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분류
주의 일을 넘치게 한 F.B. 마이어
컨텐츠 정보
- 707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3월호>
중세 암흑시대의 어두움을 뚫고 진리의 빛이 밝아 오기 시작할 무렵(16,17세기),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와 "마틴 루터" 두 사람이 활동하고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보다 성경적인 교리에 더 밝은 인물이었지만, 사람들은 루터를 훨씬 더 많이 기억하고 회자한다. 이는 에라스무스의 믿음과 지식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생각"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으로 비대해진 머리에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겨올 능력이 없거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성도들을 진리의 지식에 이르게 하는 일에 게으른 사람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과 상관있는 사람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인, 특히 "그리스도인 사역자"는 수도원 같은 건물에 틀어박혀 앉아 "공부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처럼 항상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숙고하는 가운데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찾아서 수고하며 능력 있게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상당히 귀감이 되는 인물이 있었으니, 곧 영국의 침례교 목사이자 복음 전파자였던 "프레드릭 마이어"(Frederick Brotherton Meyer, 1847-1929)이다.1847년 4월 8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프레드릭 마이어는 행복하고 편안한 영적인 기독교 가정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신실한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으며, 아버지는 헌신한 그리스도인 사업가였지만 마이어가 15세였을 때 사업에 실패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금전 문제를 최대한 정직하게 처리하려 했고, 결국 재산은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마이어의 "금수저 인생"은 날아가고 말았지만, 후일 그는 이 일에 대해 감사했다. 이 일이 없었다면 마이어는 사례금 액수에 붙어 있는 "0"의 개수에 연연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액수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사례금을 돌려보낸 적이 두 번 이상 있었다.
프레드릭 마이어가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하기로 결심했을 무렵, "윌리엄 브록"(William Brock) 목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당시 브록은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최소 2년 동안을 런던에 있는 일반 회사 사무실에서 근무해 보라고 조언했다. 마이어는 그의 조언대로 "차(茶) 회사"에서 2년간 일했는데, 훗날 마이어는 후배 신학생들에게 이런 경험들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면서 이렇게 조언하곤 했다.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도시 생활'이라는 학교를 졸업하도록 하십시오. '인간의 본성'이라는 교과서도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청년들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들이 처해 있는 위험과 유혹에 대한 지식도 없다면, 청년들에게 설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마이어를 쓰시기 위해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환경들로 그의 날개를 꺾기도 하셨던 것이다. 그가 <고난의 선물>이라는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시라.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어떠한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고후 1:4).
마이어는 1869년에 리젠츠파크칼리지(1957년 옥스퍼드대학교에 귀속되었음)를 졸업한 뒤, 이듬해에는 리버풀에 있는 펨브룩침례교회에서 "찰스 비렐"(Charles M. Birrell) 목사를 돕는 사역자가 되었다. 마이어는 비렐 목사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웠는데, 심지어 자기에게 맞지 않는 습관까지 따라하려고 했다가 훗날 그것이 실수였음을 깨닫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 예배 후에 비렐 목사는 마이어가 평생 간직할 만한 교훈 하나를 그의 마음속에 새겨 주었다. "오늘 저녁 설교는 꽤 좋았네. 그런데 '주제 설교'이더군. 자네가 계속해서 주제 설교만 해 나가다 보면, 얼마 안 가서 주제가 고갈되는 현실에 직면할 것이네. 나는 자네가 지난 30년 동안 내가 해 왔던 방식으로 설교했으면 하네. '성경 강해자'가 되란 말일세. 그렇게 하면 언제든지 신선한 설교를 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강건한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걸세." 필자 역시 현재 재학 중인 『킹제임스성경신학교』에서 이와 동일한 내용을 배웠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설교에만 국한되는 내용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쓰실 일꾼을 찾으실 때,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특정 주제들에 성경을 끼워 맞추는 사람보다는 주님께서 의도하신 일들에 관심을 갖고 말씀을 주의하여 듣는 사람을 찾으신다. 『누가 주의 계획에 참여하여 그의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그의 말을 주의하여 들었느냐?』(렘 23:18) 성경을 읽을 때 자기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이나 주석서 내용 이외의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무한한 생명의 샘"인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한편 1871년에 결혼을 한 마이어는 1년 뒤에 요크 시로 이사했는데, 그로부터 2년 뒤 그곳에서 그의 삶을 바꾸어 놓은 또 한 명의 멘토,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를 만나게 된다. 언젠가 성령으로 충만한 무디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던 마이어는 행정상 어려운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회에서 무디가 설교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마이어는 당시 자신의 설교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허공을 치고 있었다!" 그가 무디를 만나기 전까지는 전통과 형식에 얽매여 설교의 본질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설교했던 무디는 마이어에게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죄인들을 주님께로 이겨와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훗날 그는 무디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단 한 번도 '회심자가 없는 설교'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찰스 비렐, 드와이트 무디와의 일화에서 엿볼 수 있듯이 마이어는 언제나 "겸손한 학생"이었다. 겸손한 성도는 항상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 주시하면서 그들로부터 배우고 성장하는 법이다. 『형제들아, 너희는 모두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으로 삼은 것같이 그렇게 행하는 자들을 주시하라』(빌 3:17). 이에 반해 "사탄의 종들," 곧 바리새인들,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운운하는 신학자들, 이 땅의 교단 목사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열심히 배워서 그들의 오류를 개선하거나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잃어버린 혼들을 이겨오지도 못하고, 진리의 지식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정작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초림 당시에 자신의 죄들을 인정하고 회개할 줄 알았던 "창녀들"(마 21:31)보다도 못한 자들이다!
