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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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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11월호>
지난 호에서는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바른 성경을 올바로 꾸준히 공부하는 그리스도인만이 지속적인 영적 성장을 이루며, 온갖 교리의 풍조와 마귀의 역사에 속지 않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온전히 무장되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세상을 유혹하는 메시지, 프로그램, 행사, 운동 등으로 부흥을 꾀하지만, 진리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성경의 문자적 해석(Literal Interpretation)
성경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문자적 해석은 무엇인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며(딤후 3:16),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계시를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의 각 단어의 진실성을 믿을 수 있다(시 119:160, 잠 30:5). 따라서 문자적 해석이란 각 구절을 성경의 문맥과 문법에 따라 각 단어를 그 평이하고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해석함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대로를 의미하셨고, 또한 하나님께서 의미하신 그대로 말씀하셨다고 믿고 읽는 것이다. 성도가 해야 할 일이란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들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음이니, 이 말씀이 믿는 너희 가운데서도 효과적으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성경을 영어로 옮긴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강조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당신은 성경은 단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곧 문자적 의미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 문자적 의미가 다른 모든 것의 뿌리요 기반이며, 굳게 붙들면 결코 패하지 않는 닻이지만, 이 닻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벗어나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 문자적 의미를 떠난다면 길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잠언들, 비유들, 알레고리들과 같은 다른 수사법을 사용한다. 중요한 것은 그 잠언이나, 비유나, 알레고리가 의미하는 바 자체는 항상 문자적 의미이며, 바로 그것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틴데일이 말했듯이 문자적 해석이란 상징과 비유와 같은 성경의 수사법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수사법이 쓰이지 않은 곳은 있는 그대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문자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것은 어떤 수사법이 쓰였는지 살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문자적 해석이 올바로 확립될 때, 그 기초 위에 성경을 올바로 적용할 수 있다.
"언제, 누가, 누구에게"
성경을 문자적으로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킹제임스성경>의 전신들 중의 하나인 <커버데일성경>의 번역자인 마일즈 커버데일(Myles Coverdale, 1488-1569)은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독자 제위가 성경을 읽을 때 그 속에서 발설되었거나 기록된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뿐만 아니라, 누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인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 말씀들을 사용했는지, 언제, 어디서, 어떤 의도로, 어떤 상황에서 말하거나 기록한 말씀인지 주의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말씀 앞에 오는 내용과 그 말씀 뒤에 나오는 내용을 고려한다면, 성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좀 더 간단하게 세 가지 질문에만 유의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진리에서 어긋나지 않고, 성경의 바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곧 "언제 혹은 어떤 시대에 한 말씀인가?", "누가 이 말씀을 말하고 있는가?", "누구에게 이 말씀을 말하고 있는가?"이다. 이 세 가지 질문만 명심해도 수많은 사적 해석들과 거짓 교리들을 가려낼 수 있다. 바른 성경으로 이렇게 읽고 이해했더라면 이단들과 삯꾼들에게 기만당하고 그 믿음이 파괴당하는 사람들이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알기 위한 이 기본적인 질문들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거짓 교리들과 자의적인 사적 해석에 현혹되어 진리의 반대편에 서 있다.
한국 교회의 오용 사례
『네 시작은 미약하였어도 네 나중 끝은 크게 증대하리라』(욥 8:7). 이 구절은 한국 교회의 교인들이 다 알고 있는 구절이다. 그들이 소유한 사업체와 가게에 들어가 보면 이 구절을 액자로 만들어 걸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교인들은 언제, 누가, 누구에게, 왜 이 말씀을 했는지 생각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변개된 개역한글판으로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되어 있는데, 액자에는 "심히 창대하리라"는 부분을 대문짝만한 활자로 강조해 놓았다. 흡사 복을 기원하는 부적처럼 벽 정면에 잘 보이도록 걸어 놓는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교인들의 번영과 성공을 위한 말씀인 것인가?
이 말씀은 B.C. 1780년경에 하나님의 성도 욥이 시험을 받을 때에 욥의 친구 중 한 명인 수하인 빌닷이 욥이 죄인이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한 말로, 그 요지는 "네가 의인이라면 번성하지 이렇게 고난을 받겠느냐!"이다(욥 8:2-6). 그러나 이 말씀은 교회 시대에 해당하지 않는다. 교회 시대에는 물질적인 번영과 증대가 영적 성장이나 순종의 표시가 아니다(고후 11:27, 빌 4:12). 한국 교인들은 시대와 상황에 맞지도 않는 빌닷의 거짓 고소의 내용을 축복의 부적으로 걸어 놓은 것이다.
