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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간증 -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 되었는가?(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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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11월호>
1.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신약 교회는 죄인들이 거듭난 후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바른 성경이 없으면, 성도들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기에 하나님께 무용지물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하나님께서 신약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인가? 죄인들을 구원받게 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진리의 지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만일 거짓되게 사람들을 교회로 모아 놓고 마귀의 교리를 통해 “부자 되고 병 낫고 만사형통한다.”라는 거짓말로 현혹하고 있다면, 그들은 부활의 소망도 갖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참여하지도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지옥의 자식들”이 된다. 구원받은 성도는 부활과 휴거와 재림의 소망이 있지만, 구원받지 못한 교인들은 마귀의 자녀들이기에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틀린 성경으로 교인들에게 사기 친 목사가 하나님의 종인가? 구원받지 않은 목사가 하나님의 종인가, 아니면 마귀의 종인가? 마귀의 종들의 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돈”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니, 이것을 욕심내는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슬픔으로 자신들을 찔렀도다』(딤전 6:10). 돈과 무관하게,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목사가 이 나라에 몇 명이나 되는가? 돈을 더 많이 가지려고 목사가 되었는가? 술장사를 하거나 마약을 밀매하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를 통해 돈을 벌려고 한다면 그것은 우주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일 뿐, 복음 전파와 진리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일이지 않은가? 돈을 모으기 위해 교회를 하고 있다면, 그가 누구든지 간에 “지옥의 자식”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자를 종으로 삼으셨겠는가?
2. 1983년 내가 신학교 학업에 정진하고 있었을 즈음, 나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포모나(Pomona)에 있는 “Central Baptist Church”로 교회를 옮겼다. 내가 다닌 Central Baptist Church에는 다리를 저는 한 형제가 있었는데, 나이가 50세는 넘어 보였다. 그는 “치노 교도소”(California Institution for Men in Chino, CA)의 “중범죄자 사동”에서 낮에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느 날 시내 우체국에 우편물을 찾으러 갔다가 그를 만났는데, 그의 권유로 치노 교도소에 따라가게 되었다. 내가 치노 교도소에서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던 일임을 나중에 증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치노 교도소는 보안 등급에 따라 “개방형 사동”(minimum), “중범죄자 사동”(medium), “강력범죄자 사동”(maximum)으로 구분되었는데, “개방형 사동”은 형을 받은 죄수들이 마치 군대의 보충대처럼 4주에서 6주 동안 잠시 머물다가 다른 교도소로 이감되는 곳이었다. 그곳은 감방이 없고, 자유롭게 공부하거나 운동할 수 있으며, 약혼녀가 있으면 혼인을 할 수 있고, 심지어 감옥 생활을 오래 한 죄수들에게는 3박 4일 동안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는 곳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그 형제를 따라 치노 교도소에 견학을 갔다가, 그의 권유로 “채플린”(chaplain, 교도소 담당 목사) 면접을 보고 합격하여 그날로 “감옥 목사”가 되었고, “개방형 사동”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다. 치노 교도소에는 12명의 “채플린”이 있었는데, 개신교 목사는 나를 포함해서 6명이었고, 카톨릭 신부도 6명 있었다.
“채플린”은 단순한 자원봉사자가 아니기에, 교정 본부의 주무 관리는 지원자의 이력과 인가받은 신학교의 수료 여부를 판단하여 그가 자격 있는 사람인지를 우선적으로 선별해야 했다. 죄수들의 뇌리에는 하루 종일 어떻게 하면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하는 상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죄수들이 성경공부 이외에 어떤 질문을 하거나 바깥 사회에 있는 가족에게 부탁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동정을 베풀거나 연민을 가지고 도와주는 것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고 주무 관리가 내게 일러 주었다.
내가 배치받은 개방형 사동에는 약 25명의 죄수가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은 넓은 축구장과 곧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예배나 성경공부에 참석하지 않는 죄수들은 자기가 원하는 만큼 각종 운동 기구를 가지고 운동을 할 수 있었다. 내게 할당된 시간은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였고,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체육관에서의 부흥회나 개별 상담 시간이 길어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밤 9시 30분 이전에 감옥에서 나와야 했다.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는 여름철에 건조하고 상당히 더웠다. 저녁 6시가 지나서야 조금씩 남풍이 불어올 정도였다. 나의 사역지에는 커다란 선풍기 한 대가 있었는데, 선풍기를 틀어 놓으면 굉음이 나서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죄수들은 강의를 듣는 데 방해가 된다면서 선풍기를 꺼 버리기까지 했다.
