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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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믿음의 관계 - 균형 있는 성장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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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3월호>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갖기 원하고 믿음으로 살기 원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믿음이 있어야 기도에 응답을 받을 수 있고(약 1:6,7),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히 11:6), 믿음으로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며(롬 14:23),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1:17, 갈 3:11, 히 10:38).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믿음을 갖기 원한다.
그런데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놓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민도 하고 기도하기도 한다. D.L. 무디도 한때 이런 믿음을 얻기 위해 기도했던 일을 간증한다. “오래전, 나는 믿음을 얻기 위해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언젠가 믿음이 내려와서 마치 번개가 내리치듯 내 영혼을 강타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서 10장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니라.』(롬 10:17)는 말씀을 읽었다. 이 말씀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믿음의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나는 성경을 덮고 잠시 기도하였다. 그리고 다시 성경을 펴서 말씀들을 묵상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의 믿음은 계속해서 자라났다.”
D.L. 무디의 간증처럼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성경적 원칙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믿음과 연관해서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갖게 되는 믿음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믿음이냐 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 중에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읽는다. 그러면서도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나에게 믿음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동안 많이 들어 왔고, 읽어온 나에게 믿음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며 고민하기도 하지만 이 질문에 시원스런 답을 얻지 못해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성경도 이 같은 질문을 믿는 성도들을 향해 던지고 있다. 『네게 믿음이 있느냐? 그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롬 14:22).『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입증하라...』(고후 13:5).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질문을 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합당한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믿음에 대한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지식과 믿음과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준다(롬 10:17).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만을 위해 있는 말씀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주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식을 주기도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다 믿음을 위한 말씀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즉 믿음의 말씀과 교리(지식)의 말씀이다.『네가 이런 것들을 형제들에게 기억하게 한다면 너는 네가 따르던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이 되리라』(딤전 4:6).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두 종류의 말씀으로 나뉘어 있다. 성도는 이 두 종류의 말씀을 공급받음으로 양육되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성도가 믿음의 말씀이 좋다고 해서 교리의 말씀을 멀리하거나, 반대로 교리의 말씀이 좋다고 해서 믿음의 말씀을 멀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교리의 말씀과 믿음의 말씀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냐고 말이다. 쉽게 이해를 돕기 위해 이를 신앙생활에 적용하자면 성도는 기본적으로 성경공부와 설교를 통해 양육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지역 교회를 세우셨고 그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세우셨다.『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이 말씀에서 “목사와 교사”는 한 사람임을 보여 준다. 목사는 믿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교리의 말씀을 전함으로 성도들을 양육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디모데전서 4:6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목사”인 디모데에게 전했던 말씀이다. 때문에 목사는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 일(설교하는 일과 성경을 가르치는 일), 즉 목사와 교사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공부 시간을 통해 교리의 말씀을 전하고, 설교를 통해서는 믿음의 말씀을 전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성경공부 시간에 교리의 말씀을 공부한다고 교리의 말씀에 믿음의 말씀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설교를 통해 믿음의 말씀을 전한다고 설교에 교리적인 말씀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함께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나뉘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과 교리로 나누고, 목사와 교사로 나누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목사와 교사가 있어야 하고, 그에 의해 믿음의 말씀과 교리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한다. 여기서 교리를 다르게 표현하면 “지식”(딤전 2:4, 딤후 2:15, 벧후 3:18, 고전 8:1, 고후 11:6)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식(교리)을 위해서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경우에 따라 어떤 성도에게는 지식은 있어도 믿음은 없을 수 있고, 믿음은 있는데 지식은 없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지식과 믿음이 따로 있는 것인가? 지식이 있으면 믿음도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있어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지식이 있다고 해서 다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지식과 믿음과의 관계이다.

먼저 믿음이 무엇인지 보자.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두 가지란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먼저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필요한 믿음이다.『행함이 없어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롬 4:5).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8,9). 이처럼 구원받기 위해서는 행함이 없는 “오직 믿음”만이 필요하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 성도에게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행함”이 곧 “믿음”이라는 것이다.
야고보서에서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영과 몸의 관계로 설명하면서 믿음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니라』(약 2:26). 영이 없는 몸은 죽었다는 말씀이 진리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 역시 진리이다. 실제로 죽은 사람의 몸은 어떠한가? 그 몸은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다. 그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씀이 야고보서에서 나온 말씀이라고 환란성도에게만 적용된다고 말하면 안 된다.
