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기자의 논단 분류

천안대학교 부총장 최갑종 교수의 논문 바로 보기 - “성경은 여성 안수를 지지하지 않는다!!”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7월호>

천안대학교 부총장 최갑종 교수의 논문 바로 보기
- “성경은 여성 안수를 지지하지 않는다!!”

여성 안수 문제는 아직도 교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신약성경이 완성되었을 당시 이미 정리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계에서는 여전히 미결된 상태로 남아 있는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성경을 믿지 않는 학자들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시대적 조류에 편승하여, 성경적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지 않고 세상적 기준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여기서 시대적 조류는 인종과 신분과 성 차별이 없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 없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지상천국’을 건설하려는 이 ‘왕국건설자들’(Kingdom Builders)은,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것이 마치 성 차별을 지지하기라도 하는 것인 양 이 문제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강한 집착을 보여 왔다. (엄밀히 말해서, 여성 안수 반대는 성 차별이라든지 남녀 불평등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데도 말이다.)
성경은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준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구미를 맞추고자 성경을 세상적 기준으로 맞추어 해석하려는 신학자들의 노력으로 수많은 교인들은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적 기준과 “완전히” 반대되는 설교는 결코 호응을 얻지 못한다. 세상이 여권 신장과 남녀 차별 철폐를 원한다면, 성경도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것처럼 해석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최근 신학대학원생 12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80% 이상이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추세에 편승하고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과연, 성경은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것인가? 지난 5월 27일에는 ‘여성의 성직 안수, 목사 안수가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 날 논문 발표를 맡은 최갑종 교수(천안대학교 부총장)는 ‘여성목사 안수반대’의 허구성을 내세우며, 반대 주장의 근거가 되는 구절들을 주석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이에 대해 ‘성경 본문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 성숙한 신학적 해석’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으나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미숙한 해석’으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의 주장은,『그럴듯한 언변』이나(출 16:18)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주기(딤후 4:3) 위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여자들”은 교회에서 조용히 하게 하라(고전 14:34,35) 1)

첫번째 논의의 핵심은, 『너희의 여자들을 교회 안에서 조용히 하게 하라.』는 내용에서 『여자들』의 적용 범위와 관련이 있다. 최교수는 본문의 여자들이 교회 내 ‘여성도 전체’가 아닌, 교회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질서를 무너뜨리는 ‘기혼 여성 몇몇’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면서,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근거 구절로는 부적합하다고 주장했다. 부언하자면, 당시 헬라-로마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자들에게 예속된 채 공공장소에서 말과 행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았던 여성들에게 복음을 통한 자유와 남녀의 동등권이 주어지자 이를 남용한 일부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남자들을 주관하고 가르치는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에 사도 바울이 이를 경계하고 예방하는 차원에서 그 문제들을 일으켰던 고린도 교회 ‘몇몇 기혼 여성도들’에게 이러한 특수 명령을 주었을 뿐이고, 여성 안수를 반대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다. 사실, 그가 언급한 시대적 상황에 따른 문제들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문제의 핵심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여성 안수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마련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문맥을 보면 『여자들』은 ‘몇몇의 문제 여성들’에게만 국한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본문은 『온 교회』가 한자리에 모였을 때(고전 14:23)의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33절에서도 『성도들의 모든 교회』라고 언급함으로써 본문의 구절이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보편적인 상황’임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여자들』이란, 교회 내 ‘여성도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최교수는 35절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거든 『자기 남편들』에게 물으라는 내용을 들어, ‘여자들은 곧 기혼 여성들’이라는 논리로 독자들의 눈길을 환기시키려 한다. 이는 ‘문제를 일으키는’ 기혼 여성들로 확대되고, 더 나아가 여성 안수의 정당성이라는 논리적 비약을 가져온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기혼 여성들’을 강조하시고자 했다면 왜 굳이 “아내”(wife, 고전 7:1-40)라는 단어 대신에 “여자들”(women, 고전 14:34,35)이라는 단어를 채택하셨던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본문의 『여자들』은 “아내”를 포함한 모든 여자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너희의 여자들을 교회 안에서 조용히 하게 하라.』

