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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예수, 작은 예수"가 무슨 뜻인가? - 예수님의 이름을 그렇게 사용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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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0년 10월호>
사람은 죽을 때 누구나 공과를 평가받는다.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받는 것 외에도 이 세상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 평가받게 되는데, 이 평가는 그의 혼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겠지만 오히려 남은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평가에 따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며, 좋은 본으로 삼을지 아니면 그 반대일지가 결정된다.최근 몇 년 사이 종교계의 "큰별"(?)들이 타계한 바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카톨릭의 대표인 김수환 추기경이나 불교에서 이름깨나 한다는 중 법정이 그들이다. 그들의 장례식에 온나라가 술렁였다. 정말 그들을 존경했는지 아니면 정치적 목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을 애도했다. 이것은 그들이 세상에서 인정받았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말이다. 사람들은 죄인들의 죽음에 애도를 보낸다. 마치 그를 지옥으로 환송하듯이 말이다. 마이클 잭슨이 죽었을 때 그랬고, 다이아나가 죽었을 때 그랬고, 요한 바오로 2세가 죽었을 때 그랬다.
반면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추앙도 받지 않으며, 대단한 장례식으로 떠들석할 필요도 없으며, 세상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를 칭송할 필요도 없다. 오직 그를 피로 사신 주님께 기쁜 마음으로 갈 뿐이며, 다시 성도들을 만날 수 있다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잠잘 뿐이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물론이요 그를 보내는 그 교회 성도들도 슬퍼하지 않으며 그 소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여기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또 한 사람의 장례식이 있었다. 지난 9월 2일, 한국 교계를 어느 정도 대표하고 있던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 목사가 지상 생을 마감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목사로 알려졌고 한국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장례식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대형 교회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무슨 위원들이 그리 많은지. 장례위원이 국내만 639명이고, 집행위원이 237명이다. 하지만 필자의 눈을 끈 것은 어마어마한 장례준비 위원들이 아니라, 고문 및 공동위원장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그들은 김장환, 조용기, 곽선희, 홍정길, 이동원, 김삼환, 하용조 목사 등 10여 명이었는데, 이들은 분명 사랑의교회 목사들이 아니다. 타 교회 목사들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차원이 아니라 위원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은, 이 장례가 범교단적이라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한국 교회의 대표성을 띠고 장례를 치르고 싶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하는 말은, 옥한흠 목사가 자기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일례로 김진홍 목사(두레교회)는 "흔히 고인을 평신도를 깨우는 목사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들 목회자를 깨우신 분"이라고 말했다. 자, 그렇다면 옥한흠 목사가 과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끼쳤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어떠한 믿음으로 한국 교회들과 성도들을 깨우쳤는가?
1. 제자훈련, 누구의 제자를 삼는 것인가?
옥한흠 목사가 제자훈련을 시작한 장본인은 아니지만, 그 큰 교회를 제자훈련으로써 양육하여 성공적 목회를 이뤄 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제자훈련을 그의 업적으로 삼는다.
제자훈련이란 무엇인가? 그들이 제자훈련을 말하는 가장 핵심 구절은 디모데후서 2:2이다. 『그리고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즉 누군가를 가르침에 있어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제자훈련이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훈련시키셨듯이, 바울이 디모데를 훈련시켰듯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원래 제자훈련은 선교단체들에서 복음 전파자들을 양성시키는 것에서 시작되었는데, 옥목사는 이것을 교회 운영에 적용하였다. 즉 목회자의 설교 중심으로 교회를 이끈다기보다는, 평신도들을 중간 지도자들로 만들어서 그들에게 더 어린(영적으로) 신자들을 가르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고, 또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다보니 평신도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연구하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중세 암흑 시대에 사제들만 보던 성경을 회중들의 손에 주었던 루터의 종교개혁에 비견되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그가 "제2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다고 추켜세우기까지 하는 것이다.