이후 마이어는 레스터에 위치한 빅토리아로드침례교회의 설교 강단을 맡게 되었는데, 당시 이 교회는 오늘날 배교한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 시대의 전형인 대형 교회들과 "판박이"였다. 잃어버린 혼들을 위한 연민과 개척 정신이 투철했던 마이어의 설교가 "아무것도 부족한 것 없이 잘 살고 있던"(계 3:17) 기존 세력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음은 당연했다. 급기야 어느 주일 저녁 부유한 집사 하나가 마이어의 사무실로 쳐들어와서 복음과 관련된 설교를 집어치우라면서 항의했고, 이에 마이어는 즉시 사임했다(롬 16:17,18).
그 후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교회를 설립하려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로 마이어를 인도해 주셨다. 처음에는 "박물관 홀"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들 중 한 자매가 주일마다 아침 일찍 와서 그곳에 진열된 조각상들과 그림들을 덮는 수고를 해야 했다. 5개월이 지났을 무렵 그들은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충분한 규모가 되었고, 1881년 7월 2일에는 새로 세워진 건물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건물의 이름을 "멜버른 홀"이라고 지었는데, 지역 교회, 구제 활동, 주일학교 사역, 성경 교육 기관 등 그 용도가 다양했다. 그곳에서 마이어는 무디에게서 배운 대로 교회 바깥에 있는 수천 명의 죄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교회의 성도들은 마이어에게 사역을 하라고 시키면서 그저 돈만 내는 존재들이 아니었고, 직접 그와 함께 사역에 동참하면서 그의 짐을 덜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녀가 마이어에게 찾아와서 이제 곧 출소하게 될 아버지를 나쁜 친구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계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는 바람에 그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이를 계기로 출소자들의 행태를 보게 된 마이어는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다. 이는 그들이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술집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마이어는 지인들을 통해 "그들은 감옥에서 나오더라도 달리 갈 곳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교도관에게 가서 출소하는 죄수들을 자기가 데려가도 되는지를 물었다. 훗날 마이어는 이러한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혹시라도 죄수들이 그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지, 또는 동네 사람들이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을지 염려했었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러나 마이어는 멜버른 홀에서 사역하는 동안 약 5천 명의 출소자들에게 아침 식사를 제공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은 회심을 했다. 심지어 그들이 마땅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을 때, 유리창 닦는 일, 나무 자르는 일 등 여러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워렌 위어스비가 저술한 책 <50 People Every Christian Should Know,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50명의 믿음의 사람들>에는 마이어의 이런 점에 관하여 "전혀 지칠 줄 모르는 전투적인 사역자"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프레드릭 마이어는 50권이 넘는 책을 썼을 만큼 조금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는 신실한 일꾼이었다. 한 친구가 그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장거리 여행을 할 때면, 그는 객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한 이후에 가방을 열어서 다소 심도 있는 내용의 글을 쓰기 위한 환경을 최적으로 만들어 놓곤 했습니다. 주변 환경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지요." 어떻게 그가 일평생 그처럼 많은 "위대한 사역들"을 강력하게 이룰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곧 이 이야기처럼 그는 "지극히 작은 일"도 매우 소중히 여기면서 신실하게 수행했던 것이다(눅 16:10). 이에 관해 그의 책 <고난의 선물>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이처럼 매일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도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이지만, 바로 이런 것들을 재료로 삼아 우리는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영원히 있을 진귀하고도 아름다운 '의의 인격'이라는 의복을 지을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그 일을 '어떤 태도'로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것이 훌륭한 것이든, 나쁜 것이든 '영원한 손익'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