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설교자들에게 고함 분류

설교의 은사와 그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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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5월호>

성경은 설교와 설교자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는데, 이번 호에서는 “설교의 은사와 그 책임”에 대해 살펴보겠다.

1. 설교를 은사로 받은 성도들은 모두 그 책임을 엄숙하게 다해야 한다.

1) 설교는 설교자 각자에게 부과된 의무이다.
설교자가 자축할 이유가 없는 것은 그가 복음을 설교하기 때문이다. 다른 종들이 주인의 명령을 완수하듯이 그도 자기 책무를 다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종과 주인의 비유에서 이렇게 결론지으셨다. 『그러므로 너희도 그와 같이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을 하고 나서는 ‘우리는 무익한 종들이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말하라』(눅 17:10).

선지자 예레미야는 설교하는 일이 자기에게 지워진 짐이라는 사실과 말씀을 전달하는 의무를 주님께 다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한번은 자신이 전한 메시지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조롱을 당하자,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를 언급하지 아니하고 더 이상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렘 20:9). 그러면서 그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지만 곧이어 이렇게 고백해야 했다. 『그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서 내 뼈들 속에 사무치는 타는 불 같아서 내가 참기에 지쳤고 견딜 수 없었나이다』(렘 20:9). 이사야 13:1, 에스겔 12:10, 하박국 1:1, 스카랴 9:1, 말라키 1:1도 읽어 보라. 사도 바울도 설교하고자 하는 강한 마음에 대해 다음처럼 말했다. 『내가 부득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정녕 내게 화가 있으리라!』(고전 9:16)

2) 설교는 설교자 각자에게 부과된 책임이다.
복음은 성스러운 책무로 주님의 종 각각에게 주어졌으며 『청지기에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실한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이라.』(고전 4:2)라는 지침도 내려졌다. 또한 바울은 복음에 관해 쓰면서 그것이 자기에게 맡겨진 것이라고 했고(딤전 1:11), 말년에는 디모데에게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라고 쓸 수 있었다. 아울러 『오 디모데야, 네게 맡겨진 것을 지키』(딤전 6:20)라고 간절히 권면했다. 종 각자에게는 그가 주인께 자신의 청지기직을 설명해야 하는 날이 온다. 우리의 회계 장부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이라는 빛 아래서 계산되는 날(딤전 6:20, 고전 3:9-15, 롬 14:10), 그 내용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3) 설교는 설교자 각자가 갚아야 하는 빚이다.
사도 바울은 선포했다. 『헬라인들이나 야만인들이나 지혜 있는 자들이나 어리석은 자들에게나 내가 다 빚진 자로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노라』(롬 1:14,15).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이 채권자이고 세상을 자신의 채무자로 본다. 그래서 세상이 자기에게 생필품 전부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또 자신이라는 걸출한 존재가 세상을 빛내는 동안 자기를 안락하게 해 주고자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와 반대로 기독 신앙에서는 세상이 채권자이고 그리스도인 각자가 복음이라는 빚을 졌다고 말한다.

빌린 것은 도리에 따라 마땅히 갚아야 하듯, 복음을 전하는 일도 정확히 그렇다. 한 젊은이가 복음을 전하려고 가족과 본국을 떠나 이국의 선교 본부에 도착해서는 선배 선교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 빚을 갚으려고 왔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부과된 의무가 무엇인지 알았던 것이다.
우상 숭배, 무지, 미신, 무관심이라는 어둠에 놓여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은사를 받은 우리가 복음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늘에서 온 지혜로 혼이 밝아진 우리가
그 진리의 등불을 무지한 자들에게 전해 주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구원! 오, 구원!
세상 끝에 거하는 민족이 메시아의 이름을 알기까지
기쁘게 선포하라!”

영국 브리스톨(Bristol)의 애슐리 다운(Ashley Down)에 고아원을 세운 것으로 유명한 조지 뮬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데도 유능했다. 그가 설교에 둔 목표는 설교자 모두에게 도전이자 귀감이 되어야 마땅한데, 그의 바람은 이랬다. “제일 쉬운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받는 복을 죄인이 어떻게 얻는지 이해하도록 설교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지위에 관해 알려 준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으로 돌아가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시험하게 하고, 시험을 통과한 것만을 소중히 여기게끔 강하게 권면한다. 분파를 없애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형제 사랑을 추구하게 한다. 참된 믿음과 살아 계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다져지게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부터 더 실제적으로 성별하도록 이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최고의 소망으로 삼도록 애쓴다.”