자, 이쯤 되면 상당히 큰 업적을 남긴 것처럼 보인다. 제자훈련이란 아주 훌륭한 프로그램이고, 이론적으로 별 손색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첫째, 제자훈련은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루터는 당시 라틴어 성경만 있어 사제들만 보던 시대에 독일어 성경을 번역해서 성도들 누구라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루터는 올바른 성경을 번역했다. 당시 카톨릭의 성경은 변개된 성경이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수집하고 편수한 올바른 헬라어 성경 "표준원문"(Textus Receptus)을 가지고 쉬운 자국 언어로 번역했다. 성도들은 그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고 그들 자신을 주님께 드렸다. 반면 옥목사 등이 펼치고 있는 오늘날 한국 교계의 제자훈련은 여전히 변개된 개역성경(개정판)으로만 행한다. 독일의 종교개혁은 단지 독일어 성경 때문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바른 성경이 있었기에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제자훈련이 어떻게 제2의 종교개혁이란 말인가? 어떤 성경을 주었는가?
둘째, 제자훈련은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로 만들지 않는다. 겉으로는 성경을 매우 많이 가르치는 것 같지만 이런저런 프로그램들만 많은 것이지, 가르치는 내용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무엇보다 신학적으로 다양하고 서로 상이한 관점을 가진 교사들과 책들을 통해 무엇이 진리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성도들을 성경으로 양육했다면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마귀의 세력들과 싸워야 할 텐데, 제자훈련으로는 그러한 제자를 전혀 만들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했다. 거리에서 외쳤다. 세상의 죄들을 지적하고 책망했다. 옥목사를 비롯해서 수많은 제자훈련 교사들은 그런 것을 가르치는가? 우리는 거리에서 왜 그 교회들로부터 나온 거리설교자들을 한 명도 보지 못하는가? 왜 그들의 강단에서 지옥과 죄와 심판의 설교를 찾아보기 힘든 것인가? 그들에게서 양육받은 수많은 "제자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진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가?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자훈련으로 양육받아 싸운다면 왜 이 나라 교계는 그토록 썩어 있는 것인가? 혹시 그 "제자들"이 기백억 원대의 사랑의 교회 건물을 위해 헌신한 제자들은 아닌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았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이며, 또 그리스도를 위해 수치를 짊어지는 것이다(히 13:13). 그러므로 구원받기는 쉬운 일이지만 제자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프로그램만 이수하면 "제자"가 된다. 제자란 스승을 닮는 법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닮는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을 닮을 뿐이다. 결국 누구의 제자들인가? 옥목사 자신의 제자이지 않은가? 옥목사는 "제자"들을 "작은 예수"라 불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작은 예수"들. 하지만 그들이 그 제자훈련의 프로그램을 충실히 이행할 때 닮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옥목사 및 그 교사들이다. 필자가 대학 때 제자훈련을 받을 때에도(C.C.C.), 말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라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김준곤 목사의 제자가 되는 법으로 양육받았다. 결국 그 "제자"들이 "작은 예수"라면 "큰 예수"는 누구인가? 과거 필자가 본으로 삼았던 "큰 예수"는 김준곤 목사였다면, 지금 사랑의 교회의 "제자들"이 본으로 삼고 있는 "큰 예수"는 옥한흠 목사가 아닌가?