바울 서신에서도 믿음은 곧 “행위”로 대표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 1:3). 사랑이 수고로 대표되고, 소망이 인내로 대표되듯이, 믿음은 “행위”로 대표된다. 고린도후서 5:7도 보라.『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이처럼 성경은 믿음을 행함으로 말하며 또한 살아 움직이는 역사라고도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같은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시는 분이시다. 『이러므로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는 것도 우리 하나님께서 너희를 그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여기시고, 그의 온갖 기뻐하시는 선하신 뜻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시사』(살후 1:11).『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쓸모없고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그러므로 믿음에 어떤 움직임(행위)의 역사가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위인들의 기록을 보면 “믿음으로”라는 말 뒤에 그들이 무엇인가를 했다는 행위가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믿음으로” 바쳤든지, 걸었든지, 예비했든지, 떠났든지, 머물렀든지, 경배했든지, 버렸든지, 거절했든지, 영접했든지 했다. 즉 하나같이 “믿음으로”라는 말 뒤에 어떤 일들을 했다는 증거가 있다. 믿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기록은 없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이다. “행함이 있는, 역사하는, 살아 있는” 믿음, 이것이 믿음이라고 성경은 계시한다. 그러나 이처럼 믿음에 어떤 움직임이나 행함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며 실상 믿음이 아닌 것이다. 이제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내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고 고백은 하면서도 전혀 행위가 따르지 않는 ‘성도들’이 주위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나니, 가증한 자요, 불순종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에 버림받은 자들이라』(딛 1:16). 이처럼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해도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아는 게 아니고, 믿는다고 하지만 믿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 따르면 마귀들도 하나님을 믿고 떨기까지 한다(약 2:19). 그러나 마귀들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이 아닌데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에는 합당한 역사, 회개하는 행동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알며 또한 믿는다고 고백하는 성도에게 행위가 따르지 않는 것인가? 성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일 텐데 말이다. 이제 그 원인을 알아보자. 그것은 믿음의 말씀에 자기 믿음을 결합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복음을 전해들은 것은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나, 전파된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 것은, 그것을 들은 자들이 믿음을 결합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히 4:2). 성경에 의하면 복음은 “믿음의 말씀”이다.『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노라.”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그런데 이 같은 믿음의 말씀이 유익을 주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는 “음식” 때문이라고 지적한다.『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들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건하게 하는 것이 좋고 음식으로 할 것이 아니니, 음식을 따라 처신한 자들은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3:9). 여기에서 말씀을 음식으로, 음식을 ‘교리’와 연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교리가 은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음식,’ 달리 말해 “교리”(지식)를 따라 처신하게 되면 믿음이 결합되는 역사를 가로막아 행함에 악영향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실제 이런 일이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 바울은 이렇게 단언했다.『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고전 8:1).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지식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부요하게!(고전 1:5) 물론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경은 성도가 구원을 받았으면 진리의 지식에 이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딤전 2:4).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지식이 있었음에도 그들에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없었기에 교회에 아무 유익을 끼칠 수 없었던 것이다. 믿음이 없이 지식만 있게 되면 유익은 고사하고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지식이 믿음과 결합되지 못함으로 자신의 지식으로 다른 성도들을 망치는 일을 했다.『그러면 네 지식으로 인하여 그 약한 형제를 망치게 되리니...』(고전 8:11). 또한 믿음이 없이 지식만 있는 성도는 상대적으로 지식이 없는 형제들을 무시하고 무례히 행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나아가 형제뿐만이 아니라, 목사에게도 그처럼 대한다. 지식으로 교만하게 된 성도는 목사도 무시하고 그에게 무례히 행한다. 아닌 게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목자라 할 수 있는 바울조차 무시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지도력을 무시했고(고후 10:10; 11:6), 그의 사도됨을 의심했으며(고후 11:5, 고전 9:1-3), 그의 영적 권위를 무시했다(고후 10:8).
이들처럼 오늘날도 믿음 없이 지식으로 교만하게 된 성도들의 특징은 자신의 목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드러나는 특징은 설교(믿음의 말씀)를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들어도 자세가 바르지 않거나 비판하는 영에 사로잡혀 듣거나, 다 아는 내용이라 생각하며 자신과는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흘려듣는다. 그러다가 들을 게 없다는 말을 한다. 사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듣고자 했던 것이다. 마치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교리가 어떤 것인지 알려 주겠느뇨?』(행 17:19)라고 말했던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설교는 듣고 행하라고 전해 주는 믿음의 말씀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같은 목자 없는 양의 모습은 믿음이 파선했고 지식(교리)만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의 말씀을 떠난 것이요, 믿음에서 떠난 것이며, 그래서 믿음이 파선한 것이다. 성경에는 믿음이 파선한 자들이 나온다. “믿음에서 떠나... 믿음에서 떠나...”라고 말한 사람들은 모두 믿음의 파선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어떤 교리”를 추구하다가 그렇게 된 것을 본다.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나니,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리라』(딤전 4:1).『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들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건하게 하는 것이 좋고 음식으로 할 것이 아니니, 음식을 따라 처신한 자들은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3:9).
오늘날 교회들에서도 이처럼 지식(교리)을 추구하다 교만하게 된 성도들이 다른 이상한 교리들에 이끌려 믿음에서 떠나는 일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행함이 없다는 것이다. 지식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지식은 있다. 그러나 지식이 있는지는 몰라도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 없음으로 “떠난 것”이다.

이제 지식과 믿음과의 관계에 대해 결론을 내리면 지식이 있다면 믿음(행함)도 있어야 하는데 지식이 있다고 다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너희 가운데 현명하고 지식을 갖춘 자가 누구냐? 그는 선한 행실을 통하여 지혜의 온유함으로 자신의 행함을 나타내 보일지니라』(약 3:13). 지식과 믿음(행함)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기억하라.『네가 이런 것들을 형제들에게 기억하게 한다면 너는 네가 따르던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되리라』(딤전 4:6). 『오직 은혜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벧후 3:18).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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