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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간증 -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 되었는가?(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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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12월호>
1. 많은 교인들이 수년간 또는 수십 년간 자기가 선정한 교회를 다니고 있는데, 왜 그 교회에 다녀야 하는지 모르면서 다닌다. 그가 처음 그 교회에 나갔을 때, 어떤 믿음이 작용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 당시 너무 어렸거나 분별력을 갖추지 못해서 그저 가족 중의 누군가를 따라 나갔을 수도 있고, 또는 같은 또래의 친구가 가자고 해서 갔을 수도 있다. 누군가가 그에게 왜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으면 정답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주일이 되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면서 교인 혹은 그리스도인 등의 호칭을 들었을 것이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상태로 교회만 다니고 있는 것이다.세상 교회들은 거의 다 교단 교회들이다. 교단 교회들은 정확히 말해서 성경적 교회가 아니며, 그런 교회에 속한 자들은 그 교단이 생성된 근거(?)가 있을 것이므로 세월이 상당히 지난 뒤에야 자기들이 어떤 교단에 속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 교회가 어떤 교회든, 소속감을 느끼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듣고 믿음으로써 죽었던 영이 살아나야만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어서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모두 그와 같으니라.”고 하시더라』(요 3:5-8).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코데모는 유대교 산헤드린 공회의 멤버였음에도 그런 말씀을 그의 생애에서 처음 들었다.
죄인 된 인간이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남이다. 거듭난 사람이 그 후에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몸과 혼과 영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그 순간부터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행보를 시작할 수 있는데, 거듭남이 선행되지 않은 채 자기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부터 하려 했다면 그것은 일방적인 행보이기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헌신을 수용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의 영은 죽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헌신은 한 개인의 자원하는 행보여야 한다.
창세기 22:2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모리야 땅으로 가서 100세에 낳게 하신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이보다 더 난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향을 인간들이 선뜻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때 아버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이삭도 자신 앞에 닥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번제에 쓸 나무를 들어서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그는 자기 손에 불과 칼을 들고, 두 사람이 함께 가더라. 이삭이 그의 아비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여.”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하니, 그가 말하기를 “불과 나무를 보소서. 그런데 번제에 쓸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하자,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내 아들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제에 쓸 어린양으로 마련하실 것이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가더라』(창 22:6-8).
『아브라함이 그의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의 아들을 죽이려 하는데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그를 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더라. 그가 말하기를 “네 손을 아이에게 대지 말고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나는 이제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아노라.” 하더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았더니, 보라,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 한 마리가 그 뒤에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숫양을 잡아와서 그의 아들 대신에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0-13).
신약성경 로마서 12:1,2에서는 사도 바울이 “성도의 헌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지금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근거로 권고한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의 몸에 베풀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삶에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몸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내어 드렸더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이다. 헌신을 오해하여 몸을 드리지는 않고 삶을 내어 드린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온전한 생명은커녕 생명 자체를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주님을 섬기게 되면 어떤 필요가 있을 때 아무리 오래 기도했다 해도 응답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헌신하지 않은 채로 주님을 위해 혼신을 다 바치겠으니 이 일만은 이루어 주시라고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할지라도 돌아오는 응답은 추운 겨울밤의 차가운 침묵뿐이다. 성도의 헌신은 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쯤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피로 거듭난 성도의 몸을 원하신다. 성도들의 간증은 “정직한 헌신”(롬 12:1,2)에서 시작됨을 확실히 인지하고 가짜 헌신에 기만당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나는 나의 헌신된 삶이 낸 열매들을 이야기해 볼까 한다.
