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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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되는 이슬람의 포교를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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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12월호>

지금 한국 교회는 아프간 선교 때문에 교계 내외에서 호된 질책을 받고 있는데, 게다가 아프간에서 온 유학생 하나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사건이 또 하나 발생했다. 바로 한동대학교에 유학 온 ‘아브라함 헤이크마툴라 나페’(22세)라고 하는 무슬림이 온 학교를 돌아다니며 이슬람을 선전하고 다니는 것이다. 한동대학교(총장 김영길)라면 이름뿐인 기존 기독교 대학들과 달리, 철저한 기독교 정신으로 교육시킨다는 기독교 사학의 모델로 손꼽히는 대학이다. 그런데 그런 기독교 대학에 무슬림 학생 하나가 유학오더니, 여기저기 이슬람 교리를 전파하고 다니고, 심지어 기도실에서도 십자가를 떼고 메카를 향해 절하는 풍경을 연출하기까지 했다 한다. 여기에 학생들은 물론 교수들도 대항하지 못하고, 학교 당국은 “기독교신앙에 입각한 학풍을 존중해 달라.”고 개인적인 권고를 해주었을 뿐이다(크리스천투데이, 2007.11.17).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의 영향은 매우 크다. 끔찍한 테러와, 인질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등, 잔악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슬람은 사람들 사이에 “좋은 종교”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고, 더욱이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례까지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악을 행한 자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나, 오히려 그들이 더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의 신이 마귀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살인한 자가 동정을 받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만 바보 취급 당하는 것 역시 동일한 경우 아닌가? 이쯤 되면 “악을 행한 자들은 번영한다.”는 사악한 논리가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다. 살인자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사형제도는 폐지되고, 동성연애자들은 아무리 추악한 짓을 해도 “성적 소수자의 인권”을 고려해서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되며, 테러리스트들은 보란 듯이 막대한 자금을 획득해 간다. 얼마 전까지 아프간 사태로 고생했던 교인들로서는, 한 명의 아프간 무슬림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흥분하기에 충분하다. (아닌게아니라 이에 대한 인터넷 기사에는 수십 건에 달하는 리플이 올라와 있다.) 하지만 흥분하면 무엇하는가? 그들은 이 22살의 무슬림 대학생 하나 휘어잡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 아마 이 학생을 한기총이나 KNCC에 데려다 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슬람이 얼마나 사악한 종교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무슬림을 만나서 대화해 보면 그들에게 설득당하거나 적어도 호의적으로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가 관용과 사랑의 종교임을 꾸준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러 같은 일들은 극단적 원리주의자들이나 하는 것이지, 코란의 가르침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슬람교는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면 확장되었지 줄어들지 않는다.

최근 무슬림들은 전 세계를 이슬람화하기 위한 전략을 내놓았다. 특히 “세계이슬람화”를 위해 그들이 전진기지로 택한 나라는, 유럽에서는 영국, 아시아에서는 한국이다. 런던에는 1962년만 해도 모스크가 1개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644개의 모스크가 있으며, 서울에는 6개의 모스크가 있고 3-4년 뒤에는 20여 개가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현재 세계적으로 이슬람은 200% 가량의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우리 나라에도 10만 명 정도의 무슬림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1만 3천 명 정도가 이슬람 선교사라 한다. 이슬람권에서 한국이나 미국으로 파송하는 “선교사”들은, 이미 한국이나 미국에서 이슬람권으로 파송하는 기독교 선교사들의 수를 능가했다 한다. 그들의 목표에 따르면 2020년까지 한국을 이슬람화시키고, 2080년까지 전 세계를 이슬람화시킬 것이다(목회자신문, 2007.10.24).
이슬람교의 “선교”는 크게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지하드”(Jihad)라 불리는 칼에 의한 전파다. 둘째는 상업 활동을 통한 전파다. 셋째는 사회 각계 각층에서 제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 의한 노력으로 전파되는 것이다. 이 중 상업 활동을 통한 전파는 동남아시아 등 아랍권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나타난 현상인데, 10-12세기에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활동한 이슬람 상인들에 의해 그 진귀한 물건들과 함께 전파되었다.
사회 각계 각층에서 활동중인 “선교사”들의 노력은 현대에 특히 많이 부각되고 있는 포교 방식이다. 이들은 학문과 문화 등의 영역에서 이슬람을 선전한다. 이슬람을 거부감 없는 종교로 만들고 오히려 관심을 끌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세력이 적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공산주의나 카톨릭이 그랬듯이, 이들은 자기들의 세력이 약할 때는 평화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웃음을 보이나, 일단 그들의 세력이 강하게 되면 “칼에 의한 포교”의 형태로 돌변하게 된다. 일례로 서방 기독교 사회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있어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가능하지만, 이슬람권 내에서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이 없다. 그것은 법으로 금해져 있으며, 따라서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런데 최근 노르웨이에서 이례적인 일이 생겼다. 지난달 22일 노르웨이의 이슬람위원회와 기독교 국제위원회 및 기타 종교대표들이 “개종 지지 선언문”에 서명한 것이다. 이 선언문은 개종의 권리를 인정하고 지지한다는 선언문인데, 무슬림들이 개종을 인정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이는 그들 사회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그들의 관용이 드러나는 좋은 사례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속으면 안 된다. 그들이 개종을 인정한다고 말했다는 것 자체가, 그동안 개종을 금지해 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의 이슬람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의 결정이 세계 이슬람의 결정이 아닌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노르웨이는 460만 명의 인구 중 약 86%가 기독교인이며, 7만 2천 명, 즉 전체 인구의 1.8%만이 무슬림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거래”를 할 만하지 않은가? 만약 인구 비율이 반대였어도 그런 선언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없을 것이다. 이슬람 국가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한 번 무슬림은 영원한 무슬림이 되어야 한다.
