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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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권위와 성경적 지식이 없는 사람들의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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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4월호>

최종권위와 성경적 지식이 없는 사람들의 행보



타락한 인간의 성품을 그대로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사회는 알게 모르게 늘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늘 최종권위는 자신들인고로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대로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구약성경 재판관기에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 시간이 지나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점점 없어짐으로 말미암아 극도의 타락과 혼란이 야기되었다. 『또 그 세대도 모두 그들 조상에게로 합쳐졌고, 그들 후에 다른 세대가 일어났으나, 그들은 주를 알지도 못하며, 주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판 2:10).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살았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판 17:6)고 기록하고 있듯이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최종권위가 없을 때 어떻게 행하게 되는지를 알려 준다. 그때 당시 사회의 혼란을 틈타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 하나님께 가증한 창녀 교회(계 17:5)를 태동시키는 씨앗이 싹트는 것을 볼 수 있다. 에프라임 산지에 사는 미카라는 사람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형상을 만들어 집에 신당을 차려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들 중 하나를 제사장으로 세웠다. 이것은 그 당시 하나님의 전이 실로에 있었고 제사장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으로 행한 가증한 짓이다. 그는 거처할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한 레위인을 집으로 맞아들인 후 그에게 말하기를 『나와 함께 있어 내게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판 17:10)고 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에게 해마다 은 열 세켈과 옷 한 벌과 양식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니 그 레위인은 두말없이 그 집에서 제사장이 되었고 오히려 그것에 만족하였다(판 17:7-10). 있을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던 그는 종교적인 사람에게 발견되어 갑자기 횡재를 한 것이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미카는 미카대로 흡족해 하며 말하기를 『이제 레위인이 내게 제사장이 되었으니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실 줄 아노라.』(판 17:13)고 스스로 만족해 한다.
지금도 이와 같은 일들이 종교적인 열성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계에 일어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너도나도 신학교만 나오면 주의 종으로 쓰임받는 것으로 착각하는 그 당사자나,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고 따르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다. 마치 자격이 없는 사람을 레위인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제사장이 되라고 권유한 미카와 얼떨결에 좋은 일자리를 찾은 그 젊은 레위인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큰 파장을 일으키며 진리를 대적하여 일어선 무리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단 지파 사람들이 자신들의 유업이 그들의 수중에 다 들어오지 않은 까닭에 그들이 거할 유업을 찾으러 정탐을 하던 중 미카의 집에 이르러 그 집에서 유숙하게 된다(판 18:1,2). 그리고 그곳에서 제사장 행세를 하고 있는 레위인을 발견하고 그에게 그들의 가는 길, 즉 땅을 빼앗으러 가는 그 길이 번영할 것인지를 물어본다. 그러자 그 자칭 제사장은 주제넘게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이 주 앞에 있느니라.』(판 18:6)고 조언을 했는데 마치 은사주의자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동원하여 예언하는 모습과도 흡사하고 결과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 제사장의 조언이 맞아떨어진 것은 마치 소가 뒷걸음질을 치다 쥐를 잡은 겪이었다. 그들이 정탐하려던 땅은 원래가 나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족속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외부와는 접촉도 없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골짜기 마을이라서 외부의 침입은 생각도 안 하고 평화롭게만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쳐서 이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집안 일이 잘 풀리면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준 목사의 능력있는 기도(?) 덕분인 줄 알고 그 목사를 신처럼 떠받들 듯이 단 지파 사람들도 그 가짜 제사장을 믿고 형상들과 그 레위인을 미카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그들의 제사장으로 삼아 버린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카톨릭 탄생 과정의 완벽한 그림이다.