2. 내가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가장 아쉬웠던 점은 대한항공(KAL)을 떠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표를 냈지만, 대한항공과 사우디아라비아항공 간에 건축 자재 운반 계약이 맺어졌는지 보잉 747 화물기 한 대를 기장, 부기장, 항공 기관사와 함께 사우디항공에 합류시킨 프로젝트에 내가 차출되었다. 이미 대한항공에 사표를 낸 상태였는데, 특별 프로젝트에 나를 기용한 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 비행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3대 도시인 제다(Jeddah, 홍해 옆에 있는 도시), 리야드(Riyadh, 사우디 정부 청사가 있는 도시), 다란(Dhahran, 페르시아만 옆에 있는 도시)에서 이집트 카이로(Cairo), 영국 런던(London), 독일 프랑크푸르트(Frankfurt), 네덜란드 암스테르담(Amsterdam) 등지에 주로 건축 자재를 수송해야 했는데, 2주간 비행하고 1주일은 쉬었다.
하루는 쉬는 날에 홍해 옆에 위치한 제다(Jeddah)의 전통 시장을 구경하러 나갔다가 거기에서 내가 알래스카에서 사귄 케빈 캐롤(Kevin Carroll)이라는 친구를 만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 해안 경비대(Coast Guard) 준장(★)이었는데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나는 케빈과 함께 그의 집에 있는 제1,2차 세계대전 때의 소총을 가지고 사격장에서 사격 연습도 했고, 알리에스카(Alyeska) 스키장에 있는 오두막(cabin)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알리에스카 스키장은 세계에서 겨울이 가장 긴 스키장이다. 내가 알래스카에서 사귄 친구 케빈을 지구 반대편 사우디 제다에서 만난 것은 꿈 같은 이야기였다. 내가 그에게 여기에는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자기 회사의 비료 공장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있어 지금은 그곳에서 일한다고 했고, 얼마 후면 홍콩에 사는 중국 여인과 결혼할 것이라고 알려 줬다. (그는 후에 자기 아내와 아기의 모습이 담긴 가족사진을 서울로 보내 주었다.)
그날 그와 동행했던 한 미국인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타미 키친스(Tommy Kitchens)로, 미국 앨라배마(Alabama) 주에 있는 케빈의 회사 간부라고 했다.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타미가 불쑥 내가 묵고 있는 숙소에 좀 가 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라고 대답을 하면서도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숙소는 새로 지은 아파트였는데, 책상이 없어서 응접실에 두 개의 의자를 놓고 그 위에 합판을 얹고, 또 그 위에 침대 시트를 깔고서 <가정성경공부 100과>(현재 <주제별 성경공부>)라는 작은 글자로 된 책자를 번역하고 있었다. 럭크만 목사님은 이 책자를 기반으로 23권의 책자를 만들었는데, 후에 내가 펜사콜라성경신학원을 개설했을 때 9명의 신학생을 가르치면서 이 책자들을 교재로 사용했다. 영어로 된 책을 눈으로 읽으면서 우리말로 강의했던 것이다. 나중에 5권으로 다시 축소했고, 그 후에는 “피터 럭크만의 조직신학”으로 편집하여(1,040페이지) 럭크만 목사님에게 선물로 드렸다.
나는 지중해와 알프스 상공을 수십 회 비행했다. 헌신 이후에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배려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으며,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위치들을 비롯하여 사도 바울의 선교 여정들을 공중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나는 사우디에 있는 동안 아파트 관리인의 아들(고등학교 3학년 또래)과 예멘에서 온 그의 친척을 영어로 구령했다. 사우디에서의 비행 임무는 전광석화와 같아서 언제 시작했고 언제 끝났는지 모르게 끝났다. 사우디에서 일하기로 한 3개월이 금세 지나갔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계획대로 1981년 11월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남가주 샌디마스에 소재한 근본주의 침례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11월이었음에도 내가 다녔던 연세대학교 영어 과목 8학점을 인정받아 즉시 편입하여 출석할 수 있었다. 하루는 교회사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일단의 마귀의 종들인 웨스트코트(Westcott)와 홀트(Hort)가 성경을 변개시켰다는 내용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나는 성경 변개에 대한 강의를 듣자마자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은 큰 고통을 느꼈다. 그런 일이 두 번 더 있었고, 그때부터 나는 성서공회의 성서들의 실상을 보면서 성경 번역을 다시 해야겠다는 열정을 키워 나갔다. (내가 신학을 공부했던 기간의 생활에 관해서는 지난 호에서 어느 정도 글을 썼기에 이번 호에서는 생략하겠다.)