풍유적 해석을 배격하라
문자적 해석은 "풍유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 곧 영해의 반의어라고 생각하면 쉽다. 풍유적 해석은 한 본문을 읽을 때 읽히는 그대로의 평범한 의미를 무시하고 또 다른 의미를 그 본문 위에 덮어 씌우는 것을 말한다. 이 풍유적 해석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시작되었으며, 성경을 철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생겨났다. 이 풍유적 해석에서 거의 모든 거짓 교리와 사적 해석, 그릇된 신학 사상 등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사상이나 신학이 이미 확립되어 있는 자가 자신이 원하는 의미를 성경 말씀에 부여하는 방식이다. 이런 식의 해석이 한국 교회에도 만연하고 있다. 곧 성경에서 축복과 번영을 말하면 무조건 그것을 교인들에게 적용하는 설교 행태, 무천년주의식 예언 해석, 이단들이 퍼뜨리는 자의적인 "비유풀이"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풍유적 해석의 예
예를 들어 사무엘상 17:40을 보도록 하자. 『그가 손에 막대기를 들고 시냇가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서 자기가 갖고 있는 목자의 자루, 즉 여행자의 자루에 넣었으며, 손에 물매를 가지고 그 필리스티아인에게 다가가더라.』 이 말씀에서 이 『돌 다섯 개』는 실제 돌이 아닌 "믿음, 소망, 사랑, 기쁨, 화평"을 말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풍유적 해석이다. 그런데 혹자가 "나는 다섯 돌이 용기, 능력, 인내, 절제, 순종이라고 생각한다!"라고 가르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두 해석 모두 그것이 옳음을 증명할 수 없다. 이처럼 풍유적 해석은 성경 자체의 의미를 무시한 것이기 때문에, 해석자의 의견 외에 그 의미의 진실성을 보장해 줄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이 『돌 다섯 개』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B.C. 1063년경에 이스라엘의 목동이었던 다윗이 필리스티아인 전사 골리앗과 대결하기 전에 물매에 쓰기 위해 시냇가에서 취한, 문자 그대로의 "돌들"이다. 다윗은 그 다섯 개를 다 쓰지 않고 단 하나의 돌만을 써서 거인 골리앗의 머리에 던졌고, 골리앗은 그 돌이 이마에 박혀서 죽었다(삼상 17:49,50).
풍유적 해석의 폐해
풍유적 해석의 폐해는 성경의 예언을 해석할 때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루터, 쯔빙글리, 칼빈 등 모든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그들 나름의 문자적 해석,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주창하면서 로마카톨릭의 풍유적 해석을 배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언에 있어서만큼은 로마카톨릭의 풍유적 해석을 답습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지금도 구약에서 "야곱," "이스라엘," "유다," "시온," "예루살렘" 등의 회복과 축복을 말하는 부분을 교회에 대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이 일관된 문자적 해석인지, 또한 타당한 해석인지 자문해 보라.
1) 그들은 출애굽할 당시 이집트에 내리셨던 재앙들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만(출 7-12장), 계시록에서 대환란에 있을 재앙들에 대해서는 풍유적으로 해석한다(계 4-19장).
2) 구약에서 이스라엘 각 지파를 계수한 본문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로 해석하지만(민 1장), 대환란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각각에서 인장으로 표시를 받은 144,000명은 실제 열두 지파가 아니라고 풍유적으로 해석한다(계 7:4-8). (이렇게 풍유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사적 해석들이 난무하고, 이단들마다 제각기 자신들이 영적으로 "144,000명"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3) 초림 때에 예수님께서 실제로 나귀를 타고 오신 것은 문자 그대로 믿는다고 하지만(슼 9:9, 마 21:7), 바로 다음 구절에서 재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쟁을 종식시키실 것이며 전 세계적인 평화를 이루실 것은 풍유적으로 해석한다(슼 9:10).
4) 구약성경에서 70년이나(렘 25:11) 400년(창 15:16)과 같은 기간은 문자적으로 믿지만, 앞으로 실제로 임할 주님의 왕국이 1,000년 동안 지속될 것임을 말할 때는 문자적인 1,000년의 의미를 거절하고 풍유적으로 해석한다(계 20:1-6).
5) 타락 전에 사람과 동물이 채식을 했다는 구절은 문자 그대로 믿는다고 하지만(창 1:29,30), 주님의 재림 후에 다시 동물들이 채식을 할 것이라는 말씀은 풍유적으로 해석한다(사 11:6-8).
6) 출애굽 이후의 성막(출 40장)과 솔로몬의 성전(왕상 5,6장)과 재건된 성전(스 3-6장)은 모두 문자적으로 해석하지만, 에스겔이 예언한 미래의 천년왕국의 성전은 풍유적으로 해석한다(겔 40-48장).
7) 마태복음 4:18에서 사람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믿지만, 미래의 왕국에서 사해가 변하여 살아 있는 물이 되고, 거기서 큰 물고기 떼가 살고 사람들이 낚시질할 것이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믿지 않고 풍유적으로 해석한다(겔 47:8-10).
8) 초림 때에 주님께서 문자 그대로 한 아이로 태어나셨음은 믿는다고 하면서(사 9:6a), 재림 때에 『정부』가 주님의 어깨 위에 있음과 그 정부와 화평의 증가함이 실제 다윗의 보좌와 주님의 왕국 위에 바르게 세워지되 끝이 없으리라는 말씀은 같은 구절 안에서 해석체계를 바꾸어 풍유적으로 해석한다(사 9:6b,7).
이런 식으로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자는 성경이 말씀하는 있는 그대로의 뜻을 부인하고, 실제적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모든 실제적인 예언들을 믿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는 실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르게 믿고 고대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러한 풍유적 해석은 두 가지 결과를 낳는데, 첫째, 그들의 믿음이 표류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의 예언들을 믿지도 바라지도 않는 사람들이 되게 만들고, 둘째, 문자적 의미를 배격했기 때문에 풍유적 해석으로 고안한 거짓 교리들의 물꼬를 텄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주신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어떤 해석도 정당화될 수 없다. 아무리 듣기 좋고, 경건하고, 그럴싸한 해석을 만들어 낸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불순종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리에 반대하는 또 하나의 인간의 전통을 만들어 내는 일이기 때문이다(막 7:7). B.C. 595년에 선지자 에스겔이 전달한 예언을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생각해 보라.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그들에게 지옥과 재림에 대해서 경고했지만, 그들은 에스겔이 선포한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상징"이나 "비유"를 말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격한 유대인들은 그 말씀의 엄중한 문자적 의미를 무시했던 것이다. 『그때 내가 말씀드리기를 "아, 주 하나님이여! 그들이 나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는 비유를 말하지 아니하는가?' 하나이다." 하였더라』(겔 20:49).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멸시하고 풍유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을 거절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반역임을 알아야 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