4) 사역을 마치지 못하는 일은 비극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비극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구원하신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있다. 바울은 그 점을 굉장히 두려워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나의 달려갈 길을 기쁨으로 끝마치고 내가 주 예수로부터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라면 이런 일을 전혀 개의치 아니할 뿐 아니라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한때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매가 풍성할 것 같은 가능성을 크게 비친 누군가의 생애에 하나님께서 “실패”라고 쓰셔야 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삼손, 솔로몬, 데마 등 출발은 잘했으나 달려갈 길을 마치지 못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완수하지 못한 자들이 떠오른다. 주님의 종이 성경 교사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끔 훼방하는 요인 몇 가지를 여기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사람을 두려워하는 태도”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덫에 걸리나』(잠 29:25). 많은 이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세상에 관심을 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상한” 존재로 여겨질까 봐 두려워하기에 방해를 받는다. 진리를 설교하는 일은 인기를 가져오지 않는다. 자기 명성, 인기, 위신을 지키려고 좇다가 설교자 다수가 그들의 주인이신 주님의 승인을 잃고 말았다. 무엇보다 강조하지만 사람을 즐겁게 하는 설교자가 되면 안 된다. 그러나 대중의 환호에 영합하는 설교를 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으니, 청중이 좋아할 만한 것만 말하고 반드시 전해야 할 진리는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 즉 청중 사이에서 자기 인기를 떨어뜨릴 만한 말은 피하는 것이다. 베드로조차 그 덫에 빠졌으나, 바울은 담대하고 신실하게 그의 모순을 꾸짖었다(갈 2:11-14). 그런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간증했다.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설교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서도 안 된다. 로마서 15:1(『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에서 이 점을 확실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삼손의 실패 원인이 여기에 있었는데, 필리스티아인 가운데서 아내를 찾는 그를 부모가 책망하자 그의 반응이 이러했다. 『그녀가 나를 매우 기쁘게 하니 나를 위하여 그녀를 얻어 주소서』(판 14:3).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결합을 금하신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를 즐겁게 하는 데 열중할 수 있다면 그 어떤 희생도 치르겠다는 기세였고, 실로 그 비용은 엄청났다.

설교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기를 일생의 바람으로 삼아야 한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간구하고 권고하노니 너희가 어떻게 행해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가를... 넘치게 하라』(살전 4:1). 『주께 합당히 행하므로 모든 일에 기쁘시게 하고』(골 1:10).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살았기에 귀감이 되었다(히 11:5).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삶이란 변상할 길이 없는 비극이다(고전 9:24-27).

(2) “게으른 습성”이다. 설교를 하려면 공부가 수반되고 공부는 노력을 뜻하기에, 대부분이 설교라는 말을 반기지 않는다. 설교는 시간, 힘, 자기 부인을 비용으로 부과하기에 많은 이가 이 책무에 태만하고 만다. 그렇다 보니 그런 부류는 주님을 섬길 기회를 제안 받을 때마다 “저 사람 시키세요!”라고 외치는 이기적인 기생충의 말버릇을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진 빛을 곡식 되는 말 아래 둬서 비치지 못하게 한다(마 5:15). 게으름뱅이에 관한 솔로몬의 기록(잠 24:30-34)을 모두가 읽고 표시하고 묵상해야 한다.

구주께서 말씀하셨다. 『때가 낮일 동안에 나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들을 행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면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이 말씀을 요한복음 4:34, 누가복음 2:49과 비교해 보라. 『종이 자기 주인보다 더 위대하지 못하다』(요 15:20).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에게 몸과 시간과 힘을 드려 주님을 신실하게 또 최선을 다해 섬기기를 기대하시는데 그것이 과하단 말인가? 하나님의 위대한 전사가 전하는 격려에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견고하라, 흔들리지 말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아니한 줄을 너희가 앎이니라』(고전 15:58).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 생에 소원했던 바는 다음의 세 가지로 이해하면 된다. “방해하는 것을 다 버리고, 과거의 실패를 잊고, 기다리고 있는 상을 위해 빠르게 나아가기”(빌 3:8,13,14).

(3) “이기적인 야심”이다. 바라는 바를 이루겠다는 야망과 기력이 부족하진 않지만 안타깝게도 그 모든 수고를 자기의 이익을 늘리는 데 쏟아붓는 사람이 많다. 아침부터 밤까지 사욕을 채우고 사업 실적을 올리고 은행 계좌에 돈을 쌓느라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일, 곧 주님의 일에는 거의 혹은 아예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른바 “성공한” 사업가 다수가 이 땅의 삶을 끝내면서 다음과 같이 통탄해야 했다. “세상에서 대성했지만 하찮고 이기적인 이익을 늘리는 데 빠져서 인생을 낭비하고 말았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막 8:36)