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에는 내가 교육 목사로 섬기던 Central Baptist Church에서 미국 영주권을 신청해 주었고, 영주권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는 규정상 미국 밖으로 여행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아침 5시에 일어나 성경 번역을 했었고, 오전 9시부터는 생업을 위해 시작한 요거트 아이스크림 가게에 나가 일을 했었다. 그런 생활이 3,4개월쯤 지났을까, 어느 날 아침 6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보통 새벽에 걸려 온 전화는 누군가가 죽었다는 비보가 보편적이었음을 알았던 나는 좀 당황했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타미 키친스라고 했다. 누구인지 생각하던 차에 사우디에서 만난 케빈 캐롤의 친구였던 것이 생각났다. 어떻게 7년 전에 사우디에서 만났던 그 사람이, 그동안 한 번도 연락이 없다가, 그것도 내가 그동안 세 번이나 이사했는데도, 어떻게 내 연락처를 알아서 전화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전화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우려했던 슬픈 소식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앨라배마는 이미 오전 8시라서 한창 업무 중이었고, 그 역시 사업과 관련하여 나에게 전할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말인즉, 자기 회사가 미 국무성에서 발주하는 세계 각국 주재 미국 대사관과 기타 시설들의 건축 프로젝트를 전문으로 수행하는 업체인데, 한국 주재 미국 시설들(광화문 주한 미 대사관, 대사관저, 문화원과 부산 미 문화원을 포함하여) 일곱 군데의 보안 공사를 다음 달부터 시작해야 해서 자기 회사의 한국 대표가 되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기간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18개월이라고 했다. 건설 엔지니어들이 9명이나 가니까 월요일 하루만 출근하고 회사 대표만 해 주면 된다고 했다. 나는 당시 사복음서를 출간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영주권 때문에 미국을 떠날 수 없었던 차였기에 마음속으로 이미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심을 했었다.
3. 그리하여 나는 1987년 10월 25일에 일시 귀국했는데 한 가지 난제에 부딪혔다. 당시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느라 건축 자재들, 특히 철근을 구할 수 없었다. 타미 키친스의 회사는 미국 앨라배마 주에 있는 전체 기업 중 포브스에 선정된 유일한 부자 회사였고, 미 국무성을 통한 해외 공사 컨소시엄에 연계되기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었기에 한국 건설회사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회사와 손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자재가 없어서 공사 진행이 어렵게 되자, 미 대사관에 등록된 건설 회사들에 당신들은 철근 없이 어떻게 공사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들은 미리 확보해 놓은 자재들로 공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때 미 대사관 참사관이 내게 메모를 보내면서 메모에 적힌 회사도 입찰에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 회사 대표를 만나 보니 지금의 부영건설이었다. 이 회사 역시 미리 확보해 놓은 자재들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업체들이 제시한 공사 비용은 계약을 맺기에 터무니없이 비싼 금액이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나의 체면을 세워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침에 출근하여 동국제강에 전화했더니 어떤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동국제강의 과장이었다. 나는 그에게 대사관 사정을 설명하고 철근을 좀 달라고 요청했더니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었다. 얼마가 필요하다고 대답했더니 별 어려움 없이 주겠다고 해서 그날 바로 철근을 미 대사관 뒤에 야적하고 두 명의 건설 엔지니어에게 크리스마스 휴가를 다녀오라고 미국으로 보냈다. 하나님께서 나의 체면을 세워 주신 것이다. 나는 그 동국제강 과장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싶어서 무슨 음식을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초밥을 좋아한다고 하여 실컷 먹으라고 하자 1인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타미 키친스는 그 후로 한 번 서울에 왔었고 조선호텔에서 파티도 열어 주었다. 나는 18개월짜리 공사를 14개월 만에 완공했고, 타미가 한 번 더 와서 18개월 치 수고비를 주었다. 나는 그 돈으로 합정동에 작은 빌라 한 채를 샀고, 미 대사관에서 책상과 가구 등 살림살이를 주어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한편 그 기간에 미국에서 시작했던 말씀보존학회(Word of God Preservation Society) 사역을 한국에서 재정비하여 사복음서 2판, 신약성경 2판을 출간했다. 신약성경 초판은 C.C.C.의 김준곤 목사가 주선했었다. 그 와중에 구약성경 번역도 계속했고, 펜사콜라성경신학원(지금의 킹제임스성경신학교)을 설립했다.