사실 그 당시 나의 일상은 무척 바빴다. 사역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강하지 않았다면, 감옥에서 죄수들을 상대로 매주 수요일 저녁에 시간을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신학생에게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대학원에서 월요일에만 오전 8시에서 오후 5시까지 강의를 들어야 했다. 신학대학원 학생들이 주로 교회를 맡은 목사들이다 보니, 수업을 월요일 하루에 몰아서 편성하는 것은 미국 신학대학원들의 보편적인 교육 실정이었다.
3. 나는 우리 가족의 생계를 영위할 대책을 찾아야 했기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신문 광고를 뒤적거리면서 가능한 생계 수단을 찾아다녔다. 하루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왼쪽으로, 왼쪽으로!”라고 말하는 한 음성이 들렸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비공해 산업 단지”(비공해 첨단 산업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 지대로서 약 2,000명의 기술 요원들이 근무하는 단지)였는데, 그곳 주변에는 식당이 하나도 없었다. 그 산업 단지는 내가 살던 아파트와 신학교 사이의 중간 지점에 있었는데,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모두 “3분 거리”였다. 처음에는 그 장소에 동전만 넣으면 음료수뿐만 아니라 과일, 수프 등을 살 수 있는 “무인 식료품점”을 할 계획이었는데, 그다음 날 시청에 가서 알아보니 시에서는 그곳을 식당 외에는 허가할 수 없다고 알려 주었다. 미국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식당을 차리는 것”이고 가장 쉬운 일은 “식당을 사는 것”이지만, 나는 그런 분야에 관한 한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무더운 옥외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 말고 실내에서 시원하게 에어컨 틀면서 음식을 만드는 일을 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차에 내가 다니던 신학교의 구내식당 지배인이 “델리카트슨 레스토랑”(Delicatessen Restaurant)을 추천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너무 생소한 명칭이어서 선뜻 나서지를 못했다. 이미 조리된 햄이나 비프, 치즈, 샐러드, 밀 보울(Meal Bowl, 도시락의 일종), 샌드위치 등을 제공하는 식당인데, 4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내가 한국에서 온 부자 학생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내가 “그게 뭐냐?”라고 물었더니, 그는 나를 도심지에 있는 한 델리카트슨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나로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레스토랑인 데다가 나의 예산도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식당을 공장들과 창고들만 있는 산업 단지에서 운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내가 임대한 장소의 앞쪽은 사무실이었고 뒤쪽은 창고형 건물이었는데, 그런 장소가 약 14개 정도 나란히 있었다. 나는 그곳 중간에 비어 있는 한 점포를 계약했다. 그리고 다음 날 델리카트슨 레스토랑을 만들 생각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나에게 델리카트슨 레스토랑을 추천한 신학교 구내식당 지배인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나를 “경매장”(auction)에 데리고 다니면서 식당에 필요한 식탁, 의자, 쟁반, 컵, 접시, 포크, 나이프 등 필요한 물품들을 아주 싼 값으로 구매하도록 도와주었다. 수중에 있는 돈이 제한적이라 식당 개업 준비를 위한 공사를 진행하는 것이 무리였지만, 같은 신학교에 다니는 목수를 비롯하여 동료 학생 중에서 목수 경험이 있는 손길들이 나를 도와주었고, 두 명의 정식 목수도 함께 일했다.
약 2개월에 걸친 공사가 끝나고 드디어 개업일이 내일로 다가왔는데, 두 가지가 부족했다. 한 가지는 식당 안 입구에 놓을 냉장 기능이 탑재된 “쇼케이스”가 필요했는데 시가로 무려 6,000달러나 나갔다. 자금은 이미 다 소모되어 수중에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왜냐하면 델리카트슨 레스토랑을 하려면 “샐러드 바”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조리 기구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누군가가 구겨 버린 신문지를 주워 벼룩시장 광고 지면을 살펴보다가, 어떤 피자가게가 문을 닫으면서 그 쇼케이스를 1,500달러에 판다는 내용을 보게 되었다. 그곳에 가 보니 내가 가끔 지나다니면서 들렀던 동네 쇼핑몰에 있는 피자가게였다. 주인도 나와 일면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것을 사겠다고 하자, 그는 저울 한 개와 전자레인지 두 개까지 거저 주었다. 그것들을 식당에 갖다 놓으니, 그제야 델리카트슨 레스토랑처럼 보였다.
