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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도 견디실 수 없는 ‘한국 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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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년 00월호>
『헛된 예물을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게 가증함이요, 새 달들과 안식일들과 집회들을 모으는 것도 내가 견딜 수 없으니 심지어 엄숙한 모임까지도 악한 것이니라. 너희의 새 달들과 정한 명절들을 내 혼이 싫어하노라. 그것들은 내게 짐이요, 내가 지기에 피곤하노라』.- 이사야 1:13,14Again 1907!”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재현을 갈망하는 한국 교계의 염원 속에서, 지난 7월 8일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는 평양의 영적 각성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회가 열렸다. 10만여 명의 목회자 및 교인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공적인 인원 동원을 자랑하며 치러진 본 행사는 준비 과정부터 교단들의 입지문제를 포함한 여러 가지 잡음 속에서 또 한 번의 실속 없는 행사로 끝나고 말았다. 기존의 형식적인 대형집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이전부터 반복되어 온 실속 없는 회개의 내용들, 대형집회의 입지를 구축하려는 교단들의 반복된 입김, 반복되는 비성경적 열매들. 설교의 내용이 다소 변한 것을 제외하고는, 성경적인 부흥을 위한 어떠한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한국 교회들은 부흥을 간절히 열망하면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 성경적인 참 신약 교회로서의 모습을 회복하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그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부흥을 이룰 수 있는지, 어떤 기반에서 이룰 수 있는지, 어떤 것이 부흥의 참 모델이 될 수 있는지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소위 “성공적인” 부흥집회를 치르고 나서도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교인들의 구원 및 구원의 확신, 구령의 열정,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 교회의 참된 역할, 올바른 성경적 지식, 도덕적인 수준 등을 따져볼 때 그들은 예전과 어느 것 하나 달라진 게 없다. 세 시간에 걸쳐 진행된 부흥집회가 가져온 열매란, 고작 “세 시간의 들뜬 기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말하자면 실속 있는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이번 집회는 말로만 끝내지 말고 실천에 옮기자!’라고 다시 한 번 다짐해 보지만 여전히 제자리다. 행사장에 모인 어떤 교인들은 눈물로 간절히 회개하고 통회하려 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무의미하게 “할렐루야”와 “아멘”을 연발하면서 기도를 쉬지 않고 드리려 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렇게 염원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날 임했던 성령이 또다시 임재하고 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소위 비성경적인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자신이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에게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 안에 역사하고 있다고 생각한 영조차 성령이 아니었다. 참된 부흥은 그들이 경험했던 일시적인 기분에 들뜬 변주곡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지속되는 실제적인 하나님의 역사요, 지속되는 실제적인 성도들의 변화인 것이다.
실속은 없고 형식만 즐비한 게 한국 교회 “대형 집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부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을 선포하는 시간은 총 세 시간 중에서 약 20분에 불과하고, 여러 사람들이 각종 순서들을 맡아 집회의 형식을 메우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그들의 집회가 실제적인 부흥의 역사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부흥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차지하는 위치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 바르게 보존된 성경(루터 성경)을 번역하여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선포했던 루터의 종교개혁으로부터 그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영국과 미국의 부흥을 이끌었던 요한 웨슬리나 찰스 피니, D.L. 무디, 스펄전 등이 하나님의 바른 말씀인 <킹제임스성경>을 근거로 얼마나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겨왔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들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요한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다. “성도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은총의 사업은 한 세대도 못가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책을 읽는 그리스도인만이 진리를 아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책이란, 바로 “책들 중의 책”(the Book of books)이라 할 수 있는 “성경”(the BOOK)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과 능력있는 역사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순종할 때 나타나는 법이다. 부흥은 여기서 시작된다. 말씀을 소홀히 하는 집회로부터 어떤 부흥도 기대할 수는 없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마음을 뜨겁게 했던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그분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성경을 열어 보여 주실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하며』(눅 21:32). 그러나 바르게 보존된 성경도 없고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이 나라 교인들에게 성경은 열려 있지 않고 닫혀 있는 책이다. 그래서 그 말씀이 그들 안에 효과적으로 역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부흥은 그들에게 있어서 요원한 것이 되고 만다.
