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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가 있어야 할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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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10월호>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해야 할 여러 가지 역할들이 있다. 구원받은 성도들 역시 다양한 역할을 부여받았다. 우선 "사람들을 낚는 어부"다(마 4:19). 어부가 항상 많은 고기를 잡고 싶어 하듯, 그리스도인은 혼들에 대해 강한 연민을 느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혼들을 이겨오려는 열망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농부"다(딤후 2:6). 농부의 간절한 소원은 좋은 열매들을 많이 맺는 것이다. 그래서 부지런히 밭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리스도인도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구령과(잠 11:30) 성령의 열매에(갈 5:22,23) 있어서 그러해야 한다. 또한 "장사하는 사람"이다(눅 19:13). 장사의 목적은 이윤을 남기는 데 있다. 거듭난 성도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와 지혜로 유익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 그 외에도 화해의 직분을 맡은 "그리스도의 대사"(고후 5:20),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딤후 2:15),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경주자"(히 12:1) 등의 역할이 있다.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군사"다(딤후 2:3,4).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고 마귀와 세상과 육신에 대항하여 싸우는 존재인 것이다. 치열한 전투로 피곤하고 힘들어도 쉬지 않고 공격하는 대적 마귀 앞에서 한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 이는 너희의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기 때문이니라』(벧전 5:8). 이처럼 성도의 삶은 영적 전쟁으로 점철된다. 그래서 성경에는 많은 전쟁들이 나오고 수많은 "믿음의 전사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들에 관해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정도다(히 11:32).
그러한 전사들 가운데 하나님께 무척 사랑받는 용사가 있었으니 바로 다윗이었다. 그는 전쟁에 익숙한 사람으로 평생을 필리스티아, 암몬, 모압, 아말렉 등과 싸우며 보냈다. 물론 그가 다른 비범한 영웅들처럼 "싸움에 타고난 사람"은 아니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 중 하나에게 기름 부으러 갔을 때도 아버지로부터 호출조차 받지 못한 별 볼일 없는 막내에 불과했다. 주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전사가 될 수 있도록 가르치셨다. 『그가 내 손을 가르치시어 전쟁에 임하게 하시니』(삼하 22:35). 이는 사자와 곰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시작되었는데, 다윗은 그들이 양 무리에서 새끼 양을 물어 가면 그대로 따라가서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냈고, 심지어 그들이 자기를 향해 일어나면 그 수염을 잡아 쳐서 죽이기까지 했다. 그의 용맹함과 담대함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서 비롯되었다. 다윗은 칼과 활을 의지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했다. 믿음을 통해 『연약함 중에 강하게 되기도 하고 전쟁에서 용맹스럽게 되기도 하며, 외적들을 패주시키기도』(히 11:34) 했던 다른 믿음의 선진들처럼 다윗도 믿음으로 행했던 것이다.
그 믿음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골리앗과의 대결에서였다. 하나님과 그분의 군대를 모독하는 골리앗을 대적하여 감히 싸울 용기를 낼 자가 이스라엘의 진영에서 아무도 없었을 때, 다윗은 홀로 의로운 분노를 느꼈고 골리앗을 죽일 수 있으리라는 확신도 가졌다(삼상 17:36). 모두가 골리앗을 보며 떨고 있었을 때, 다윗은 믿음의 눈을 떠서 그 원수를 향한 주님의 심판을 보았던 것이다. 외모가 아닌 마음을 보시는(삼상 16:7)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다윗의 마음속에 있었음을 일찍부터 보셨는데, 다윗은 "주님의 마음에 맞는 바로 그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삼상 13:14). 이에 다윗은 담대히 나아가 물매 한 방으로 그 거대한 골리앗을 죽였고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였다. 『너는 칼과 창과 방패를 가지고 내게 오지만, 나는 만군의 주의 이름, 즉 네가 모독한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그 이후로 다윗은 수많은 전장을 드나들며 큰 전쟁들을 치렀고 많은 피를 흘렸다(대상 22:8). 그러면서도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전쟁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을 끊임없이 구했다(삼하 5:19,23). 이처럼 다윗이 많은 전장을 누빌 만큼 "전쟁의 사람"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대상 28:3).
