로 깊이 빠져들었고, 신학교육은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것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외국 교회들의 대규모 원조로 교회는 일반인에게 "사회구호단체"로 인식되었고, 서구권의 선진국들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잘사는 것으로 생각되면서 결국 외국 교회들의 방대한 구제 물품이 아이러니하게도 물질과 안정, 쾌락, 재물을 중시하는 신앙 풍토를 가져오고 말았다. 또한 매일의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렵고, 의학의 혜택을 충분히 누릴 수 없는 사회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삶과 혼의 구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대신에 현세 기복적이거나 신비 체험적인 유혹에 끌려갔다. 결국 이후로 무속신앙(샤머니즘)적인 기독교가 한국 땅의 기독교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전쟁 이후로 이 땅에는 감정을 고조시키는 집회, 통성기도, 안찰, 방언, 예언, 입신, 신유 등의 은사집회를 하는 기도원들이 생겨나고 성행하게 되었다. 가정집에 제단을 쌓고 안수 기도로 병을 고친다는 사설 제단들도 급증했다. 다른 교파의 교회들은 이런 신비 체험적인 운동을 막았지만, 오순절파 교회는 이런 것들을 시행함으로써 교세확장을 크게 이루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신유를 통한 건강뿐 아니라 물질적 축복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사회적 욕구에 잘 맞아떨어졌다. 이런 교회들을 대변하는 교회가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교회였다. 여러 부흥회들을 통해서도 "꿈과 소망이 넘치는 설교,"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기복의 메시지가 전파되었다. 1970년대에는 국가 전체에 새마을운동이 한창 진행되면서 점차로 경제의 성장을 이루게 되었고, 1980년경 교회와 부흥회들은 성령운동과 적극적 사고방식을 통해 부를 추구하도록 부추겼다. 기존의 부흥회들은 이제 "축복 성회"로 바뀌었다.
기복의 강조가 교회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파악한 교역자들은 결국 그것을 계속 추구해나갔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말까지 행해진 교회 설교들을 분석한 한 연구에 따르면, 교회 성장을 위한 심리적, 기복적 설교가 전체 설교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한국 교회의 비정상적인 성장에 따라, 한국 땅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 세계 제일의 감리교회, 세계 제일의 성결교회,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 수를 가진 교회 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거대한 외형적 성장과는 반대로, 지금 한국 땅에서 기독교인들은 전혀 참다운 신앙인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 교회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할 교훈
앞에서 개괄적으로 살펴본 것처럼, 지난 120년 동안 한국 땅에서 횡행한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민족 운동을 위해 존립하는 기독교, 사회 참여를 표방하는 기독교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와 결탁한 기독교, 신앙을 포기한 기독교, 현세 기복적이고 샤머니즘적인 기독교였다. 전자는 일반적으로 교회가 나아가야 할 모습으로 제시되고 있는 기독교이며, 후자는 일반적으로 교회가 탈피해야 할 모습으로 제시되고 있는 기독교이지만, 그 모습들은 서로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며, 둘 다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는 기독교다. 성경은 둘 중 어떤 쪽도 지지하지 않는다. 성경의 문자적 가르침의 기준에서 벗어난 기독교는 어떤 상황에 처하느냐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될 수 있다. 그런 기독교에는 신앙의 실패가 보장되어 있다. 한국 교회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더 이상 실패할 길을 걷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성경의 가르침과 원칙에 충실한 교회가 되도록 결단해야 한다. 이와 같은 한국 교회의 현실은 바른 성경을 믿고 실행하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등장을 요청하는 것이다. BB
<참고 문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 기독교의 역사 II』, 1판 10쇄, 기독교문사, 2002.
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수정판 1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이덕주, 『초기 한국기독교사 연구』, 초판 2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2.
김흥수, 『한국전쟁과 기복신앙 확산 연구』, 초판 1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9.
영적대각성 100주년기념 학술연구회, 『각성ㆍ갱신ㆍ부흥』, 초판 1쇄, 감리교신학대학교 출판부,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