또 한 가지는 식당을 운영할 자금이 필요했는데, 역시 수중에는 돈이 없었다. 빌릴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마침 한국의 “금성사”(Goldstar, 현 LG전자)에서 일하다가 우리 신학교에 오게 된 한 청년이 자기는 은행 계좌가 없으니 자기 돈 3,000달러를 좀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정말로 내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이 가능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나는 그 돈으로 식자재를 사서 개업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개업하는 날, 나는 신학교 계절 학기 때문에 학교에 갔다가 12시 반쯤 되어서야 레스토랑에 올 수 있었는데, 이미 손님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었다. 식당 안에는 집사람과 백인 여인 한 명이 일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 식당을 통해 우리 가족은 먹고살 수 있었고, 신학교 학사, 석사, 박사 과정까지 나의 모든 학비도 충당할 수 있었다. 그 5년 동안 나의 공부와 가족 생계를 가능하게 해 주었던 이 식당의 이름은 “골든벨 스낵바”[Golden Bell(“황금종”) Snack Bar]였다. 구약의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뿌리고 나서 겉옷을 입었을 때 그 옷에 달린 금방울들이 쨍그랑 소리를 내면, 밖에서 귀를 기울이던 백성들이 속죄에 대한 환희로 기뻐하며 소리를 질렀던 일을 기억하여 그 이름을 붙였다. 만일 그 공장 지대에 Golden Bell “Restaurant”이라고 간판을 달았다면 얼마나 안 어울렸겠는가! 긴 이야기는 지면상 여기서 끝낸다.
나의 박사 논문이 대학원에서 통과된 다음 날, 나는 모처럼 토요일에 식당 문을 열고 커피를 끓여 마시면서 책을 읽으려고 자리에 앉았다. 그 순간 어떤 미국 사람이 식당으로 들어오더니 이 가게를 팔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학업도 다 끝났기에 나는 팔려고 한다고 말했고, 그가 얼마를 원하느냐고 되묻기에 순간적으로 내가 투자한 금액의 3배를 제시했더니 그가 수용하여 가게를 손쉽게 처분할 수 있었다.
4. 한편 “치노 교도소 사역”은 어떻게 되었는가? 처음에는 약 25명의 죄수들이 성경공부에 참여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15분가량 주제별로 성경을 가르치고, 그다음 15분가량은 설교를 하고, 그다음 15분은 구원 초청을 하라는 교시를 내게 주셨다. 내가 그대로 했더니, 처음 초청했을 때 네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겠다면서 앞으로 나왔다. 나는 그들 네 사람 각자에게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겠느냐”라고 물었고,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그들과 영접 기도를 하며 끝냈다. 그 이후로 구원받은 죄수들은 끊이지 않고 매주 나왔다.
6개월쯤 지났을까? 하루는 교도소 사역을 마친 어느 날 밤이었는데, 갑작스레 비가 내렸다. 캘리포니아는 1년 중 12월부터 2월까지 비가 자주 내린다. 예상치 못한 날씨에 우산이 준비되었을 리가 없었다. 성경을 비에 맞지 않게 양복 상의 품에 넣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을 향해 뛰고 있었는데 멀리서 누군가가 “이 형제, 이 형제!” 하고 불렀다. 비를 맞는 와중에도 나는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가까이에서 보니 한 흑인 청년이었는데,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마치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사도 바울에게 물었던 질문과 같았다(행 16:30). 그래서 아까 구원받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는 다시 복음을 설명했고, 우리는 빗물이 고인 잔디 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 후 나의 초장의 양무리는 약 75명으로 늘어났고, 그곳 체육관에서 부흥회를 두 번 가졌는데, 거기에서 한국 사람들, 유대인 사역자, 우리 신학교 설립자의 손자도 만났다. 3년간 사역하면서 약 2,200명의 죄수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나는 박사 학위 논문 때문에 그처럼 정들었던 치노 교도소를 떠나야 했다. 마침 한국에서 선교하다가 귀국한 어느 미국 목사가 있어서 나는 그에게 나의 사역지를 넘겨주었다.
