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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로 부르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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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3월호>
알프레드 깁스(Alfred P. Gibbs) / 장은혜 옮김알프레드 깁스(1890-1967)는 1890년에 영국 버밍햄에서 태어나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에서 자랐고, 쌍둥이 형인 에드윈에게서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군목으로 복무하며 훈련소에 있는 군인들에게 설교했다. 1919년에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있는 무디성경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거기서 곧 구제 선교에도 참여했다. 깁스는 그의 훌륭한 저서 <설교자와 그의 설교, The Preacher and His Preaching>로 목사와 설교자에게 친숙하다. 이번 호에서는 그 책 제5장, 「설교자로 부르심」의 나머지 부분을 지난 호에 이어서 연재한다.
5.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증하기까지 여러 요소를 종합해 봐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명하다고 판단하는 데에는 아래의 사항들이 관여한다.
1) 성령님께서 강하게 권고하신다.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면서 그를 『모든 진리로 인도』해 주신다(요 16:13, 롬 8:14). 우리가 이 “거룩한 하늘의 손님”을 슬프게 해 드리지 않는 한, 우리 생에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갖고 계신지에 관해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시고 생각을 이끄신다(롬 8:26,27). 성령님의 이런 인도하심은 뚜렷이 밝혀 규정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렵다. 스코틀랜드에 이런 속담이 있다. “말로 듣기보다 느끼는 편이 낫다.” 즉 묘사를 듣는 쪽보다 경험하는 쪽이 낫다는 뜻이다. 설교자나 성경 교사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그런 경험을 직접 해야 하고, 또 틀림없이 할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으며, 깨닫게 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고,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고 있다면 말이다. 잠깐 스치는 기분이나 직감, 육신적인 열정에서 비롯된, 그래서 곧 사라져 버릴 생각을 성령님께서 촉구하시는 것으로 혼동하면 안 된다. 숱한 이들이 한낱 감정에 지나지 않는 물결에 쓸려 왔다 쓸려 갔으며, 자신을 하나님께서 전임 사역자로 부르셨다고 오해했다.
2) 성경의 어떤 말씀을 통해 강한 확신을 갖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찾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심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자신이 제정하신 원칙에 반하게 이끌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혼란에서 허우적대도록 두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선한 때에, 선한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바에 곧바로 순종하면 그 다음 것을 알려 주신다. 『만일 우리가 계속 주를 알고자 하면 그때 우리가 알게 되리라』(호 6:3). 『만일 누구든지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한다면... 알게 되리라』(요 7:17). 하박국도 그 가치를 배워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망대에 서서, 그가 내게 말씀하실 것과 책망받을 때에 내가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를 지켜보리라』(합 2:1). 사무엘은 엘리에게서 이 진리를 배웠고, 하나님께서 네 번째로 다시 부르시자 이렇게 답했다.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나이다』(삼상 3:10).
3) 마음에 강렬한 연민을 느낀다.
설교자로 부르신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에게 복음이 절박하게 필요함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통해 그들의 실체도 직시한다. 유죄이고 속수무책이며 완전히 실패해서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앞둔 존재로서 말이다. 그래서 부름받은 사람에게는 죄인들을 해방시키는 복음을 듣는 일이 죄인들에게 전폭적으로 필요하다는 확신이 깊게 자리한다. 그런 뜻을 담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는 곡식이 추수하도록 이미 하얗게 되었음이라』(요 4:35). 주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로 다시 왔으며, 그때는 그 여인이 예수님을 극찬하는 말을 듣고서 성읍 사람들도 많이 따라왔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죄인에게 필요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한 성도를 설교자로 부르시는 이유의 일부이다. 즉 주님께서는 그 필요를 채우기 원하신다. 하나님 앞에 홀로 앉아 잠언 24:11,12과 에스겔 33:1-6을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에 깊이 새기며 읽기 바란다. 정확히 말해 필요성 자체가 부르심을 확정하지는 않지만, 앞서 주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적이 있다면 그에 답할 기회로 삼을 수는 있다.
4)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조언도 고려 사항이다.
이 부분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신앙의 경험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설교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어떤 증거를 갖는지 보아 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 더 노련하고, 하나님의 사역에서 더 오랜 경험을 쌓았으며, 하나님께서 자신과 다른 그리스도인을 다루심에 대해 더 민감하게 깨닫는다. 그런 원숙함에 이른 그들은 부름받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조언을 통해 격려하기를 원한다. 그들의 충고만 듣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지만, 부르심의 여부를 판단하는 조건이 될 만은 하다. 관록 있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조언을 경시하지 말라. 바울도 이 점을 무시하지 않았다(갈 2:2). 하나님의 일과 관련해서 탁월한 분별력을 지녔기에 그렇게 도울 수 있는 것이다.
