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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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 없는 선한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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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6월호>

성경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하신다. 혹자는 생각할 때 선한 싸움 또는 영적 전쟁이라는 단어를 즐겨 쓰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호전적이라고 오해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자체가 싸움이다.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자마자 자신이 알든지 모르든지 이미 하나님의 진영과 마귀의 진영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영적 전투 현장에 던져진 것이다. 그래서 승리의 그날까지 끝까지 싸워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마귀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하고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혼들을 이겨오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가끔씩 캠페인을 통해서 사람들의 정신무장을 고취시키고자 한다. 일정 기간에만 강조하곤 하는 캠페인을 우리는 수없이 경험해 왔다. 그래서인지 교회 안에서도 그러한 사고방식이 들어와 일시적으로 행해지는 많은 캠페인의 구호들이 부흥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교회건물 앞에 현수막으로 내걸린다.
그러나 영적인 전선에는 일시적인 캠페인이란 있을 수 없다. 그야말로 지속적으로 싸워 나가야만 한다. 이러한 싸움이 지겹다고 해서 뒤로 물러서면 그는 그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다.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에 출석하는 신실한 성도들은 한결같이 주님의 오실 날을 고대하면서 그날이 오기까지 중단 없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다. 한번 열심히 해보다가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구령하고 거리에서 설교하고 열매들을 맺는다.
그런데 여기에 순간적으로 고무되어 몰래 들어온 어떤 사람들이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고 자처하고 거리설교와 개인구령의 대열에 일정 기간 참여하다가 힘이 들거나 싫증나면 그만둘 구실을 찾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 일들을 그만둘 구실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실은 곧바로 영적 전쟁으로 이어져 자신만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지체들을 미혹해서 같이 넘어지기 일쑤이다. 그들은 지난날 자신들이 몸담았던 곳에서 행해지던 일들이 비성경적인 실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향수를 느끼며 그때와 비교한다. 그리고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너무 강하고 여유가 없어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는 모임이라고 비방을 하며 좀 느슨하고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곳을 찾아 돌파구를 찾는다.
더구나 호시탐탐 노리는 마귀로 인해 늘 영적 전쟁이 있는 성경적인 교회이기에 더욱더 깨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영적 전쟁이 많음으로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마귀의 공격이 누구에게 가해지는지도 모르는 초보적인 그리스도인의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대적 원수 마귀가 엉터리 교회를 공격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마귀는 다니엘보다도 더 영리한데 그런 교회를 왜 건드리겠는가? 그들이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하는 사역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을 품고 불만을 갖게 되자마자 원수 마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낚아채 가 버린다. 견고하지 못한 그들이 마귀의 실체를 미처 깨닫기도 전에 마귀가 그의 마음을 부채질해서 넘어지게 하고 만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정직해야 된다. 정직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다. 결코 과장되게 행하지 않으며 분수에 넘치도록 행동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주님을 섬긴다. 그러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고 자만과 교만으로 포장된 상태로 교회에서 얼마 정도는 견디지만 곧 그의 정체는 드러나고 만다.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자신이 알 텐데 그것을 고의로 부풀려 허세를 부리다가, 자신의 배를 잔뜩 부풀리다가 배가 터져 버린 개구리처럼 어리석은 결말을 맞게 된다.
예루살렘 교회에 주님의 영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들 중에 바나바는 그가 판 재산의 대금 전체를 가져다 교회에 바쳤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이러한 일들을 시기하고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게 마련이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피라와 같은 사람들이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인 체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아나니아와 삽피라처럼 남들이 하니까 자신들도 그들의 대열에 이름을 올리고 싶어 엉뚱하게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속이는 일을 하게 되고 그 거짓은 일시에 들통이 나게 되며 결국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필자는 그런 사람을 주위에서 많이 보았다. 십자가를 진 자들이라는 명성을 아무나 얻는 것이 아니거늘 흉내를 내다가 힘들면 이핑계 저핑계를 대다가 스스로 넘어지는 모습은 불쌍한 패잔병의 모습 그대로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라는 곳에서 행해지는 비성경적인 행사나 자신들이 정해 놓은 규례들을 지키는 모임과 비성경적인 성도의 교제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카인처럼 요란스럽게 겉치레로 준비한 제단처럼 시끌벅적한 절기에 따른 형식적인 행사는 주님의 마음을 오히려 무겁게 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부심이나 자랑 같은 것에는 그분의 얼굴을 돌리시고 거들떠보시지도 않는다.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 안에서 교회적으로 특별한 행사가 많지 않고 교제가 무미건조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성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교회를 원한다면 하나님과 관계없이 거창하게 예배 형식을 갖추고 각종 행사로 흥청망청하는 붉은빛 십자가가 붙어 있는 큰 건물들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목사를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잘났다고 나서는 모임에 가서 한몫하면 된다.
한편 매주 구령한 사람들의 숫자를 언급하는 것을 가지고 숫자놀음이라고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더러 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열매를 기대하고 수고하며 땀을 흘린다. 그리고 추수를 하게 되면 당연히 수확량을 계산하고, 그 수확의 양에 따라서 희비가 엇갈리기도 한다. 구령의 열매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소중한 열매이다. 그 소중한 열매들을 계산하는 것이 즐거운 일일진대 그것마저도 트집잡는다면 단단히 영적인 중병에 걸린 사람이다. 사도행전에 베드로가 구령한 숫자가 언급된다. 한 번의 설교에 삼천 명이 구원받고 침례에 응했고, 다음 번 설교에서 믿은 남자가 오천 명이나 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행 4:4).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쓸데없이 성경 곳곳에 누가 구원을 받고 몇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숫자는 참으로 중요하며 다양한 의미가 있다.
구원받은 혼들의 숫자는 얼마나 소중한가! 그래서 우리가 서로 그 열매들을 간증하고 나눌 때 진정으로 “아멘”이 되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도전이 된다.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에서는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받은 죄인들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범위 안에서 규례를 지키고 영과 진리로 경배드리며 주님께서 교회에게 위탁하신 사역을 신실하게 행하고 진리 안에서 사랑으로 절제된 가운데 성도의 교제를 나눈다. 이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싸워나가는 지극히 절제된 선한 싸움의 방법이다. 이 싸움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지속되어야만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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