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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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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1월호>
초림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자주 책망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의 소망』(렘 17:13)을 거부하고 천국을 닫아 버림으로써 그들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마 23:13). 주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독사들의 세대," "회칠한 무덤," "위선자"라고 하시면서 강하게 꾸짖으셨는데 그들이 실족할 정도였다(마 15:12).이들 종교지도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위선"이다. 겉보기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준수하고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분』(눅 24:21)을 점이나 흠이 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행세했지만, 실제로는 시기심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구속주』(사 49:7)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까지 했으니, 이보다 더 겉과 속이 다른 자들도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길 잃은 양들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지키라고 한 모든 말을 지키고 행하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경고하셨는데(마 23:3), 실로 그들은 입만 살아 있는 위선자들이었다.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은 죄인들을 "의의 길"로 돌이키게 하지는 않은 채 그들을 "경멸"하기에 바빴다. 바울은 주님의 의로운 길에서 돌아서게 만드는 자를 가리켜 『의의 원수』(행 13:10)라고 말했는데, 이처럼 종교지도자들은 "의의 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의의 수호자"라고 착각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이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으시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사람은 죄인들을 영접하여 함께 음식을 먹는다.』(눅 15:2)라고 하면서 불평한 적이 있었다. 자칭 "의의 수호자"라는 자들이 "의의 왕"이신 예수님을 죄인들과 어울려 다니기나 하는 "불의한 사람"으로 폄하했던 것이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5장에서 세 가지 비유, 곧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은전,"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로 응수하셨는데, 그중에서 이 마지막 비유가 바로 "탕자의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그의 큰 죄악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자비로 아들의 지위를 되찾게 된다. 그러나 이로 인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는데, 곧 이런 상황에 대해 "첫째 아들"이 불만을 품었던 것이다. 수년 동안 곁에서 아버지를 섬기고 복종한 자신을 위해서는 잔치 한 번 베풀어 주지 않았다가 방탕하게 살다가 돌아온 동생에게 잔치를 베풀어 줬다는 사실이 불만의 주된 이유였다.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는 이런 첫째 아들의 불만이 정당해 보일는지 모른다. 만일 아버지가 돌아온 동생을 징계하면서 "네 형 좀 보고, 형 반만큼이라도 닮아라!"라고 하며 꾸짖고 책망했다면 첫째 아들은 매우 만족해했을 것이다. 그것이 첫째 아들이 구상한 이상적인 그림이었으니, 한마디로 아버지의 그런 처사가 너무나 "불공평"해 보였던 것이다.
첫째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악하게 여겨졌다. 이런 마음은 마태복음 20:1-16의 "포도원 일꾼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침 일찍부터 일한 일꾼들의 마음과 유사하다. 그 일꾼들에게도 집주인의 자비와 선함이 악하게 보였다.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 의"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많이 일했는데, 내가 더 많이 수고했는데, 내가 더 잘났는데, 내가 더 의로운데, 이렇게 똑같은 취급을 받다니..." 이처럼 자기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은연중에 그런 불평과 불만을 드러냈던 것이다.
첫째 아들은 자신의 수고와 봉사에 대해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이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러한가? 사실상 그도 연약한 "인간"이다. 말하자면 그 역시 죄인인 것이다. 악인은 지옥으로 돌려지게 되어 있다!(시 9:17) 인간의 의는 "더러운 걸레"에 불과하다(사 64:6). 이 더러운 의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죄를 담당해 주신 것이다. 더 나아가 구원받은 우리를 위해 유업도 약속해 주셨다. 우리가 받은 구원과 유업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우리의 삶 전체를 온전히 드린다 해도 그 섬김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결코 뛰어넘지 못한다. 바울은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언가 되는 줄로 생각하면 그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갈 6:3)라고 말했다. 내가 실제로 무언가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진짜 무엇이나 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인간은 누구나 "지옥의 대기자"일 뿐이다. 자신이 일만 달란트 빚진 종보다 "조금은" 나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종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측정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하는 등 현명하지 못한(고후 10:12)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결국은 마귀의 공격에 쓰러지게 되어 있다. 첫째 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불만의 쓴 뿌리가 자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무익한 종들이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눅 17:10).