5) 은사가 남다르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종의 말과 행동은 그 영향력이 크다.
디모데를 전담 사역자로 부르셨을 때 이 요소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행 16:1-3). 디모데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결정적으로 쓰셨는데, 하나님께로부터 분별력을 은사로 받은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의 “사역에 필요한 사람”임을 알았다. 그런 원로 형제들을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가! 젊은이들을 이끌어서 주님의 사역에 작게라도 참여케 한 다음, 주님께 받은 은사를 발전시키도록 북돋으니 말이다. 위대한 복음 설교자의 많은 수가 그렇게 시작했다(딤후 4:11).
6)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상황을 배치하셔서 그 성도에 대한 주님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하나님께서 적합한 시기에 설교의 문을 여시기도 하고 생업의 문을 닫으시기도 한다(계 3:8, 고전 16:9). 어떤 경우에는 설교 요청을 넘치게 받아서 더 이상 생업에 시간을 쓸 수 없는 형편에 이르고, 곧 어느 쪽을 포기할지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당신이 처하는 환경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배치라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임무를 내팽개치고 도망하던 중에 욥파에서 타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승선했다. 배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행로임을 입증한다고 여기지 않았겠는가! 하나님께서 섭리에 따라 마련하시는 환경은 다른 요소들이 결합되어 그 증거가 축적될 때 하나님의 질서 있는 섭리가 된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고인이 된 E.J. 페이스(Pace)는 수년간 선데이 스쿨 타임즈(Sunday School Times)에 만화를 그렸다. 언젠가 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멋지고 알맞게 표현해 냈는데, 그 그림을 말로 옮겨 보겠다. 우선 광선 세 줄기가 있다. 첫째 광선은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들”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둘째 광선은 “성령님의 설득과 격려,” 셋째 광선은 “하나님께서 섭리대로 배치하시는 환경”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결국 이 세 광선이 모여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한 줄기 눈부신 빛이 된다. 즉 세 요소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다는 의미이다. 본서에서는 거기에 네 가지를 더해서 살펴보는 중인데, 하나님의 자녀가 주님을 섬기는 길에서 그분의 뜻을 깨닫기 바란다.
7) 지체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는지도 중요하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지체들이 기꺼이 승인하고, 그들의 동료애와 칭찬을 확보해 온 사람이 아니고서는 전담 사역자로 발을 들이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섬김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보나마나 자기 마음대로 평가할 테니 말이다.
영적으로 교만해서 눈이 먼 자들은 이 부분을 왜곡되게 이해하지만 영적인 원리는 다음과 같다. 『또 예언하는 사람은 둘이나 셋이서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판단하라... 예언하는 사람들의 영들은 예언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나니』(고전 14:29,32). 이런 원칙을 숙지한 연장자 형제들이 기도하면서 적절하게 고려한 후 누군가를 전담 사역자로 추천하기를 꺼린다면, 당사자는 그들의 결정에 따르고 자신의 부르심에 관한 종전의 판단을 재고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다음의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한다. 『이는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라 화평의 창시자이심이라』(고전 14:33). 성경적인 “품위와 질서”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가 막대한 후회로 이어진 경우가 허다했다. 성경은 아집과 육신적인 힘으로 움직이는 “프리랜서”(자유 계약자)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속한 모임의 책임자들을 반대하는 노선이거나 그들과 상관없는 독자 노선에서 행동 방침을 결정하고 자신의 생각을 실행한다.
성도 각자가 겸손하고 진지하게 인내하면서, 확신 가운데 순종하는 자세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에 두신 뜻을 찾고, 또 그대로 행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야 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굴복해야 한다. 이에 더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 바울을 부르셨다(행 13:2).
그리스도인 사역자로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에서 영적으로 만족스러운 결실을 거두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또 주님의 전쟁에서 함께 싸우며 주님께 경배드리고 주님의 길에서 실행해야 한다. J.H. 조웨트(Jowett)는 그의 잘 알려진 저서 <설교자, 그의 삶과 사역, The Preacher, His Life and Work>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형제여, 당신의 소명은 아주 거룩한 일이고, 당신이 받은 사역은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당신의 구주께서는 전능하시기에 주님을 기뻐함이 당신의 힘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