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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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의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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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01월호>

성경에서 "은"(銀)은 죄인의 구속(救贖)을 예표한다. 은은 지금은 고갈되어 천연에서 산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나, 은이 풍부했을 때에는 흙 도가니에서 정련하여 얻어 내곤 했다. 이 정련을 여러 번 할수록 깨끗하고 순도 높은 정화된 은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순도의 은은 순수함을 나타낸다. "순수"란 다른 불순물이 전혀 섞여 있지 않은 것을 말한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선진들 가운데에는 "순수한 사람들"(the pure)이라는 뜻으로 "카타리(Cathari)"라 불렸던 사람들이 있었다. "카타리"는 헬라어인 "카타리조"( 카타리조.jpg)에서 나온 말로서, "순수하다," "순결하다"라는 뜻이다.

"카타리"는 A.D. 1000년에서 1200년 사이에 활약했던 사람들로서, 한때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는 그 세력이 강력했었다. 암흑시대에 살았던 카타리들은 "교황은 적그리스도이며, 로마카톨릭 교회는 계시록 17장의 창녀이다."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가르쳤다. 그들은 그 어떤 성별된 그룹들보다도 그들의 믿음이 확고해서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는 것이 카톨릭 종교재판에 정통한 사람들의 말이다.

스테판을 효시로, 주님의 사도들과 초대 교회 때부터 1,500년, 그 길었던 암흑의 시대까지, 순교의 피로 점철된 믿음의 선배들의 희생의 역사가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순수하게 지켜온 필라델피아 시대의 용사들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 가운데 더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는 사람들이 "순수한 사람들"로 불렸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인데, 그들의 순수함이 순수한 성경의 진리에 바탕을 두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경" 자체가 순수함을 표방하고 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시 12:6). 아니나 다를까, 성경은 여지없이 갓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고 명령한다. 『갓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2:2). 이 말씀은 디모데전서 2:4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리스도인으로 갓 거듭난 영적 아기는 그 성장에 있어서 그냥 "말씀의 젖"이 아니라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여 섭취해야만 다음 단계로 성장해 갈 수 있다.

변개된 개역성경은 성경 전체에서 총 31번 나오는 "순수"라는 단어조차도 단 두 곳(출 27:20, 시 119:140)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단어로 변개시켰다. "순수한 몰약"을 "액체 몰약"(출 30:23)으로 "순수한 물"을 "맑은 물"(히 10:22)로, 심지어는 아예 "순수"를 삭제한 곳(출 30:34)도 있다. 뿐만 아니라 "순결"이란 단어를 놓고 <한글킹제임스성경>과 비교해 보면 총 17번 기록된 "순결"이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순결"이라고 기록해 놓지 않았다. "순결"을 "정결"과 "깨끗함"으로 교묘하게 대체시켜 놓았다. "순결"과 "정결"은 유사한 의미의 말 같지만 실은 본질적으로 의미가 다르다. "순결"이란 말은 "순수"라는 말처럼 잡된 것이 전혀 섞이지 않은 마음에 사리사욕 따위가 전혀 없다는 의미로서는 "정결"이라는 말과 비슷하나, "순결"이라는 말 안에는 육체적으로 이성과의 관계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점이 정결과 크게 다르다.

이 점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인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데, 그 관계를 나타내는 고린도후서 11:2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이는 내가 경건한 질투로 너희에게 질투를 느낌이라. 내가 너희를 한 남편에게 정혼시켰나니 이는 한 순결한 처녀로 너희를 그리스도께 바치려는 것이라.』 여기서 "한 순결한 처녀"는 순수하고 때 묻지 않고, 그 누구도 손대지 않은 처녀를 말하는 것인데, 이를 "한 정결한 처녀"로 대체한 것은 명백한 변개이다.

마찬가지로 "순결"을 "깨끗함"으로 대체했을 경우에도 전혀 다른 의미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말라키 1:11을 보도록 하라. 『이는 해 뜨는 데부터 해 지는 데까지 내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위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에 향을 피우며 순결한 제물이 드려질 것이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가운데서 위대하게 될 것임이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변개된 성경은 이곳의 "순결한 제물"을 "깨끗한 제물"로 바꿔 버림으로써 천년왕국 때에 주님께서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로서 그때에 다시 거행되는 장막절과 희생제를 통해서 받으시는 영광과 위대하심을 격하시키고 있다.

또한 베드로전서 1:22에서는 『...가식 없는 형제 사랑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말씀하는데 개역성경은 여기서 "순결한"을 삭제해 버렸다. 카톨릭 사제들 간의 동성연애 스캔들이란 이 『순결한 마음』에서 "순결한"이 삭제된 육신적인 마음을 따른 그릇된 사랑을 행한 결과이다.

우리는 "카타리," 곧 "순수한 사람들"의 맥을 잇는 후배 성도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함을 널리 고취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늘 견지하고 있어야 할 것은 카타리들이 보여 준 "실행에 있어서의 순수함"이다. 그들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지역 교회 내에서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회 내의 죄에 대한 강력한 징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물론 당시에는 믿음에서 벗어나 타협하고 부도덕했던 부패한 영적 지도자들을 향한 것이었겠지만, 로마카톨릭에 의한 화형과 온갖 고문과 공포가 극심하게 엄습하던 때에 성경적 믿음의 순수성을 그토록 강력히 지켜 나갔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순수했던 것인가를 반증한다.

우리의 순수함 역시 마치 무쇠가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녹이 슬듯 순도 높았던 순수함에서 점차 때가 끼어 불순해질 수 있다. 즉 자칫 방심하면 함량미달의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지난날 얼마나 순수했던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순수하게 거듭났을 때, 순수한 교회를 처음 알았을 때, 순수한 성경을 알았을 때, 순수한 교리를 알았을 때, 순수한 믿음을 따랐을 때, 순수한 복음 전파로 혼들을 이겨왔을 때, 순수한 성도의 교제를 나눴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순수한 인도하심을 받았을 때, 우리는 얼마나 기뻐하며 즐거워하였던가?

성경은 주님께서 공중에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에게 『비둘기처럼 순수하라.』(마 10:16),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딤전 4:12), 또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수하고 흠 없게 되기를 바』란다고(빌 1:10) 말씀하고 있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카타리처럼 "순수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바른 말씀이 순수하고, 그것을 믿음에 있어서 순수하며, 그 믿음을 실행함에 있어서 순수하다. 이 점에 있어서 누구도 우리를 따라잡을 수 없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전파하고, 침례교도들이 믿고 따랐던 성경적인 교리에 순응하며,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징계도 불사한다. 바로 저 옛날의 카타리의 후예들임을 잊지 말고 이 순간도 믿음의 순수함을 지켜 내기 위해 강력히 분투해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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