여자들은 교회에서 “조용히 하게 하라.”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한 구절만 따로 떼어서 교리를 정립하지 않는다. 앞뒤 문맥을 파악하고 서로 뒷받침해 주는 구절들을 살핀다. 이러한 기본적인 원칙을 무시하면,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아예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물론, 본문은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말 한마디도 하지 말 것을 말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서 결혼한 여성도들이 공예배시에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여자로서 할 수 없는 방언과 예언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서 공예배의 질서는 물론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는 가정의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최교수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즉, 최교수는 본문의 『조용히 하게 하라.』는 내용이 방언이나 예언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공적인 모임에서 여자들이 방언과 예언(성경이 완성된 오늘날은 설교에 해당함)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이는 『방언으로 말하려면... 또 예언하는 사람은... 말하고... 너희는 모두 한 사람씩 예언할 수 있나니』(고전 14:27-31)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군가에게는 방언과 예언을 허용”하시고 곧이어,『너희의 여자들을... 조용히 하게 하라. 그들이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아니하였으니』(고전 14:34)라고 명령하시면서 “누군가에게는 동일한 사항을 금하시는 것”을 볼 때 더욱더 분명해진다.
물론, 최교수도 ‘전후 문맥을 고려하는 가운데 방언과 예언을 할 때는 교회 예배의 질서를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했었다. 그러나 그 질서와 관련된 핵심 내용 중 하나인 ‘여자들에게 조용히 하게 하라.’는 항목에 와서는 갑자기 논의의 핵심을 벗어나 단순히 예배나 가정 질서를 어지럽힌 여성들의 문제로만 범위를 축소해 버리고 있다. 즉,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규범 하에서는 교회 여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남편을 제쳐두고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하는 모습은 일종의 성적 유혹으로 간주될 만큼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일 수 있기 때문에,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여성도들이 교회 안에서는 “잠잠해야 하고”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는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배교한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전형적인 성경 해석방법이다. ‘여성인권 옹호론자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핵심을 피해가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공적인 예배에서 ‘방언과 예언’을 함으로써 질서를 어지럽히는 교회 내 전체 여성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것이지, ‘성적 유혹’으로 오인받는 정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몇몇 여성도들만을 대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말하는 것』, 즉 방언과 예언을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수치라고 말씀한다(고전 14:35). 교회 내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방언을 하면 안 된다. 또한 말씀에 대해 배우고 싶은 것이 많을지라도 공중 집회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무질서하게 묻고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서 남편에게 조용히 물어보아야 한다. 단순히 ‘성적 유혹’으로 오인받기 쉬운 당대의 사회 풍토에 국한시켜 해석하는 것은 줄기를 벗어난 해석이다. 더 나아가 여자들은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없기에 가르치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며(딤전 2:11-14), 따라서 목사로서 안수받을 수도 없다. 다만 그 권위 아래 복종해야 한다. 『율법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다만 복종할지니라』(참고 창 3:16).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적인 질서다. 이것은 여성을 폄하하기 위한 생각이나 구시대적인 발상이 아니다. 여성 인권이 무시되는 일도 아니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여성이 가르치고 말하는 모든 행위들이 일체 중지되어야 하는 식으로 극단적으로 치우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일례로, 주일학교 학생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여자 교사들이 있다.)

여성 안수를 주장하는 진정한 의도

최교수는 자신의 논리에 따라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구절들을 여성 안수 금지를 위한 규범적인 본문으로 활용할 것이 아니라, 교회 안의 여성도들 중에서 복음의 자유를 남용하거나 곡해하여 남자와 여자의 구분, 남편과 아내의 질서까지 부정하여 가정과 교회를 혼란스럽게 함은 물론, 선교의 문까지 닫게 하는 위험을 가져오고 있는 자들에게 준 바울의 특별한 교훈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의 준거 틀에 맞추어 해석하려는 사람들의 주장과는 달리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여성은 안수를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딤전 3:2,12, 딛 1:5,6).
여성 안수를 주장하는 이들도 나름대로는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들의 생각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인본주의적 가치관에 맞추어 성경 구절들이 제시되고, 제시된 구절마저도 그러한 준거 틀에 따라 왜곡되이 해석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을 왜곡되이 해석할 정도로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가치관은 무엇일까? 바로 “여성의 인권 확대”다. 최교수는 말한다. “여성의 인권 확대의 주도적인 활동이 사회보다 교회가 덜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 한국 교회는 여성 성직 안수에 있어 점점 열린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 추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한국 교회 여성 성직 안수를 포함하여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제한하는 모든 제도와 법을 과감하게 개선하여 오히려 사회를 선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갈라디아서 3:28을 들어 ‘1세기의 가부장적 사회구조 안에서도 초기 기독교가 여성문제에 관한 한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이미 앞서 나갔던 것에 비해 남녀평등과 여성의 인권이 보장된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기독교가 일반 사회보다 아직 뒤떨어져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갈라디아서 3:28의 내용은 그들이 주장하는 “남녀평등”이나 “여성인권보장”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결국에 가서 ‘교회는 이 땅에서 인종과 신분과 성의 차별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진정한 주역’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여성 안수 찬성론자들의 진정한 의도였던 것이다.

사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려워 떠는 자들이 아니다. 여성의 인권 신장을 요구하는 세상에 손을 들어 주면서 교회가 마치 그런 일을 감당해야 할 주역인 양 교회에게 부여하신 그 영예를 실추시키고 있을 뿐이다. 인권을 위해 성경의 권위를 버리지 말고 성경의 권위를 높이고 그 앞에 두려워 떠는 자들이 되도록 하자. 그렇게 할 때만이 이 땅에서 소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스 10:1-5). BB
주석)----------------
1) 본 글은 기독교연합신문 6월 5일자 6면에 실린 기사, 곧 “고린도전서 14:34,35”을 중심으로 전개된 최교수의 글을 평가한 것이다.

기자의 논단 208 / 7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