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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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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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8월호>

우리는 지금 교회 시대의 "마지막 날들"(딤후 3:1)을 살아가고 있다. 이 마지막 날들에 명백하게 목도할 수 있는 현상들 중 하나는 다름 아닌 "권위의 해체"이다. 통치자의 권위, 교사의 권위, 부모의 권위 등 어떤 형태의 권위라도 제대로 내세울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모두 다 똑같은 가치를 지녀야 하고, 모두 다 평등해야만 하기에, 이 마지막 날들에는 더 이상의 구별과 차별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넘쳐 난다.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과 동등한 가치를 지녀야 하고, 여성은 남성을 다스릴 수 있으며, 학생은 교사의 권위를 무시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시대를 "시민들의 권리"라는 의미의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 시대"(계 3:14)로 명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은 그림들에 있는 금사과들』(잠 25:11)처럼 매우 적합한 선언이다.

권위가 해체된 근본적인 원인은 단연코 사탄이다. 인류가 존재하기 전부터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했고 그 권위에 도전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가서 내가 내 보좌를 하나님의 별들보다 높일 것이요... 지극히 높으신 분같이 되리라』(사 14:13,14). "덮는 그룹"(겔 28:14)이었던 루시퍼의 타락은 권위에 대한 도전에서 시작되었다. 인류가 창조된 이후에도 사탄은 또다시 하나님의 권위에 대적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이브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의문을 갖게 함으로써 인류를 죄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했던 것이다.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권위"와 『반드시 죽지는 아니하리라.』(창 3:4)라고 말한 "사탄의 권위"가 충돌했을 때 이브는 사탄의 권위에 순종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인류의 타락은 권위를 잘못 선택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이 마지막 날들에도 이브가 직면했던 권위의 문제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앞에 동일하게 놓여 있다. 즉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고 섭리로 보존된 성경과, 사탄이 삭제하고 첨가하고 변개시켜 누더기가 되어 버린 성서들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6천여 년 전의 역사는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솔로몬의 말대로 해 아래 새 것은 없다(전 1:9). 말씀의 권위를 무너트리려는 사탄의 "권위 해체 작전"은 지금도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통치자를 두려워할 줄 알았다. 학생들은 교사의 권위에 순종할 줄 알았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악한 것"으로 인식한다. 여기에는 성경을 배제한 세상 교육도 한몫하고 있는데, 이러한 세상 교육은 철학에 기반을 둔다. 마르크스는 권위를 계급으로 인식하여 "계급투쟁," 즉 권위에 대항할 것을 종용했다.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이 억압받고 있다고 주장했고, 니체는 이러한 억압이 사회 규범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규범의 정체는 종교개혁 이후에 형성된 기독교적인 사회 규범(프로테스탄티즘)이었기에,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철학자들이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성(性)과 연관된 분야 등에서 기독교적인 사회 규범을 무너트리고자 일생을 바쳤다.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동성애 운동, 페미니즘, 전교조 활동, 학생인권조례, "지나친" 민주주의 등은 철학자들의 헌신적인 희생의 결과물들이다.

이처럼 철학의 역사는 패륜의 역사이고 마귀의 역사이다. 철학으로 교육을 받아 온 사람들이 주류가 된 세상에서는 "권위"가 설 자리를 잃는다. 마지막 날들에는 "탈권위주의"가 "세상의 풍조"(엡 2:2)로 자리를 잡는다. 하나님께서 『아무도 너희를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주의하라.』(골 2:8)라고 경고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탈권위주의가 팽배하고 사람들이 그런 이념과 철학을 따를 수밖에 없는 원인은 권력자들의 불의와 억압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회적인 통념이지만, 이는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다. 완전무결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천년왕국이 끝나갈 무렵에도 그분의 권위와 통치에 반기를 드는 반역자들이 있음을 볼 때(계 20:8,9), 하나님께서 정하신 권위에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들이 "마귀의 자식들"이란 점에서 기인한다.

하나님께서는 권위와 질서를 세우시는 분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세는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롬 13:1). 어느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권세"(power)를 주실 때 "권위"(authority)를 가질 수 있다. 통치자의 권위는 그의 능력이 뛰어나고 권위를 지닐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의당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통치자의 권위에 복종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러한 권위를 주셨기 때문이다. 목자가 교회 안에서 영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이유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남자가 가정 내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그런 권위를 가진 자가 누구이든지 간에 통치자든, 목자든, 교사든, 남편이든, 부모든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복종해야 하는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내용 한 가지가 열왕기상 17장에 나온다. 아합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삼 년 반 동안 이스라엘을 기근으로 치신 적이 있는데, 당시 한 과부에게는 엘리야 선지자를 부양하라는 명령을, 엘리야에게는 사르밧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리셨다(왕상 17:9).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르밧으로 간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 약간의 물과 빵 한 조각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남을 대접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마지막 한 끼 분량의 음식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마지막 남은 한 줌의 가루와 기름으로 과자를 만들어 먹고 죽을 생각이었다. 이 말을 들은 엘리야는 그녀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야말로 "반인권적인" 지시를 내렸으니,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먼저 자신을 위해서" 과자를 만들어 오라고 했던 것이다. 현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대단한 "갑질 행위"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과부는 엘리야의 비인간적이고 반인권적인 명령에 순종했다. 문맥 어디를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과부에게 그에 관한 어떤 구체적인 내용도 미리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엘리야의 황당한 지시를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부는 하나님의 종의 권위에 순종했고, 그 결과 그녀와 아들은 주님의 능력으로 기근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의 입에서 나오는 명령이 어떤 권위를 지니고 있는지 잘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이 선지자는 왜 자기만 생각하는 거지? 나와 아들은 죽으라는 건가? 불쌍한 양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만은 살아야겠다는 것인가?'라는 식으로 인본주의적인 생각이 앞섰다면, 과부는 엘리야의 명령에 결코 순종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본주의적인 생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종의 권위에 복종하기를 선택했다. 반면에 주의 말씀으로 『내가 청하노니, 나를 치라.』라고 명령했던 선지자에게 복종하지 않은 사람은 죽고 말았다(왕상 20:35,36).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위에" 두신 권세자들에 대해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왜 우리를 그 사람의 권위 아래 넣어 주셨는지를 심사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최상의 것"을 주신다. 최상의 목자, 최상의 교사, 최상의 부모, 최상의 직장 상사, 최상의 배우자 등을 주시는 것이다. 때로는 이상하게 보이고, 때로는 까다롭게 느껴질지라도, 심지어 악하고 불의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주신 환경과 상황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카나안 땅에 일부 이방 민족들을 남겨 두신 목적 중 하나는 그분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었다(판 3:1-4).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권세에 복종하는지 지켜보신다. 불의한 권세자들에게 직접 앙갚음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에 맡겨 드리는지 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며, 그분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지도 보고 계신다. 세상 교육을 통해 배우고 체득한 인본주의적인 사고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많은 권위들이 있지만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유일무이한 "최종권위"인 성경이 있다. 말하자면 권위에도 "위계질서"가 있는 것이다. 거듭난 성도는 이 최종권위의 범위 내에서 모든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 결코 『다스림을 경시하고 권위 있는 자들을 비방하는』(유 1:8)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이스라엘에서는 이처럼 큰 믿음을 본 적이 없나니, 결코 없도다.』(마 8:10)라고 칭찬하셨던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의 권위에 복종했던 백부장이었다. 『오직 말씀만 하옵소서』(마 8:8). 『그러므로 한 말씀만 하옵소서』(눅 7:7).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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