그런데 어느 날 다윗이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간음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한창 전쟁 중이던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강제로 소환시켜 휴가도 주고 음식도 줘서 아내에게 보내려 했다. 하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우리야를 죽이기로 결심했는데, 군대 대장 요압을 시켜 가장 치열한 전쟁터에 그를 배치시켰던 것이다. 결국 우리야는 그의 계획대로 죽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했던 다윗도 한순간의 정욕을 통제하지 못했을 때, 결국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다윗이 이런 죄를 범했을 당시 다른 전사들은 암몬 자손과 "전쟁 중"이었다는 사실이다(삼하 11:1). 말하자면 다윗은 전사가 있어야 할 장소인 전장에 없었던 것이다. 전장은 불편한 곳이다. 길이 울퉁불퉁해서 오래 걷다 보면 발도 아프고 몸도 지친다. 때로는 길바닥에서 자야 하기에 편한 잠을 청할 수도 없다. 더위와 추위로 고생하기도 한다. 땀에 젖고 더러운 냄새가 날 때도 있다. 자주 배고프고, 맛있는 식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로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전장은 죽음과 고통이 상존하는 곳이다. 다윗은 "왕"이었다. 자기들의 왕이 험난한 전장에 나가서 죽음에 직면하길 바라는 신하들이 있겠는가! 그래서였을까? 다윗은 그의 전사들이 한창 치열하게 전쟁하고 있을 때 "혼자서" 왕궁에 편안히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락함이 죄를 짓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생존을 위협하는 치열한 전장에서는 죄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러나 전장을 벗어나 평안이 찾아오면 전장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었던 다른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더 고급스러운 옷, 더 맛있는 음식, 더 편하고 넓은 집, 더 아름다운 여인, 더 자극적인 쾌락 등 바로 거기에서 죄가 시작되는 것이다. 전장을 떠나 평안함 가운데 있었던 다윗은 이미 여러 아내들이 있었음에도(삼하 12:8) 밧세바를 더 욕심냈고 결국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치지 못했다. 반면에 다윗에 의해 강제로 휴가를 나온 우리야는 그의 대장인 요압과 동료들이 전장에 나가 있는 상황에서 자기만 편안하게 지내는 것에 대해 단호히 거부했다(삼하 11:11). 평안과 안락함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편안한 쉼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우리의 긴장을 이완시키고 더 많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카나안 땅에 들어가서 배부르고 살찌게 되면 배교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이다(신 31:20).
전사는 전장을 지켜야 한다. 전장을 떠나 손에서 칼을 놓고 평안과 안정을 누리려고만 할 때 반드시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온다. 동료 군사들이 전장에 나가 복음을 전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을 때 혼자 편안히 앉아 있어서야 되겠는가? "전쟁의 사람"이었던 다윗의 문제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결국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해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삼하 12:10-12). 그러나 선지자 나단이 그 죄를 책망했을 때 다윗은 『내가 주를 거역하여 죄를 지었노라.』(삼하 12:13)고 하면서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시인했다. 『자기 죄들을 숨기는 자는 번성하지 못할 것이나, 죄들을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누구나 자비를 얻으리라』(잠 28:13). 상한 영과 참회하는 마음으로 철저한 회개의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시 51편).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이킨 후 다시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전사로서의 역할을 빈틈없이 수행했다. 전장을 지키며 주의 원수들을 향해 철저히 보복했던 것이다(삼하 12:26-31).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전사다. 최고로 명예로운 군인은 전장에서 싸우다가 영예롭게 죽는 군인이다. 옛날 군인들은 전시가 아닌 평시에 죽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전투화를 신은 채 죽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 역시 평생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죽어야 한다. 이것은 영적 전쟁을 치르다가 전사자가 되라거나 패잔병으로서 죽으라는 말이 아니고 "죽기까지 싸우라"는 의미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셋째 하늘로 부르실 때까지 싸우라는 뜻이다. 럭크만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군사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는 평생 동안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이라고 하셨다. 옛날 찬송시 중에 이런 시가 있었다. 『나는 십자가의 군사인가? 어린양을 따르고 있는가? 주님의 뜻을 따르기를 겁낼 것인가? 주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랴? 다른 이들은 상을 타기 위해 싸우고 피로 물든 바다를 항해하고 있도다. 내가 창공으로 올라가 꽃들로 만든 안락의 침상에서 나 혼자 누워 있으랴?』 지금 전장으로 나가 군기를 돛에 달고 전진하라! 담대한 군인으로서의 위상과 면모를 마지막 순간까지 잃어서는 안 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