레위인 가짜 제사장인 그는 드디어 넓은 문, 즉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세상적으로 봐서 타협을 잘하고 우연히 줄을 잘 선 결과 한 가족이 아닌 한 족속의 제사장으로 승격되어 대접을 받으며 잘 먹고 잘살게 된 것이다. 어차피 자신이 서 있는 위치는 진리와 무관하기 때문에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겠는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너무나 흡사한 일들이 최종권위가 없었던 그때에도 일어났다. 참고로 야곱의 아들인 “단”은 라헬의 몸종 빌하에게서 태어났으며 야곱의 불길한 예언과 함께 어두운 구석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각 지파에서 인장으로 표시받은 14만 4천 명의 명단에서도 “단” 지파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은 영적 족보에서 완전히 지워져 버린 것이다. 『단은 길가에 뱀이 되고 작은 길에 독사가 되어 말의 뒷굽을 물어서 말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창 49:17). 결과적으로는 단 자손인 미카가 세운 종교는 우상을 숭배함으로 시작되었고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전과는 전혀 다른 이방 종교를 만들어냈다. 지금도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권위로 여기며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지역 교회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우상 목자를 세워 두고 엉뚱한 것들을 숭배하는 창녀 교회, 즉 카톨릭 교회가 그 화려함을 자랑하며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최종권위가 없고 사회와 신앙이 혼란기를 맞을 때 그 혼란을 틈타 일어난 또 다른 끔찍한 사건이 있는데 바로 레위인이 사람의 시체를 토막낸 끔찍한 사건이다. 실로 성경은 인간들의 모든 추한 부분까지 들추어 내고야 만다. 성경 말씀에 해 아래 새 것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때 있었던 일들이 지금도 흔히 일어나고 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던 그때에 에프라임 산지 옆에 사는 어떤 레위인이 베들레헴 유다에서 한 첩을 얻었는데 그의 첩이 그를 배반하여 바람을 피우고 친정으로 가서 만 넉 달을 지내고 있었다(판 19:1,2). 그러자 그 레위인은 자기 하인과 나귀를 끌고 그 여인을 찾아가서 그의 장인의 권유로 나흘 동안을 먹고 마시고 마음을 진정시킨 후 그의 첩을 데리고 집으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들은 날이 저물어 가는데도 이방 족속인 여부스인들의 동네에서 유숙하는 것을 피하고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서 자기 고향 사람을 만나 그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밤 그 집에서는 소돔 땅 롯의 집에서 일어났던 일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 성읍의 어떤 벨리알의 아들들이 그 집에 들이닥쳐 『우리가 그를 알고자 함이라.』(판 19:22)고 하면서 레위인을 끌어낼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그 집주인은 롯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만류하며 『보라, 여기에 내 처녀 딸이 있고 그의 첩이 있도다. 내가 이제 그들을 끌어내리라. 너희가 그녀들을 욕보이고 너희에게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라. 그러나 이 사람에게는 그처럼 비천한 짓을 하지 말라.』(판 19:24)고 설득하여 결국은 그 레위인의 첩을 내주고 만다. 결국 그 여인은 다음 날 아침에 그 집주인 문 앞까지 와서 쓰러져 죽고 만다. 시체를 발견한 그 남편은 그녀를 나귀에 싣고 집에 와서 그녀의 시체를 뼈와 함께 열두 조각으로 나누어 이스라엘의 모든 지경으로 보냈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적 혼란기를 맞이한 암울했던 시기에 일어난 한 사건의 모습이다. 믿음을 떠난 사람들로부터는 참다운 지혜를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현명한 대처법도 내놓을 수 없고 사람들마다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근거로 가르치고 지도할 강력한 지도자가 없으면 타락한 본성은 끝없이 죄를 짓게 되어 있다. 사람들에게 진리가 없으면 이런 식으로 종교의 행위에 급급한 나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짓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마지막 날이 가장 가까운 현 시점, 즉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벌어지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의 최종권위로 받아들이지 않는 세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세력이 크고 목소리가 높으면 그들의 주장이 곧 법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전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을지라도 당연히 본성 가운데 알고 있는 법과 질서에 대해서 순종하고 살았다. 그러나 민권시대인 지금은 조금만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즉각 반기를 들고 나서서 투쟁을 벌이고 그에 지친 관련자들은 손을 들고 만다. 도덕도 정의도 그들의 강력한 압박에는 맥도 못추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최근에 국내에서 벌어졌던 호주제 폐지를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모순을 담고 있는지 모른다. 필자는 그 법의 좋고 나쁘고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남녀평등을 외치며 부르짖었던 여자들은 신설된 여성부를 등에 없고 결국은 남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겼던 호주제를 폐지하게 하는 목적을 달성했다. 성경에 의하면 여자들은 연약한 그릇으로서 남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기록된 시대 상황 때문에 그렇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세월이 지나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이 바뀌어 이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일 뿐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들이 이런 잘못된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인권을 운운하면서 법 개정을 외치는 일에 함께한다면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성경을 무시하는 목사들도 무분별하게 이들 세력에 동조하면서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설령 이들을 반대하는 기독교 단체가 있어서 자신들의 입장을 발표하는 것을 보더라도 성경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신들의 눈에 옳은 대로 주장을 펴는 데 그침으로써 설득력을 잃을 뿐만 아니라 실망만 안겨 준다.

마귀는 이 시대에 자신의 종들을 이들 단체에 배치시켜 놓고 그들로 하여금 일하도록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 채 단순히 자신의 소견에 옳다고 생각되면 그들 편에 서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 모든 일들은 성경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되었거나 고의적으로 그 일을 하거나 모두 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행위이다. 재판관기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니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판 21:25).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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