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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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주지 못하는 주재용 소장의 신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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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3월호>

지난 130여 년 동안 한국 기독교가 비정상적인 성장을 해 온 원인 중 하나로 “바른 신학”의 부재를 꼽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바른 성경도, 바른 교리도, 바른 신학도 없었던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바른 성경과 이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 있어야 바른 교리와 신학을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할진대, 여전히 한국 교회들은 이런 사실을 무시한 채 오늘날까지도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이 나라 기독교계 지도자들에게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바른 신학”을 제시하지 못한 책임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신학의 정도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할 사람들이 온갖 교단과 신학교 내에서 비성경적인 누룩들만을 양산하고 퍼트려 모든 교인들을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한 기독교 주간지1) 에서는 ‘경건과신학연구소’의 주재용 소장과 가졌던 특별대담 내용을 기사로 실은 적이 있었다. 요는 오늘날 정체된 한국 신학의 원인을 짚어보고 한국 신학의 흐름과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주재용 소장은 ‘민족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신학이 필요하다’는 말로 마무리했는데, 사실 그가 제시한 신학의 방향은 너무도 성경적인 신학과는 동떨어져 있는지라, 민족에게 희망을 주기는커녕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파선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우선, 그는 신학이 “시대의 산물”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현 한국 신학의 흐름에 관한 질문에 대해, 그는 “7,80년대 신학이 사회와 호흡하면서 시대의 문제를 치열하게 논쟁했던 과거의 모습과 비교해 보건대, 오늘날의 신학에서는 커다란 이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체되어 있다.”고 답변했다. “신학은... 시대정신, 시대의 이슈에 따라 변하게 된다.” 그의 주장이다. 신학은 단순히 어떤 사회의 시대적인 흐름과 현상을 다루고 분석하여 그 시대의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일반 사회학과 같은 인간적인 학문이 아니다. 절대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공부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영원한 섭리와 계획은 무엇이며 그것이 각 시대마다 어떻게 전개되어 가고 있는지, 그에 따른 인간의 다루심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연구하고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 앞에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역사를 겸허히 인정하고 앞으로 나타날 그분의 역사도 겸손한 자세로 기다리게 된다. 신학은, 이미 나타났고 앞으로 나타나게 될 하나님의 역사를 시대정신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또 성령께서 기록하시고 성령께서 해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시대정신에 맞추어 인간적인 방법으로 재해석하여 사회를 위해 무언가 공헌할 점을 찾아나서는 것도 아니다.
신학이 시대정신에 따라 그 흐름도 바뀌어야 한다는 그의 논리는 교리에 대한 그의 잘못된 관조와 맞물려 있다. 몇 년 전 한 인터뷰에서, ‘교리는 절대적인 것인가, 상대적인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교리는 그 자체를 절대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논리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문제에 부딪히면서 그것들을 설명하려다 보니 탄생한 것들이 교리들이다... 교리는 가변적인 것으로 얼마든지 변경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성경이 기록된 “첫 번째 목적”은 교리를 위해서이지 그에 따른 신앙생활이 아니다. 즉 성경에 이미 성경적인 교리가 제시되었고, 그에 따라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해 나가게 된다. 따라서 먼저 올바른 교리가 정립되었을 때만이 신앙생활에서 드러나는 잘못들을 책망하고 바로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성경의 올바른 교리적 기반 위에서 성도의 바른 실행이 전개되는 법이다. 교리는 결코 그의 주장처럼 ‘신앙생활을 하다가 문제에 부딪히면서 그것들을 설명하려다 보니 탄생한 인간적 사고의 부산물들’이 아니다. 신앙생활에 드러난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들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 것들은 인간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들일 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주재용 소장은 니케아신조나 사도 신조 따위의 인간적 전통의 교리들을 거론하면서 그런 것들이 마치 성경적 교리인 양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신앙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문제들을 설명하기 위해 교리들이 탄생한 것이라는 잘못된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비성경적인 신조 따위를 성경이 말하는 건전한 교리로 수용한다면, 교리는 가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적 전통에서 비롯된 비성경적인 이단 교리들은 가변적일는지 몰라도, “성경적인 교리”는 절대로 가변적인 것이 아니다(다만 교리가 적용되는 시기와 대상이 다를 뿐이다). 만일 교리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해야 한다면 성도들은 누가 올바른 교리에 따라 바른 실행을 하고 있는지 분별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이 마지막 때 이단 교리가 득세하고 교리적 혼란이 더 극심한 것은 다 이런 분별없는 주장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상대적인 진리를 따라 어떤 바른 기준도 없이 혼란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바른 교리가 없고 교리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면 올바른 기준 신학을 정립할 수가 없게 된다.
