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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조상에게 제사하고 절하라는 한신대 김경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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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7월호>

지난 죽은 조상에게 제사하고 절하라는 한신대 김경재 교수
5월 31일 기독교회관 2층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문화영성위원회가 “기독교 문화와 에큐메니칼 영성”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가졌는데, 거기에 참여한 김경재 박사(한신대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기독교가 한국민에게 완전한 토착된 종교로서 느껴지지 않고 서구종교로서 인지되는 것은 상․제례의식이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상을 진설하거나 절을 하는 모든 의례를 다 버렸기 때문에 먼저 타계한 가족식구와 이 땅에 아직 남아 있는 가족식구들과의 ‘영적 교감이나 감응의 시간’이 박탈당해 버린 것이다... ‘단순하고도 의미심장한 추모의 몸짓’에 관하여 전통적인 음식진설, 향 피우기, 절하기 등의 행위 의례를 폐기 금지시킨 대신 다른 대안을 마련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곤경에 처하는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제사문제로 순교자 1만 명을 배출한 한국 천주교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상․제례의 토착화에 성공한 후에 선교현장에서 상당한 전진을 이루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추모의 예로서 절하는 예식’을 우상 앞에 절하는 것과 동일하게 해석하는 율법적 금계(禁戒) 단죄(斷罪)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을 해방시켜 줄 필요가 있지 않은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우리 나라 사람들은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문화에 젖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도 그것을 용납해야 천주교처럼 선교실적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김경재 박사는 우리 나라 교계의 대표적인 자유주의자로서 그의 이전 논문을 보자면1) 그런 식의 주장을 한 것이 하루이틀 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하지만 “제사” 문제는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척을 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필연적으로 접하게 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성경적으로 조명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김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죽은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일을 옹호하는 근거로 “사도신경”을 내세웠다.
『이러한 구원론적 종교에서 제사의식이란 단순한 추도의 마음표시 이상의 차원, 곧 신령세계 또는 초월세계와의 영적 교류 및 영적 감응을 기대한다... 그리스도교의 사도적 신앙의 전통에서 사도신경에 고백되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신조의 고백은 살아 있는 신자들끼리의 코이노니아 교류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러한 ‘성도의 교통’에 대한 신앙적 고백과 신념이... 근대 이후 세계관 속에서, 특히 개신교의 신앙영역 안에서 급속히 약화되거나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한 미묘한 차이는 개신교의 추도예배(추도예식)를 근원적으로 제약하여, 추도예배는 글자 그대로 돌아가신 이를 추모, 추도, 회상하면서 살아있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잘하여 사후에 앞서간 성도들을 만날 것을 기대하는 ‘기념식’ 및 ‘윤리의식 강화시간’이 되어 버리고 만다. 개신교 추도예식의 결정적 약점은... ‘종교적 체험’을 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 상호 간의 친교만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 성령의 은총 안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서로 감응할 수 있다는 것이 신앙생활 가운데서 경험하는 오묘한 체험적 진리다.』2)
김박사가 사도신경에 대해 말한 것은 옳았다. 사도신경은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the communion of Saints)...을 믿사옵나이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것을 옹호하는 개신교인들이 이리저리 둘러대더라도 분명히 비성경적 카톨릭교 교리다.
“공회”는 본래 카톨릭의 “바티칸 공의회” 같은 종교회의를 뜻한다(council). 사도신경을 옹호하는 개신교인들은 “공회”가 “교회”란 뜻이라고 이야기한다.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사실 정말로 번역이 잘못되었다. 영문 사도신경을 보면 “거룩한 공회”도 아니고 “거룩한 교회”도 아니고, “the holy Catholic Church” 곧 “거룩한 카톨릭 교회”다. 사도신경을 옹호하는 개신교인들은 “카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에 따라서 이것은 “카톨릭교”(천주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를 말할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설픈 변명에 불과하다.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든, “지역 교회”든 간에 성경 어디에도 “교회를 믿으라”는 가르침은 없다. 그것은 정확히 “카톨릭교”에서만 하는 말이다. 그것은 카톨릭 “교회”가 성경과 무관하게 만들어낸 온갖 가르침도 다 진리로 믿는다는 고백이다.
또 사도신경을 옹호하는 개신교인들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어설픈 변명에 불과하다. “서로 교제”하는 것은 그냥 실행하는 것이지 믿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할 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요구되는 것이므로)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성도 곧 “죽은 성도”들과 교통할 수 있다는 교리를 믿는다는 고백이다. 카톨릭교의 “성인 숭배”와 같은 개념으로서, 성경에서는 그런 것을 믿으라는 가르침을 찾아볼 수 없다.
카톨릭교가 과거 중국과 한국에서 죽은 조상에게 제사하는 행위를 금했다가도 다시 그것을 쉽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은 조상에게 제사”하는 일이 “죽은 성인들을 숭배”하는 그들의 본래 교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개신교회들은 아무 생각 없이, 또는 사도신경의 실체를 고의로 부인하며 그것을 암송하고 있다. 사도신경을 고수하면서 죽은 조상에게 제사하는 행위를 반대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사도신경을 고수하는 것은 스스로 비성경적인 실행을 막지 못하도록 무력하게 만드는 일이다.
