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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로교의 고민, 장로가 목사를 안수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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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4월호>
지난 2월 7일자 <기독공보>에는 ‘목사안수, 장로참여 바람직한가?’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지난 2007년 3월 12일에도 이 문제가 이슈가 된 일이 있었다. 군산동부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군산노회 춘계 정기노회에서 장로 노회장의 목사 안수권 문제로 극심한 내부 갈등을 겪으며 노회가 파행될 위기에 처하는 일이 발생했었다. 이 문제는 한국 장로교회 안에 고질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즉 하나의 현상적인 갈등이 아니라 제도적인 모순과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양편의 주장을 들어보자.
먼저 한국 장로교의 한 장로의 주장이다.
“이러다가 현대 통합된 미국 장로교 헌법같이 장로의 종류에 설교장로(목사)와 치리장로(장로)의 규정까지 삭제함으로 장로와 목사와의 관계에 있어서 목사독자설의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까 염려된다.”
“현행 헌법상 목사 장로 관계는 1 협력동등관계-치리권 행사(정치25조), 행정과 권징 관장(정치39조), 2 종속 순종관계-정치, 행정, 권징을 제외한 지교회의 목회, 목양, 3 독자 독립관계-노회, 총회, 협력기관의 활동으로 그 관계를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이런 논지에서 노회에서의 장로 목사와의 관계는 독자독립의 관계이므로 목사임직 안수식에 장로 참여는 타당하다.”
이번에는 한국 장로교의 한 목사의 반대 주장을 들어보자.
“그러므로 개혁교회 전통을 이어가는 한국장로교회의 목사 임직에 장로가 안수할 수 있는가는 스코틀랜드 정통 장로교회의 결론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장로교 시초라 할 수 있는 칼빈은 디모데전서 5:17을 ‘모든 장로들이 말씀을 가르치도록 안수 받지않았기 때문에, 두 종류의 장로를 두었다.’라고 주해하고, 안수는 반드시 목사만 행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1)
미국 장로교나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규약이나 존 칼빈의 해석 등의 인간적인 전통은 제쳐놓고 바른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살펴봐야 한다. 한국 장로교회의 장로의 목사안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원인들에서 발생하였다.
먼저, 근원적인 문제부터 짚어보자. 바로 존 칼빈의 잘못된 사적 해석의 문제다. 존 칼빈의 사적 해석을 보기 전에 성경이 말씀하는 그대로를 보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사람으로 여기되 특별히 말씀과 교리에 수고하는 이들에게 그리할지니라』(딤전 5:17). 본문은 다스리는 장로들과 설교하는 장로들이 분리되어 있는데, 그중 설교하는 장로들을 더욱 존경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있는 그대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영적으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중 특히나 말씀과 교리에 수고하는 자들을 더욱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존 칼빈은 이렇게 해석한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당시에 두 종류의 장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모든 장로가 가르치도록 안수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명예롭게 잘 다스리는 자들이 있었지만 교사들의 직분을 가진 것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전 세계 장로교회의 장로직이라는 것이 존 칼빈의 이와 같은 사적 해석을 기반으로 파생된 것이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지역 교회에서 교회 정치에만 참여하고 설교하지 않는 장로는 없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성경의 어떤 예언도 사사로운 해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벧후 1:20).
그러면 장로는 무엇이며 목사는 어떤 직분인가? 성경은 장로는 하나님의 교회 곧 하나님의 양무리를 먹이는 감독자를 말하며(행 20:17,28), 감독은 하나님의 교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이며(딤전 3:1-4, 엡 4:11), 목사가 바로 지역 교회를 다스리는 장로이다(엡 4:11, 벧전 5:1-4). 신약성경은 이 용어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쳐 하나님의 양무리를 먹이고 영적 권위로 다스리는 하나님께서 선정하신 일꾼의 의미로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고 먹인다는 의미가 강하며(엡 4:11, 요 10:11), 감독은 하나님의 교회를 살피고 관장한다는 의미를 함의하고(행 20:28), 장로는 믿음의 성숙과 권위가 강조된 용어이다(벧전 5:5).
존 칼빈이 목사와 장로를 분리하여 “장로”라는 별도의 직분을 두게 된 것은 칼빈이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을 대체했다는 무천년주의를 견지했기 때문이다. 존 칼빈은 제네바에서 신정통치 국가를 건설하려 했으며, 따라서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장로들을 둬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 사람의 오류가 한 종파의 신앙과 실행을 수백 년간 왜곡시켜 온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전수한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기하느니라. 또 이와 같은 많은 일을 자행하고 있도다』(막 7:13).
또한 장로의 목사안수 문제는 성경의 사적 해석만큼이나 심각한 실제적인 원인이 있다. 그것은 교회내의 장로와 목사 사이에 빈번히 나타나는 알력이다. 이 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수 없는 것은 존 칼빈이 디모데전서 5:17을 사적 해석한 것을 채택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비성경적인 권위가 그들 교회 안에 활동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부르시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도 않은 자들이 장로라는 감투를 쓰고 교회 내에서 권력을 행사하게 만든 것이다. 문제가 더 어렵게 된 것은 성경 대로 영적 권위를 행사하여 그들의 교회를 다스려야 할 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운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장로교회에서 목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 아니라 교단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험에 통과한 자들로 그들의 교단이 인준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영적 권위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장로교의 장로와 목사와의 알력은 신학교를 다니지 않은 니콜라파와 신학교를 다닌 니콜라파 사이의 대결인 것이다. 『그리고 네게 역시 니콜라파의 교리를 지키는 자들도 있도다.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계 2:15).
그리하여 급기야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는 장로 교회의 장로들이 노회 차원에서 목사들에게 안수를 준다고까지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육신적인 권위가 영적 권위를 지배하는 행태가 된 것이다. 이것은 존 칼빈을 추종하였기 때문에 장로교회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라오디케아 시대의 병폐이다. 『그때 그들 사이에 한 논쟁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자기들 중에서 누가 가장 큰 자인가 함이라』(눅 9:46).
오늘날 의 장로교회의 비성경적인 장로 직분과 목사의 권위를 둘러싼 병폐는 존 칼빈의 성경 해석과 장로 제도가 비성경적임을 드러내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장로교회에게 대안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한국 장로교가 입으로만 고백하는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바른 성경과 건전한 교리들로 성도들을 가르치며, 칼빈의 오류들을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세우지도 않은 육신적인 자들이 나와서 장로인 자신들이 아니면 목사들이 독재할 거라고 변명하지 못할 것이다. 성도들도 자신이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고, 목사가 마땅히 어떻게 지역 교회를 섬겨야 하는지 정확히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목사들도 성도들이 바른 성경과 바른 지식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더욱 성경적인 원리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지역 교회를 섬기도록 진력할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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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장로신문>, 2009년 3월 14일자, 제16면, “목사안수의 장로참여에 대하여” (경북노회 노회장, 이성웅 장로 / 장위중앙교회, 김학수 목사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