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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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을 본딴 한국 교회의 “부활절 성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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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5월호>

『우리가 그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이나 또 악하고 가증한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누룩 없는 성실과 진리의 빵을 가지고 지키자』(고전 5:8).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주의 만찬을 기념할 때, 누룩 없는 성실과 진리의 빵을 가지고 지켜야 한다. 이를 간과하면서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온전한 신앙자세라 할 수 없다.
지난 4월 8일 새벽 5시 시청 앞 광장에선 2만여 명의 교인들이 운집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2007년 부활절연합예배가 드려졌다. 이번 예배는 초대 교회의 예배 형식에 따라 네 부분(부활절 초를 점화하는 빛의 예전 / 창세기부터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와 관련된 말씀을 낭독하는 말씀의 예전 / 죄를 물로 씻음을 상징하는 물의 예전 / 하늘 나라의 잔치를 상징하는 성찬성례전)으로 기획되었다고 하는데,1)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 더군다나 초기 교회의 어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이교도 절기(“이스터”)를 지킨 적이 없다. 진리의 말씀이 결여된 종교행사일수록 그만큼 겉만 그럴듯한 비성경적인 의식들로 치장되기 마련이다. 이런 것들은 이교도 절기들을 지키는 모습들에서 비롯되었거나 로마카톨릭에 의해 기독교와 이교도가 혼합된 전통들에서 비롯되었다. 부활절 초라든지, 물로 죄를 씻을 수 있다는 믿음이라든지 그 어느 것 하나 성경적인 진리와 닮은 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유독 이번 의식에서 눈길을 끈 것은 소위 “성찬성례전”이라고 하는 것이었다(물론 이것은 잘못된 용어이기에, “주의 만찬”이란 말로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그들 스스로도 예배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하는 바, 스톨을 걸친 여러 명의 목사들이 포도주에 적신 전병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2만여 명의 교인들은 이 “거룩한” 의식에 “경건한” 태도로 참여했던 것이다. 본 의식에 너무 감동을 받은 나머지, 이정익 목사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오늘 우리가 받은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의 영육을 압도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복음에 합당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밝히는 등불이 되게 하옵소서.” 진정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되어 이 나라 교회들이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외치는 등불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나라 기독교 지도자들은 여전히 로마카톨릭의 누룩에 취하여 길 잃은 양들을 제대로 인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이목사가 주의 만찬의 의미에 정말로 무지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잠시 실언을 했던 것인지는 좀더 살펴보고 판단을 내려야 할 일이지만, 그가 드린 감사 기도의 내용을 놓고 볼 때 실로 카톨릭에서 말하는 “화체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받은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의 영육을 압도하게 하시고...” 카톨릭은 성체성사 중에 받아먹는 빵과 포도주를 축복하게 되면 그것이 실제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둔갑하게 된다고 거짓말을 일삼는 집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살과 피로 바뀐다는 믿음으로 그것을 먹는 자들이나, 참석자들의 영과 육을 압도할 만큼 그들의 “떡”과 “포도주”에 필요 이상의 실제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의 기도를 단순히 영적인 의미나 영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다분히 “문자적”이다. 필자는 이목사가 그 “경건한” 분위기에 너무 감동받은 나머지 실언한 것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그처럼 로마카톨릭의 악하고 가증한 누룩을 가지고서는 이 땅에서 복음과 진리의 기치를 드높이는 등불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잠시 “주의 만찬”이 갖는 의미를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이는 주 예수께서 넘겨지시던 그 밤에 빵을 가지고 감사를 드린 후 떼어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쪼개진 나의 몸이니 받아먹으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하셨으며 식후에도 이와 같이 잔을 가지고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나의 피로 된 새 언약이라. 이것을 행하여 너희가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고 하신 것이니라.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라』(고전 11:23-26). 본문이 증거 하는 대로 주의 만찬 때 먹는 쪼개진 빵은 우리를 위해 찢기신 주님의 몸을 상징하고, 그 잔은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흘리신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의식을 갖는 목적은 소위 “성체성사”를 행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진짜 살과 진짜 피를 먹고 마셔야 하는 문자적인 믿음의 실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데 있다. 그러나 주의 만찬은 그분의 죽으심만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까지 기억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분이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라.』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주의 죽으심만을 기억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 땅에 수많은 교인들은 주의 만찬에 참여하면서도 주의 재림에 대해서는 “실제적이고 문자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이처럼 주의 만찬은 주의 죽으심을 기억할 뿐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왕으로서 영광스럽게 오시는 것까지 바라보게 한다.
성경은 주의 만찬에 참여할 때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다(고전 11:27-30).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들은 병들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고전 11:30). 자신을 살펴보아 주님께 자백드리지 않은 죄가 있는지 점검하고 그 문제를 주님의 피로 해결한 사람들만이 합당하게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묵은 누룩이나 악하고 가증한 누룩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이 만찬에 참여할 수 없다. 묵은 누룩은 떼어내야 한다.