김박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 정확한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죽은 조상에게 제사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그것을 사용했다. 그는 “진보적 개신교회의 추도식”이라면서 기독교장로회 소속 경동교회가 교회설립 50주년을 기념하며 출간한 “추도식 예식서”를 이상적인 것이라고 제시했다. 거기에 보면 “추모제 순서” 중에 이런 항목이 있다.
『2)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함... (3) 향을 피우고 두 번 절함 (이 순서는 가정에 따라서 생략할 수 있음)... 2) 장자나 가족 대표가 고인의 사진 앞에 나와 꿇어 앉아 향을 피워 올리고 두 번 절함. 3) 남은 가족들도 참여하는 심정으로 주목하여 바라보고... 온 가족이 함께 두 번 절할 수 있다... (9) 성령 안에서 고인과 영적교통...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성도의 교통”을 믿으며 성령 안에서 고인과의 영적 대화를 마음으로 갖는 침묵기원의 시간이다. 약 1분 동안 묵상 시간을 가진다...』3)
김박사는 앞서 인용한 부분에서도 추도 예식 때 “죽은 자들과의 영적 교류” 곧 “종교적 체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성경에서 엄히 금하며 단죄하고 있는 사항이다. 『그때에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부리는 영들을 지닌 자들과, 엿보고 중얼거리는 마법사들에게 구하라.” 하리라. 백성이 자기들의 하나님께 구해야 되지 않겠느냐? 산 자들을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 구하겠느냐?』(사 8:19). 사울왕은 부리는 영을 지닌 여자를 찾아가서 부리는 영으로 예언해 달라고, 또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요청했다(삼상 28:7,8,11). 사울왕이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끝내셨다(대상 10:13,14).
실제로 “죽은 자들에게 제사”하는 행위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일이며, 마귀의 영들이 배후에서 활동하는 일이다. 『그들이 또 바알프올에게 연합하여 죽은 자들에게 바친 희생제물들을 먹음으로 그들의 행위로 그를 격노케 하니 재앙이 그들 가운데 퍼졌도다』(시 106:28,2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은 마귀들에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아니하노라』(고전 10:20).
사람의 영과 혼은 그 몸이 죽는 순간,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된다. 몸이 죽는 순간 사람의 영은 하나님께로 회수되며(전 12:7), 그야말로 “자기 자신”에 해당하는 혼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전 12:5) 곧 낙원이나 지옥으로 가 버린다(눅 16:22-23, 고후 5:1,8 - 신구약 시대의 낙원의 위치 차이는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후손들이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조상은 실제로 그 자리에 올 수도 없고, 전혀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 그러므로 “제사”는 결코 “효도”가 아니다. 그 자리에 관여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존재는 마귀의 영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김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죽은 조상에게 제사하는 일을 옹호하면서, 그것을 흔히 말하듯 “우상 숭배”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 개신교에 있어서, 전통적 제사행위를 금지시키는 신학적 이유는 주로 십계명의 문자적 해석에 기초하여 “우상 앞에 절하지 말라”는 십계명 제2계명을 그 중심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 ‘우상’이란 상대적이고 유한한 것을 절대화하고 신격화하여 그 대상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행위를 말한다. “절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은 몸을 굽혀 예를 표하는 인간의 외면적 행위를 말한다기보다는 자기 존재를 그 신적 대상 앞에 굴복시키고 신적 대상에 완전히 자기를 복속시키는 행위를 금지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전통 한국인의 제사에서나 성묘시나, 제상 앞에서 “절하는 행동”은 성경이 금지하는 “우상 앞에 절하지 말라”는 우상 숭배 금지계명과는 본질적으로 상관이 없는 것이다. 상례를 당한 가정에서 문상을 가거나, 제사행위에서 절이란 동양인의 “말없는 전인적 몸짓”이며, 그러한 몸짓을 통하여 말로서 표현하기 어려운 인간의 심원하고 총체적인 감정과 예를 단일행동에 담아 표현하는 몸의 언어이며, 상징행위인 것이다.』4)
어떤 단어를 정의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김박사가 말한 “우상”의 정의는 의도적으로 어설프다. “우상”이라고 항상 “절대화”되지는 않는다. 특히 수많은 신들을 함께 섬기는 다신교적 성향이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우상들은 제각기 어떤 의미를 지니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다. 죽은 조상에게 제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조상은 우상과 같은 존재다. 조상은 “절대화”되지는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신격화”된다. 후손들을 보살피고 인간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죽은 조상이 무엇을 할 수도 없고 실제로 오지도 않지만, 자기는 그냥 절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절할 대상이 있든 없든, 앞에 놓인 것이 절할 대상이든 아니든 그냥 절한다는 것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이처럼 말도 안되는 행동을 “그냥” “관습적으로”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 역시 우상 숭배이며 그 일들에도 마귀의 영들이 관여한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지체되자 신들을 만들자고 합의한 후, 자기들의 금귀고리를 모아 녹여서 스스로 송아지 모양을 만든 다음에(누가 이런 식으로 만든 송아지를 진정으로 두려워했겠는가?) 그것에다가 제사를 지내고 먹고 마셨다(출 32:1-6). 『그들은 하나님께 희생제를 드리지 않고 마귀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했던 신들에게 했으며 너희 조상들도 두려워하지 않던 새로 생긴 새 신들에게 했느니라』(신 32:17). “새로 생긴 새 신들” 곧 이성적으로 가짜인 신들이지만 거기에 대고 그냥 제사를 지내는 일도 본질적으로는 “마귀들”이 배후에서 관여하는 것이다.