‘신학이 시대의 산물’이라는 그의 어리석은 사고방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현대 신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앞으로의 시대적 관심은 웰빙(well-being), 굿빙(good-being), 행복추구가 될 것이다. 이것은 세계적, 민족적인 관심인 동시에 개인적인 관심이며 특히 노령화사회의 시대적 관심이 될 것이다. 지구의 온도 상승, 극빈 인구의 증가, 생태계의 파괴 등도 이와 관련이 된다... 앞으로 신학은 건전한 행복추구, 건전한 웰빙문화 형성을 위해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고가 오늘날 기독교계 지도자들의 사고방식을 대변하고 신학교들이 이에 따라 가르치고 있다면 이 나라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사람들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 이런 것인가? 성경을 정상적으로 읽고 믿는 사람이라면 신학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그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신학의 기본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일진대, 성경 어디에도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볼 수가 없다. 대담 내용 어디를 보더라도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성경 구절이 제시되지도 않는다. 오직 그의 관심은 “시대정신”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에 관심조차 두지 않으신다. 그런 것들은 이 시대의 관심이나 인간들의 관심사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어야 할 신학은 인간의 호감을 사기 위해 그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갈 1:10). 오직 이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롬 4:3), 그 예언의 말씀에 주의하는 쪽(벧후 1:19)으로 방향을 두어야 한다. 그 방향을 따라가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오는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는 말씀에 대해 시대적인 재해석이나 인간적인 재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 신학의 흐름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연구하고 믿는 데 두어야 하는 것이다.
주재용 소장은 또 오늘날 ‘한국 신학의 정체 이유’에 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것의 가장 큰 이유 중 첫째는 한국 교회가 보수화되고 있고, 둘째는 신학자들이 신학교육에 대한 열정적 사명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보수화되고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한국 교회가 성경적인 관점을 고수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현재적으로 재해석하지 못하고, 신학의 흐름을 시대의 흐름에 맞게 바꾸어 나가지 못하는 현실을 두고 한 말일 뿐이다. 그러나 전자, 후자 모두 올바른 견해는 아니다. 이는 먼저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성경적인 관점을 고수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랬다면 샤머니즘과 같은 은사주의 운동이 오늘날처럼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이해 사람들은 부흥을 꿈꾸고 있지만, 그 부흥운동은 샤머니즘 요소를 기반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입으로는 ‘회개운동이다,’ ‘성령운동이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교리적 기반은 은사주의 이단 교리에 두고 있는 것이다. ‘평양대부흥’ 은 결코 성경적인 부흥이 아니었다.2) 그러나 주재용 소장은 이와 같은 운동에 바탕을 둔 민족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신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즉 ‘영성신학’이라든지 ‘성령신학’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영성신학이나 성령신학이나, 모두가 은사주의처럼 성경적인 믿음에서 이탈해 있기는 마찬가지다(지면상 그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논외로 하겠다). 이 모두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받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강력한 미혹일 뿐이다(살후 2:9-12). 또한 말씀을 현재적으로 재해석하는 문제도 성경적인 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이다(살전 2:13, 벧후 1:20,21).
그렇다면 신학자들이 신학교육에 대한 열정적 사명감이 줄었다는 것으로 한국 신학의 정체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열정이 예전보다 줄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열정이 있었다고 판단되는 지난날을 돌이켜 보건대 그러한 열정이 한국 신학의 발전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7,80년대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민중신학이나 토착신학을 신학의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런 신학은 성경과 무관할 뿐이다. ‘이 땅의 가난한 민중들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추구하고 이를 신학적으로 풀어내는’ 민중신학이나 ‘한국 고유의 샤머니즘과 공통분모를 찾아 신학화하는’ 토착신학이 과연 성경적 관점의 신학이란 말인가? 이처럼 과거에 있었다고 하는 그 열정조차도 비성경적인 한국 신학만을 양산해 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신학의 정체는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흐름이다. 열정이 있다 해도 지식에 따른 열정(롬 10:2)을 갖추고 있는 신학자들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오늘날의 현실인 것이다. 지식이라 함은 성경적인 지식을 말하는데, 바른 지식은 바른 성경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바른 신학 또한 마찬가지다. 바른 성경과 성경적 교리를 기반으로 하여 신학을 올바르게 전개해 나가야 하나, 변개된 성경과 거짓 교리를 붙들고 있는 오늘날에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민족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신학을 찾고 있는가? 한국 신학의 흐름과 방향을 올바르게 제시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바른 성경으로 돌아가라. 신학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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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리스챤신문, 제2205호, 2007.2.5.
2) 본지 177호 특집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오순절운동 100년의 역사,” 179호 특집 “한국 교회를 죽인 평양대부흥운동”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