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영적 전쟁 분류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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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5월호>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에 관하여 R.A. 토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께서 오셨을 때, 그분께 들켜서 달갑지 않을 행위는 그 어떤 것도 하지 말라. 또 자신의 모습이 발견되기를 원치 않는 장소는 그 어디에도 가지 말라.” 성도는 성경적으로 마땅히 해야 할 옳은 일을 행하고 당연히 있어야 할 올바른 자리에 머무를 때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거룩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다. 세상에 미치는 영향으로는 빛과 같은 존재이고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이 땅에서는 순례자로 살아간다. 베드로전서 2:9에서는 『선택받은 세대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민족이요, 독특한 백성』이라 말씀한다. 베드로후서 1:4에 따르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타락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는 자』이다. 에베소서 2:6에서는 구원받은 사람의 영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천상에 앉아 있다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분이시고, 천상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거룩한 장소이다.
성도의 영적인 위치와 자리가 이와 같다면 지상에서 머물러야 할 곳 역시 “죄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해진다. 이러한 정체성을 상실하고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면 죄에 휩쓸려 이리저리 다니다가 종국에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본연의 자리를 이탈한 성도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이것은 타락한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셨던 첫 번째 질문이었다.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죄의 자리로 들어선 아담은 이 질문 앞에 자신의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낙원을 비롯하여 모든 최상의 복들을 상실했고, 이 땅은 저주를 받게 되었다.
아브라함 역시 머물러 있어야 할 자리로부터 이탈했다. 약속의 땅에서 벗어나 이집트(세상의 예표)로 내려갔던 것이다. 물론 그곳에 정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 “기거”하기 위해서였다(창 12:10). 기근이라는 인생의 시련을 피하고자 “잠시” 세상에 몸을 맡겼던 것이다. 하지만 기근을 피하고 얻은 대가는 매우 참담했다. 거짓말, 비겁함, 믿음 없음, 아내를 잃어버릴 위기, 간증의 상실, 세상 사람으로부터의 책망, 수치, 함족 여인(과 이스마엘) 등. 죄의 자리에 머물렀던 성도에게 또 다른 질문이 던져진다. 『네가... 행한 이 일이 어찌된 것이냐?』(창 12:18)
롯은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다. 소돔은 음행에 탐닉해 있었고(유 1:7) 교만과 탐심과 게으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겔 16:49). 성경은 그들을 “사악한 죄인들”이라고 말씀한다(창 13:13). 이 죄인들의 중심에 롯이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명예와 권세를 가져다 준 소돔을 사랑했다. 하나님께서 진노 가운데 불태워 버리실 세상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잃어버린 간증과 잿더미, 소금기둥이 된 아내, 술 취함, 딸들과의 근친상간 등이었다.
삼손은 데릴라의 무릎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는 나실인이자 재판관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죄의 욕망에 사로잡혀 살았다. 그는 데릴라가 힘의 출처를 알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짐작했을 법도 한데 그 출처를 알려달라고 “날마다” 조르고 사정하는 그녀의 요구를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릴라는 삼손을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했다 하더라도 진정한 사랑은 아니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고 있는 한 가지는 세상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그들의 쾌락과 정욕을 채워 주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러한 세상은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파멸로 이끌어 간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 사실을 알면서도 세상의 정욕을 단호하게 뿌리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결국 삼손은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우선 양 눈이 뽑혔는데, 이 눈은 그의 정욕이 시작된 곳이었다(판 14:1). 힘과 능력도 사라졌다. 하나님께서 간증을 잃어버린 성도의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겨 버리신 것이다. 그는 죽기 직전 필리스티아인 약 3천 명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마지막 기회”였을 뿐이다.
다윗은 어떠한가? 다윗은 전장에 나가 부하들과 함께 한창 전쟁을 치러야 할 시기에 태평하게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올바른 위치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 결말은 간음과 살인이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도망치는 길목의 배 아래층에서 잠들어 있었다. 본연의 자리를 벗어난 이 선지자에게 아브라함이 받았던 것과 비슷한 질문이 던져진다. 『오 잠자는 자여, 어찌된 일인가?』(욘 1:6) 결국 요나는 계속해서 아래로 추락했다. 먼저 욥파로 내려갔다(욘 1:3). 그리고 배 밑층으로(욘 1:5), 바다 속으로(욘 1:15), 물고기 뱃속으로(욘 1:17), 이윽고 지옥에까지 내려갔다(욘 2:2).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자리에 머문 대가로 지옥에까지 가지는 않지만, 현실에서 그런 지옥 같은 최악의 상태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로잡히시던 날, 베드로는 그분을 묶어서 끌고 온 경비병들과 함께 대제사장의 관저 마당에서 불을 쬐고 있었다. 피터 S. 럭크만 목사는 이 장면에 대해 설명하기를 “소위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들이 세상 죄인들 틈에 끼어서 그들과 함께 세상 정욕을 즐기며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나타내는 실감나는 그림”이라고 했다. 결국 베드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저주하고 맹세하며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쳐다보셨다. 주님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눅 22:61) 밖으로 나가 비통하게 울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더 있었다. 그것은 『네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네가 회심하게 되면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눅 22:32)는 주님의 말씀이었다.
이처럼 죄의 자리로 들어선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5:14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잠자는 자여 깨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
죄의 자리에서 일어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다시 행할 수 있다. 아담은 숨었던 곳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동물의 피를 흘려 마련하신 가죽옷을 입어야 했다.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 일어나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야 했다. 『네 길을 가라』(창 12:19). 속히 이집트를 빠져나가 처음 제단을 쌓았던 벧엘 근방으로 올라가야 했던 것이다.
롯 역시 일어나서 소돔을 나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늦게 일어나고 말았다. 그나마 일어났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잿더미 속에 파묻혔을 것이다. 삼손 역시 속히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 했지만 데릴라의 무릎에서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주님께로 돌이켰기에 죽기 직전 수많은 적들을 죽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다윗도 철저한 회개를 통해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주를 경배하는 위치로 돌아와야 했다(삼하 12:20). 요나도 철저한 회개 속에서 다시 일어나 주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했다. 『요나가 일어나서 주의 말씀에 따라 니느웨로 가니라』(욘 3:3). 베드로도 예수님의 약속대로 다시 일어나 주님을 따라가야만 했다. 『나를 따라오라』(요 21:19).
『네가 어디 있느냐?』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곳이 죄의 자리라면 일어나야 한다. 맥없이 처진 손과 쇠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히 12:12) 절뚝거리는 다리로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고 고침을 받으라!(히 12:13) 양심을 정결케 하여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라!(히 9:14) 그것만이 죄의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언제 일어날 것인가? “지금 당장” 일어나라! 결코 “내일”로 미루지 말라. 개구리와 하룻밤만 더 자기를 원했던(출 8:10) 어리석은 파라오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죄의 자리에 머물렀던 기간은 지난날의 생활로 충분하다(벧전 4:3). 지체할 시간이 더 이상 없다. 이는 지금이 우리가 믿었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훨씬 더 가까워졌기 때문이다(롬 13:11).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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