한편 Central Baptist Church(성도 수 약 2천 명)에서는 나를 초신자 담당 목사로 임명해 주었다. 내가 쓴 책 <영적 삶의 새로운 시작>은 그때 가르쳤던 교재를 한국에 와서 펴낸 책이었으며, 그런 책은 아마도 내가 처음 펴낸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동안 두 명의 “치노 교도소 출신”의 죄수 제자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한 사람은 우리 식당으로 나를 찾아왔고, 또 한 사람은 새크라멘토(Sacramento)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 정부 청사에서 만났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멋지게 차려입은 어떤 잘생긴 청년이 나를 쳐다보며 웃고 서 있었는데, 내가 그에게 나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치노”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를 포옹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5. 나는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델리카트슨 레스토랑을 처분했고,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Anaheim) 시로 이사했다. 성경 번역 작업을 계속 이어 나가는 것은 물론 생계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애너하임 중심부에 있는 쇼핑몰에서 “요거트 아이스크림 가게”를 운영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성경을 번역했고, 아침 9시에는 도매시장에 가서 가게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매하여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밤 9시까지 팔면서 공부를 했다. 밤 9시에는 가게 문을 닫고 집에서 리버티대학교(Liberty University)의 상담심리학 석사 과정을 비디오를 보면서 공부했는데, 그 학교에서는 내가 다닌 신학대학원과의 교환 학점을 인정해 주었고, 여름 방학 때면 그 학교 교수들이 우리 학교에서 강의했다. 상담심리학 과정은 총 72시간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수업 영상을 보다가 행여나 졸기라도 하면 또다시 36시간을 들어야 했다. 얼마나 힘든 공부였는지 모른다. 그 가게에서 <한글킹제임스성경>의 전신인 <새성경 사복음서> 서문을 준비했는데 100번도 더 수정했었다.
그 무렵 나는 우리 교회에서 귀한 손길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공립학교에서 교사로 정년 퇴임한 존스턴 크레이그(Johnston Craig) 형제, 컬럼비아대학교 출신으로 북침례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다가 청력이 나빠져서 사임한 로버트 R. 터커(Robert Reed Tucker) 형제(그의 아내의 말에 따르면, 그는 매일 새벽 나에 관한 기도 제목들을 A4용지에 꽉 채워서 기도했다고 함), 금융 및 부동산 중개 업체를 운영하던 내 친구 로이 스완(Roy Swan), 한국 감리교 출신으로 CBS 기자였던 조OO, 리버티대학교 출신인 박OO와 함께 “말씀보존학회”(Word of God Preservation Society)를 설립하여 캘리포니아 주 정부에 등록했다. 그중에서 한국 사람들은 일찍이 배를 채우기 위해 그들의 교단으로 돌아갔고, 미국 형제들과는 교제가 유지되었으나 내가 너무 분망하다 보니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이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지금쯤은 이들 미국 형제들도 주님 곁으로 갔겠지만 말이다.
“말씀보존학회”는 이후 내가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그대로 옮겨 왔다. 그 결과 <한글킹제임스성경>을 현재까지 61판을 펴냈고, 수많은 주옥같은 책들, 그중에서도 피터 럭크만 목사님을 만난 이후로 번역되기 시작한 그분의 책들을 상당수 출간함으로써 이 땅에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인 “Bible Believers”가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경침례교회, 말씀보존학회, 킹제임스성경신학교, 서울크리스찬중고등학교, 서울솔로몬학교 성경연수원, 거리설교자들과 구령자들, 11개의 지역 교회들은 오늘도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있다. 우리는 1년에 “세 번” 모여서 함께 교제하는데, 곧 “성경핵심강연회”(6월), “여름수련회”(7월 말), “선교주간”(12월 25일 즈음,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지키지 않음)이다. 특히 선교주간에는 각 지역 교회들이 지난 1년 동안 얼마나 많은 거리설교와 구령을 했는지를 발표한다. 청년들이 준비한 연극과 서울크리스찬중고등학교 정기연주회가 있으며, 헌신 예배도 드린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강화 교육관에서 성경을 가르치며 사용했던 50가지 이상의 교재들이 너무 수준급이라서 책으로 출간하여 배포할 계획도 갖고 있다. BB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