이슬람의 포교 중 으뜸은 아무래도 칼에 의한 포교이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 이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애써 부정하지만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진실이다.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난 시대는 초기 정복 시대(7-8세기)였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한 이슬람교(630)는 불과 한 세기 남짓 되는 기간 동안 페르시아와 중앙 아시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를 모두 차지했다. 혹자는 “칼에 의한 포교”는 초기 때 한정된 것이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때 정복한 지역이 현재 이슬람 지역의 대다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도는 16세기에 이슬람화가 되었는데, 이 역시 “칼”에 의한 포교로 이루어졌다.
다음은 코란에서 말하는 바, 칼에 의한 포교, 즉 “지하드”를 명하는 구절들이다. “믿지 않는 자들과 서로 접전할 때, 그들의 목을 쳐라. 너희들이 많은 사람을 살해해 버렸으면 다음에는 묶어라. 싸움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까지 자유롭게 해주거나 속죄를 시키거나 하면 된다. 만일 알라께서 바라신다면 그대 혼자서도 그들에게 복수하실 수 있으시다”(수라 47:4). “다신교도를 발견하는 즉시 죽여라. 잡아라. 억류하라. 모든 길에 복병을 두고 기다려라”(수라 9:5).
이슬람 교도들은 지하드를 “마음속에서의 싸움,” “대적들과 대화로 싸움” 등의 의미, 말하자면 “영적 전쟁”의 의미라고 말하지만, 앞에서 제시한 구절들은 분명한 문자적 전쟁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문자적 지하드를 권장하는 구절은 160구절 정도나 된다.
만약 개종하지 않는 이교도들이 너무 많아 다 죽일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대신 세금을 내게 한다. 이를 “인두세”(Jizya)라 하는데, 비이슬람인이라면 누구나 내야 하는 세금으로, 그 액수 또한 과중하였다. “알라와 종말의 날을 믿으려 하지 않고 알라와 사도가 금한 것을 금하지 않고 참된 종교를 믿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스스로 자기를 낮추며 자발적으로 인두세를 바칠 때까지 싸우라”(수라 9:29). 결국 이슬람을 믿지 않는 자는 칼로 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믿은 무슬림은 절대로 믿음을 포기하지 못하게 한다. 칼로써 억압함으로써 말이다. 결국 이슬람 “선교”의 주된 도구는 “칼”이다. 현재 이슬람이 얼마나 부드럽고 겸손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해도 절대 속으면 안 된다. 아무리 테러를 저지른다고 해도, 그들도 종교인 이상 선행과 도덕은 말하기 마련이다. 오히려 그들은 선행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철저한 행위구원론자들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선행과 친절에 속으면 안 된다. 그것은 그들 종교를 선전하기 위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앞에서 경고받은 바, 한국이 이슬람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기독교가 세상의 미움이 되고 있는 상황 가운데 이슬람교의 침투는 매우 효과적일 것이다. 당장은 우리 주변에 무슬림이 접촉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해도, 그들이 급속히 성장한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언제 우리에게 다가올지 모른다. 지난번 아프간 사태에서 경험했듯이, 우리 나라 수많은 국민들은 기독교의 “공격적인 선교”를 비판하면서, 역으로 이슬람에 상당한 호의를 갖고 있다(본지 187호, 특집 「한국 교회 선교 위기, 당연한 귀결」 참조).
종교개혁 이후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가 도래했을 때, 세계적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고 많은 후천년주의 신학자들은 머지않아 이슬람이 무너질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정반대로 이슬람은 그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마귀는 마지막 때가 가까이 올수록 자기가 부리는 종교를 더욱 이용할 것이다. 이슬람교는 이 마지막 때에 로마카톨릭과 함께 마귀의 주요 종교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더 진리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이슬람이 어떤 종교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코란을 연구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한동대 학생들과 교수들이 그 무슬림 학생을 이기지 못한 것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그들의 문화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을 몰랐기 때문이다. 성경의 절대성을 믿고, 그 말씀 안에서 충분한 영적 지식을 갖는다면 어떤 악한 이론을 만날지라도 대처할 수 있다. 『악한 자의 모든 불붙은 화살을 끌 수』(엡 6:16) 있으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옷밖에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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