나는 이름 모를 선지자가 아합왕에게 했던 비유(왕상 20:35-43)가 이 진리를 제대로 이해시키는 목적에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을 지키라. 만일 어찌하든지 간에 그를 잃어버리면 네 생명으로 그의 생명을 대신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은 한 달란트를 내야 하리라.’ 하였나이다. 그런데 왕의 종이 여기저기 바쁘다 보니 그가 없어졌나이다.” 하였더니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말하기를 “네 스스로 그것을 결정하였으니 네 판단대로 될지니라.” 하더라』(39,40절). 이 비유에서 선지자는 아합이 시리아 벤하닷왕을 사로잡았을 때 그에게 지나치게 너그러웠던 모습이 그와 비슷하다고 꼬집은 것이다. 그 선지자의 말을 달리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왕의 종이 여기저기 바쁘다 보니 제 ‘시간’이 없어졌어요. 제 ‘재능’이 없어졌어요. 제 영적인 ‘힘’이 없어졌어요. ‘기회’가 없어졌어요. ‘기쁨’이 없어졌어요. ‘열정’이 없어졌어요. ‘인생’이 사라졌어요!” 이것이 이기적인 야심으로 너무 바빠서 하나님을 위해서는 시간을 쓰지 못한 사람이 슬프게 고백하게 될 말이다.

곡식 되는 말 아래 숨겨진 촛불은 일로 뒤덮여 잘 보이지 않게 된 간증이라고 할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 안에서 으뜸이 되심은 분명하기에, 우리가 첫 번째 것을 첫째로 두고 그것을 먼저 행할 때만이 주님께 작은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일에는 게으르지 말고 영 안에서 열심을 내며 주를 섬기라.』(롬 12:11)라고 명하신다. 이는 주님 섬기기를 희생하면서 돈벌이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암시한다. 이와 관련하여 학개서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바꿔 볼 수 있겠다. “주님의 일이 황폐해진 마당에 자기 일에만 빠져 살 텐가?”(학 1:4-7)

(4) “변명”이다. “전 설교하는 데 은사가 없어요.” 이것은 어떤 모양으로든 주님의 일에 참여하도록 권유받은 사람에게서 흔히 듣는 구실이다. 그런 변명은 주로 다음의 원인에서 나온다.
1 은사를 가졌는지 시험해 보지 않아서이다. 정직하고 끈기 있게 시도해야만 설교나 가르치는 일에 은사를 가졌는지 여부를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보거나 책을 읽고서 수영을 배우는 사람은 없다. 수영은 물속에 들어가 도전해야만 배울 수 있다. 충분히 해 본 뒤에도 본인과 청중 모두가 그쪽으로는 은사가 없다고 확신한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다. 적어도 노력은 해 봤지 않은가.
2 은사가 연구와 연습으로만 향상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해서이다. 음악, 미술 등의 재능은 연습으로 발전한다. 지금이야 잘하지만 시작할 때만 해도 재능을 지닌 설교자가 되리라는 가능성을 전혀 보이지 못한 설교자가 많다. 너무 쉽사리 포기하거나, 계속해야 할 때 그만두는 경우가 적잖다.
3 설교라는 주제로 가득 차지 못해서이다. 자신에게 복음을 설교할 능력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자동차가 주제로 나오면 막힘없이 말한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이 말하기 때문이라.』(마 12:34)에 맞는 경우라 하겠다. 차에 대해서 배우고 운전하고 고쳐 왔기에 결국 차에 대해 말도 할 수 있다. 그의 마음이 일종의 “차고”가 되었으니 입을 열 때마다 차 얘기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마음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졌다는 사실은 영광스러운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주님께서 주신 그 어떤 은사라도 성장시키고자 하는 갈망으로 드러난다.

(5) “방치한 죄”와 “세상을 따르는 삶”이다. 의심스러운 습관과 오락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받은 사역을 완수하지 못하게 방해받는다. 기도와 성경 공부에 소홀하고,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모임에 참여해서 교제하지 않고, 죄를 짓고도 자백하거나 판단하지 않으면 주님께 받은 어떤 은사도 자라지 않는다. 이 실족한 상태를 치료받으려면 죄를 솔직히 자백하고, 죄에서 단호히 돌이키며, 성경 공부와 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 모임에 참석하는 일을 해야 한다. 주님께 돌아가 교제를 회복하면, 등한시했던 은사를 살려 주님께서 쓰실 수 있다.

무슨 이유로 사역을 마치지 못했든 그것은 비극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을 해내면 미래에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받을 상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에도 평안, 기쁨, 만족으로 보상을 받는다. 주님의 일을 끝내지 못한 적이 있거나 지금 완수하지 못할 처지에 놓인 그리스도인 다수가 “그렇게 됐을지도 모를 사람”이라는 유령에 시달리고 있다. 주님, 그런 암울한 환상에서 우리를 구해 주소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사람으로서의 당신을 스스로 볼 수 있다면, 지금의 당신으로 다시는 흡족해하지 않으리라!”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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