그런데 첫째 아들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누가복음 15:12에는 『그 아버지가 자기 살림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곧 첫째 아들도 이미 유업을 받은 상태였기에 그 유업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송아지를 먹고 싶으면 먹을 수 있었고, 좋은 옷을 입고 싶으면 사서 입을 수 있었다. 가락지이든 좋은 신발이든 그것들을 누리는 데 있어서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부와 자유를 전혀 향유하지 못한 채 일만 해 왔다. 다시 말해 종교적인 의무와 법문에만 얽매여 아버지께서 주신 좋은 것들을 자유롭게 향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진정한 의미는 모른 채 종교 의식만을 중요하게 여긴 종교지도자들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나는 자비를 원하고 희생제를 원치 아니하느니라.』(마 9:13)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모습은 현 교회 시대에 『하나님의 가족』(엡 2:19)이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복들을 향유하지 못하며 사는 성도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장차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행위와 섬김에 근거하여 셋째 하늘에서 상급과 유업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받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주님께서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갈 3:11, 히 10:38)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는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 "지옥의 형벌"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사"라는 중책도 맡겨졌다.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받게 될 현실적인 보상들도 성경의 기록을 통해 보장해 주셨다.
비록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세상살이가 다소 힘들거나 주님을 위해 받는 고난과 박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를 위해 훨씬 뛰어난 영원한 영광의 비중을 이루어 갈 뿐이다(고후 4:17). 우리가 당하는 시험들조차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들로서 우리의 연단과 훈련을 위한 것들이다. 설령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당한다 해도 주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까지 마련해 주신다(고전 10:13). 특히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 사실이 그러하다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도대체 왜 『이 세상 염려들과 재물의 속임수와 다른 일들에 대한 욕심』(막 4:19)에 억눌려서 살고 있는 것인가?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막 12:30)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또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시 17:15) 기뻐할 수 있다면(합 3:17,18), 매 순간 직면하는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라는 명령이 얼마나 쉽게 다가오겠는가! 하나님께서 현 생애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복들이 비단 이것뿐이겠는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아버지께서 주시는 복들을 향유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이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업을 누리지 못한 모습은, 그리스도인이 "믿음 없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신 복들을 누리지 못한 채 현 생애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런 복들을 누리지 못했으니, 장차 예수님을 만난 자리에서 "주님,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실로 고통뿐이었습니다."라는 씁쓸한 고백만 할 것인가? "보소서, 수년 동안 내가 아버지를 섬겼으나 아버지께서는 내게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시지 않았습니다."(눅 15:29)라는 불평만 늘어놓을 것인가? 이렇듯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골 2:3)를 갖고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어리석음에 얽매여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항상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결국 이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에게는 "문제아"인 두 아들이 있었던 것인데, 누가 봐도 문제아였던 둘째 아들은 다시 돌아왔고, 누가 봐도 모범생이었던 첫째 아들은 "자기 의"와 "믿음 없음"으로 인해 불평만 쏟아 놓고 잔치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비유는 마무리되고 있다. "아버지의 기쁨"은 결코 첫째 아들의 기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쁨"만이 첫째 아들의 기쁨이어야 했고, "아버지의 슬픔"만이 첫째 아들의 슬픔이어야 했다. 즉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그 역시 사랑하고 기뻐해야 했으며, 아버지께서 미워하시고 슬퍼하시는 것을 그 역시 미워하고 슬퍼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이다.
물론 첫째 아들처럼 법문을 내세워서 법문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를 가려내고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합법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것에 관한 올바른 지침을 제시해 주고 있는데, 아무리 어떤 것이 합법적일지라도 그것이 유익해야 하고, 어떤 권세에도 얽매이지 않으며(고전 6:12), 서로를 세워 줄 수 있는(고전 10:23)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합법적인 방법으로 우리 지체들에게 성경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 있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죄인들을 향해 지옥과 저주를 선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합법적인 행동의 기저에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과 은혜와 자비"는 없고 오직 "자기 의와 종교적인 의식"만 깔려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도 끼치지 못한 채 지체들을 실족시키거나 죄인들을 좌절시키고 분노하게만 할 뿐이다.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또 잃어버렸다가 찾았음이라』(눅 15:24).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진정한 기쁨"이다.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병든 사람들에게는 필요하니라.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들을 불러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왔노라』(막 2:17). 하나님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긴다고 하면서도 그러한 아버지의 기쁨을 동기로 삼지 않는 성도가 있다면, 그는 지금 첫째 아들처럼 위선자로 살고 있는 것이다. 진정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고 있는가? "위선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고(욥 36:13), 이웃을 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잠 11:9) 사실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