김박사는 “절한다”는 단어가 성경에서 쓰일 때는 자기를 “완전히 복속”하는 것을 뜻하고, 한국에서 쓰일 때는 “몸을 굽혀 예를 표하는 행위”를 뜻한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는, 그것을 근거로 성경의 금지명령과 한국의 제사 문제는 서로 아무 상관이 없다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성경에서 “절한다”는 단어 역시 “완전한 복속”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경의 배경인 이스라엘 역시 동양이고, 한국처럼 “몸을 굽혀 예를 표하는” 문화권이다. 절하는 사람이 자기를 “완전히 복속”하는 마음으로 할 수도 있고, 그냥 “예를 표하는 행위”로 할 수도 있지만, 절하는 것은 말 그대로 절하는 것이다. 아비가일은 “완전히 복속”하는 마음으로 다윗에게 절했고(삼상 25:41), 솔로몬왕은 단지 “예를 표하는 행위”로 밧세바에게 절했다(왕상 2:19). 그리고 이 경우들과 십계명에서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고 한 경우에(출 20:5) 모두 동일한 단어가 쓰였다(샤하,). 죽은 조상에게 제사하면서 절하는 것은 우상에게 제사하며 절하는 것과 동일한 개념인 것이다. 조상 숭배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고안하여 숭배하는 행위다.
성경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들과 우상들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제사에 사용되었던 음식물은 그냥 음식물일 뿐, 그 자체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고 알려 주고 있다(고전 8:4,7,8; 10:19). 그러나 성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 하시며(고전 10:14), 그 제사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지 말라고 하신다. 배후에서 마귀들이 제사를 받음으로써 그것이 마귀들과 교제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고전 10:20,21). 절하는 것은 물론이고,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도 그런 의미를 지닌 행동이다. 우리 나라에서 “죽은 조상에게 제사”할 때 남자들만 절하고 여자들은 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지만, 제사 음식은 여자들도 함께 나눠 먹는다. 여기에는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제사 자리에서” 제물을 함께 먹는 것은 “참여”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고전 10:18), 그리스도인은 “제사 자리에 조상이 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제사 음식을 나눠 먹는 것보다는, 제사에 “마귀들”이 관여함을 생각하고 제사 음식을 나눠 먹는 행위 자체도 거부하며 성별하는 것이 합당하다. 『곧 우상들에게 바친 제물...을 삼가라는 것이라. 이와 같은 것들로부터 너희가 스스로 조심하면 잘되리라』(행 15:29).
상․제례와 관련해서 사실상 관습화되어 때때로 기독교인들도 무심코 그렇게 하지만, 그 의미를 따져 보았을 때 문제가 있는 부분들이 몇 가지 더 있다.
∙ 고인 또는 조상에게 음식을 올리거나 절을 하더라도 그들이 받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빈소에서 꽃을 올리고 묘소에 꽃다발을 놓는다고 해서 그들이 그 향기를 흠향할 수는 없다. 이런 행동들은 사실상 다소 미신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
∙ 향을 피우는 것이 비록 냄새 제거에 좋을 수는 있지만, 향은 기본적으로 “신”을 불러 내리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었던 것이다(왕상 11:8; 12:33 등).
∙ 빈소나 묘소에서 기도하는 것은 고인 또는 조상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그들이 와서 기도를 받을 수도 없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소용없는 행동이다. 낙원과 지옥이라는 “영원한 집”은 죽으면서 이미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유가족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빈소나 묘소에서 기도하거나 묵념하는 것 자체는 절하는 행동과 마찬가지로 본래 다소 미신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것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그리고 본래 잘못된 배경을 지니고 있는 일들도 될 수 있는 대로 멀리해야 한다. BB
주석)---------------
1)김경재 : <그리스도교 제례 의식의 한국문화 토착화 과제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Korean Inculturation of the Ancestormemorial Services for the Korean Protestant Churches>, 한신대학교 학술연구논문, 1997.7.30.
2)Ibid., 3-1. 인간의 죽음 이해와 인간의 자기 초월적 반응 中.
3)경동교회 가정의례연구회, <기독교인의 가정의례 지침> 제2부 상제례의 의식, 제4장 추모제(추도식, 기제사)의 예식 순서.
4) 김경재, op. cit., 3-2. 종교의식에 있어서 상징과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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