그들이 부흥을 위한 이 중요한 집회에서 말씀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그들이 부흥의 모델을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다. 한국 교계는 ‘평양대부흥운동’ 하면 언제나 먼저 길선주 장로의 “공개적인 죄의 고백” 자체를 떠올리고, 그 자체를 부흥의 근간으로 믿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또 그 말씀 안에서만 역사하시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간과한 채, 단순히 성령의 역사만을 강조하여 죄의 고백과 영적 각성을 끌어내려 하고 있다. 그래서 죄를 통회하고 고백하는 것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죄를 통회하고 고백하기에 앞서 능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불필요한 각종 행사들로 장식된 집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빛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뜨겁게 기도하고 그들의 죄를 간절히 통회하고 자복했다면, 100년 전의 집회를 재현한 성공적인 집회로 여기려 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기분을 고조시켜 분위기에 젖어들게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진정한 회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통회의 기도와 찬양의 시간을 인도한 오정현 목사(사랑의 교회)는 ‘진정한 회개의 기도란, 어떤 행사나 이벤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그것은 옳은 말이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오목사를 포함한 그들이 집회를 통해서 보여 준 것은 무엇인가? 말씀이 아닌 행사나 이벤트로 부흥을 가져오려 했던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 교회를 죽인 평양집회를 모델로 그들은 또다시 한국 교회를 죽이고 말았다. 주 설교자로 강단에 선 옥한흠 목사(사랑의 교회 원로목사)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어 버린 사데 교회”(계 3:1-6)에 관한 설교를 통해, 그곳에 모인 교인들을 불과 20분 만에 살려 보려고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보여 준 믿음과 행위는 너무나도 달랐다. 강력하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성도들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온전히 부복할 때만이, 그들의 양심은 온전히 반응하여 죄들을 자백하고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옥목사는 ‘진정한 회개는 성령님의 강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역설했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그러한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진리의 말씀과 그에 대한 성도들의 온전한 믿음이 결합될 때만이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살전 2:13). 생명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여 죽어 버린 교인들을 살리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그들은 부흥의 맥을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이 고백한 죄들의 내용이란 어떤 것이었는가? 그들은 ‘주님 앞에서 제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지 못한 죄’에 대해 고백했다. 이는 그들이 복음의 말씀을 전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시인하지 못하여 하나님을 높여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했다는 뜻일까? 그들은 또 ‘교단 분열에 대한 죄’와 ‘한국 민족의 우상 숭배 및 신사참배의 죄’를 통회하며 자백했다. 그러면 그들은 이번 집회를 준비하면서 자신의 “교단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고 불만을 토로함으로 육신적인 모습을 보여 준 죄(기독교연합신문, 2007.6.24. 제4면)에 대해 회개했단 말인가? 이제는 정치적인 싸움을 방불케 하는 모습을 교계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단 말인가? 한민족의 우상 숭배를 회개했다면, 교회 안으로 들어온 은사주의의 샤머니즘적 요소들을 이제는 버리겠다는 말인가? 그들은 또 ‘불의에 대해 침묵하고 거짓과 불의에 타협했던 죄’에 대해 자복했다. 이와 관련해서 옥한흠 목사는 ‘강단에서의 책임을 소홀히 한 목회자들의 죄’에 대해 설교했었다. 그는 ‘성도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고자 죄와 거룩한 행실에 대해 제대로 선포하지 못했던 자신과 목회자들의 회개’를 촉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전국 교회, 어떤 교단에서든지 모든 강단에서 “죄”와 “지옥의 심판”을 설교하고, 성도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강력한 말씀을 기대해도 좋다는 뜻인가? 이제는 코미디를 연출하는 목사들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란 말인가?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눔과 섬김의 본의 부족,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 것, 도덕적 주도권 및 거룩함의 능력을 상실한 것에 대해 회개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세상과 죄와 거짓 교리들로부터 온전히 성별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했단 말인가? 교회 안에서 영화를 보여 주고, 지극히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가수들을 초청해 지역 주민의 관심을 사려 했던 그들의 죄들을 회개했단 말인가? 독자들에게 확언하건대, 이 중 어떤 것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부흥을 위한 올바른 길에 들어서질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다시 실속없이 시간만 낭비하고 말았다.
1부 행사에 이어 2부 순서에서는 ‘Again 1907’을 뛰어넘는, 한국 교회 제2의 부흥을 위한 실천운동 선포식이 열렸다. 그리고 한 신문에서는 그 행사가 다음과 같이 마무리 되었다고 이렇게 기록했다. “한국 교회는 10만 선교사 파송 및 1,000만 전도운동, 생명의 쌀 나눔운동 등을 통해 복음의 전령이자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될 것을 소리 높여 다짐했다. 3시간 넘게 이어진 대회는 대부흥 100주년을 축하하는 레이저 쇼와 화려한 불꽃 축제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국민일보, 2007.7.9) 그들의 부흥은 소위 이런 것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성경적 부흥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백하며 자기들의 행실을 털어놓더라. 또 마술을 행한 많은 사람도 그들의 책을 함께 가져와 모든 사람 앞에서 불태우니 그것들을 값으로 계산하면 은 오만 개어치나 되더라』(행 19:18,19). 부흥에 있어서 그들이 얼마나 성경과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진정으로 성경적 부흥을 갈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와 같은 에베소 성도들의 부흥의 중심에는 힘있게 세력을 확장시키는 『하나님의 말씀』(행 19:20)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