오늘날 교계가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복음의 누룩”이나 “교회 성장을 가져오는 누룩”을 굳게 붙잡고서 주의 만찬을 합당하게 지켰다고 할 수 없다. 이는 누룩이 성경 어디에서도 긍정적인 것으로 언급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누룩은 거짓 교리요(마 16:11,12), 타락한 삶(고전 5:6)을 의미한다. 이런 적은 누룩은 온 반죽을 부풀게 할 뿐이다. 소위 오늘날 대형 교회들은 진리의 기둥과 터전으로 견고히 서 있는 모습이 아니라 누룩으로 부풀어 버린 반죽의 형상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이 보기에 “긍정적”으로 보이는 누룩은 그들의 믿음대로 성경적인 복음과 진리의 전파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정상적인 교인수 증가라고 하는 “양”적인 증가만을 가져왔던 것이다.
부활절연합예배와 맞물려 주의 만찬을 함께 나눔으로써 그 의미를 부여했다고 해서 그들의 신앙생활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는 그들의 누룩이 여전히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타락한 삶까지 논할 것까진 없지만, 교계 전면에 드러난 타락상이나 거짓 교리가 여전히 남아 있는데 어찌 그들의 “만찬”을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정치판에서나 볼 수 있는 육신적인 분열이라든지 돈을 사랑하고 사람의 호감을 사려 하는 등의 타락한 삶이라든지, 비성경적이고 인간적인 전통 등의 거짓 교리들을 회개하고 만찬에 참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회개”를 하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정작 “무엇”을 회개하고 “어떤 누룩”을 제거해야 하는지는 모르고 있다. 각 교단들이 일치하고 화합하지 못한 죄라든지, 소외받은 이웃을 돌보지 못한 죄라든지, 남북통일에 기여하지 못한 죄라든지, 이 땅을 더 살기 좋게 만들기 위해 보다 더 헌신하지 못한 죄라든지, 늘 이런 것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다.
지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런 회개가 아니다. 이미 진리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그들은 비성경적인 거짓 교리를 붙든 채 회개를 다 했다고 그리고 만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양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단 말인가? “꽃 한 송이 핀다고 봄인가요 다 함께 피어야 봄이지요.”라고 하는 본 연합예배의 ‘부제’처럼 한국 기독교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 한자리가 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맺힌 것은 아니다. 그들의 자리는 “성경적인 일치”의 자리가 아니라, 각 교파의 거짓 교리들이 공존하는 “악하고 가증스런 누룩”이 부풀고 있는 자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은사주의 누룩, 극단적 칼빈주의 누룩, 무․후천년주의 누룩이 공존하는 자리인 셈이다. 바른 성경도 올바른 교리도 진리도 없다. 각 교파 간의 증오와 미움의 벽이 허물어진 만큼 각 교파 간의 “묵은 누룩”이 서로에게 들어가 반죽의 부푼 정도가 더 심화되었을 뿐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자고 역설하는 사람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하신 성경을 믿지 않고, 성경적인 은혜의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으며, 성경적 교리를 믿고 실행하지도 않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은 채 그에 합당한 믿음의 실행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회개하자고 주장하는 이도 없었다. 이런 것을 회개해야만 그들이 진정 주의 만찬에 참여할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정작 떼어내야 할 묵은 누룩은 떼어내지 않은 채 만찬에 참여한 그들은 주의 만찬에 관한 하나님의 경고를 심사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이교도 절기 “이스터”(Easter)에서 비롯된 부활절을 지키는 자리에서 주의 만찬을 나누는 것만큼 앞뒤가 맞지 않는 광경은 성경적 진리에 무지한 오늘날 교계의 현주소라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고 “부활”하신 주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을 기억하며, 주의 만찬을 “부활”과 연결시키는 것은 합당한 일이지만 그것을 “부활절”과 연결시키는 것은 비성경적인 처사다. 이처럼 누룩을 제거하지 않은 채 참여한 그 만찬의 자리가 얼마나 비성경적인 자리였는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마땅히 주의 몸을 분별하고 나서 준비하고 참여해야 할 만찬을 그들은 이런 식으로 더럽혔던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진리에 대한 무지는 용서될 수 없다. 어떤 종교적인 행사를 치르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에 앞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의 저주를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라. 이 때문에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약하고 병들었으며 상당수가 잠들었느니라』(고전 11:29,30). 누룩을 제거하지 않은 채 참여하는 만찬은 오히려 주의 몸을 파괴하고 더럽히는 의식이 되고 만다. 각 교회들은 부활절연합예배의 성과를 놓고 가타부타할 것이 아니라, 현재 그들에게 스며든 누룩을 점검하고 제거하여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BB
주석)----------------- 1) 기독교신문, 제1878호, 2007.4.15.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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