2. 교회 갱신과 일치를 위한 노력
교계에 알려진 옥한흠 목사의 업적은 제자훈련 말고도 "교회 갱신"과 "일치"였다. 그는 교회 갱신을 위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에서 10년간 대표를 역임했는데, 그 협의회는 보수와 진보의 15교단이 섞여 있는 협의회다. 자신이 보수 신앙임을 표명하면서도 진보 목회자들과 연합하여 "교회 갱신"을 주도하려 했다는 것은 그의 행보가 에큐메니칼 운동을 추구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그는 에큐메니칼을 통해서 도대체 무슨 갱신을 하려 했던 것일까? 그가 추구하고 이루려고 했던 갱신은 과연 어떤 것인가? 그는 한국 교회의 나아갈 길을 "일치, 갱신, 섬김"으로 정의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일치가 곧 갱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기로, "갱신"해야 할 한국 교회의 문제는 분열이다. 교단들이 분열되어 서로 싸우는 것, 물론 이것이 문제점 중 하나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들이 서로 양보하고 서로 섬기기만 하면 되는가? 성경 해석을 달리해서 만들어진 교단들이 갈라질 때는 분명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있었을 텐데, 그 옳고 그른 문제들을 다 덮어 버리고 사랑만 하면 교회가 치유되는 것인가?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여 진리를 세우는 것이 아닌가? 성경에 따라서 선악을 분별하고, 세상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진리를 세워야 할 것이다. 죄들을 지적해 책망하고, 의를 선포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평화와 사랑이 아니라 복음, 진리, 의를 선포해야 할 것이다.
그는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앉아서 어떻게 교회를 갱신하려 노력했을까? 은사주의의 파고에 넋나간 사람들이 마주 앉아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까? 그 협의회 안에는 분명 성경의 영감성을 믿지 않는 목사도 많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을 믿지 않는 목사도 많았고, 행위구원을 믿는 목사도 많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목사도 너무 많았을 것이다. 심지어 구원받지 않은 목사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복음과 진리를 전파하기는커녕, 그들과 함께 앉아 교회 "갱신"을 토론하고 있었다. 이것은 명백히 주님의 일이 아니다. 그가 정말로 교회 갱신을 위해 노력했다면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해야 했다.
첫째, 교회들에 바른 성경을 제시해야 했다(시 138:2, 고후 2:17).
둘째, 강단에서 죄와 지옥을 선포하여, 구원받지 않고 교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회개시켜 구령해야 했다(막 1:15). 또한 성도들을 구령자로 만들어서 어디서나 복음을 전파하도록 만들어야 했다(딤후 4:2).
셋째, 성도들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쳐서, 세상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일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일하게 해야 했다(요일 2:15). 그래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상을 받도록 양육해야 했다(고전 3:12-15).
넷째,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도록 가르쳐야 했다(딤후 4:8).
다섯째, 성경을 은유적으로 비유적으로 푸는 모든 학자들의 의견을 던져 버리고,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문자적으로 믿도록 올바로 가르쳐야 했다(계 1:3).
여섯째, 물뿌리는 세례, 특히 유아세례라는 카톨릭적 실행을 던져 버리고, 믿는 성인들에게 침수에 의한 침례를 베풀어야 했다(행 8:36,38, 벧전 3:21).
일곱째, 크리스마스, 부활절, 십자가 형상 같은 이교도적인 풍습을 교회 내에서 사라지게 했어야 한다(레 18:3, 민 33:52).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지만,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지 교회를 갱신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것들은 한국 교계 내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문제들이다. 제자훈련을 한다 해도 이 일을 하도록 훈련시켜야 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목자에게 맡기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을 이뤄내지 못했다. 열심히 노력했으나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라, 방향부터 잘못 잡았던 것이다. 제자훈련이라는 교인 양성 프로그램을 돌려 교회를 번성케 했고, 결과적으로 대형 교회를 이뤄 냈고, 그래서 이 나라 교계에 한 유명한 목사가 되었을 뿐이다. 그의 인격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는 모른다. 얼마나 인자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사랑의 사도로서의 모습을 보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결코 큰 교회를 이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먹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옥한흠 목사가 평생을 바쳐 이룬 제자훈련과 교회 갱신의 노력, 이것은 오늘날 교회들의 가려운 문제를 좀 긁어 줬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하나님의 입장에서 해결해 준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 "작은 예수"를 만든 목사, 그 "작은 예수"들이 무더기로 모여 고인의 마지막을 보낸 그 "천국환송예배"가 이다지도 씁쓸한 것은, 그 "작은 예수"들을 통해 이뤄지게 될 앞으로의 한국 교계의 모습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일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