4. 그때부터 말씀보존학회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그들이 학회의 월간지 <성경대로믿는사람들>을 창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나는 매주 토요일 오후에 당산동에 있던 나의 사무실에서 모여든 학생들에게 마태복음을 가르쳤다. 그들 대부분은 대학생들이었는데, 후에 성경침례교회가 창립했을 때 합류했다. 당시 교회를 시작했을 때는 수중에 돈이 없었고 돈을 빌릴 만한 곳도 없어서 다만 기도할 뿐이었다. 그 기간에 미국에 머물러 있던 아내는 미국 법원에 이혼 소송을 걸어 판결문을 보내왔는데, 이것은 상처 난 곳에 식초를 붓는 격이 되었다. 한참 후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새 가정을 주셨고 그 후 국남이가 태어났다.
당시 합정동에는 “사설 장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작은 교회들을 대상으로 장례를 치러 주는 일을 하는 집사였다. 그가 전세로 빌려 놓은 장소(25평)를 사글세로 빌려 거기서 성경침례교회가 창립되었다. 박남규 집사, 이오재 집사, 철원의 이경애 자매 등 약 25명이 창립 회원이 되어 성경침례교회가 창립되었고(1992년 4월 12일), 그다음에 두 번 더 이사하여 합정동에 있던 섬유노조빌딩 2층에 50평을 얻어서 매우 행복했다. 우리가 원하던 장소가 50평 규모였는데, 섬유노조빌딩 2층에 50평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 장소에서 70평으로 늘렸고, 다시 100평으로 늘렸다.
나는 그날 그 장소를 계약하기 위해 비서에게 돈 100만 원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는데, 노조 간부가 다른 사람이 먼저 계약하겠다며 그 사람도 돈을 가지러 갔다고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했더니 그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얼떨결에 계약서를 쓰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깊은 돌보심을 인지했다. 당시에는 노동계에서 섬유노조가 가장 강성했기에 섬유노조 위원장은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다음 날 그곳에 갔을 때 노조위원장이 교회는 입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노조원 중에는 교인들도 있지만 다른 종교인들도 있기에 교회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새 장소에 너무 만족했는데 그들이 안 된다고 했을 때 매우 실망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주님!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주님께서 내게 이런 지혜를 주셨다. “좋소! 우리가 이번 주일에 여기서 예배를 드릴 텐데 여러분이 시끄럽다고 불평하면 그날로 여기서 나가겠소.” 간부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다음 날 예배를 드렸는데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노조위원장과 국장들이 모두 다 출근하여 우리가 예배드릴 때 무슨 잡음이라도 나는지 지켜봤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기에 잠정적으로 묵인했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곳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향후 4년 6개월 동안 성경침례교회는 간판도 없이 그들의 눈치를 보며 지내야 했다. 합정동에 있는 여덟 군데의 복덕방을 뒤졌지만, 합정동에는 그만한 장소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50평이었던 공간을 100평까지 넓혀 주셨다. 70평으로 확장했을 때 럭크만 목사님 내외가 필리핀으로 가는 여정에 한국에 들르셨고, 섬유노조빌딩에서 성경핵심강연회를 개최했는데 많이 모여든 학생들로 매우 만족해하셨다. 홍보도 많이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한국 목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핵심강연회를 마치고 그다음 날 우리는 종로5가로 목사님을 모시고 거리설교를 나갔다. 목사님은 큰 화판 위에 그림을 그리면서 설교하셨는데 공원에 나온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들었다. 우리 교회는 그때 차도 없었는데 어떤 형제가 그랜저를 한 대 가져와서 럭크만 목사님이 떠날 때까지 사용하라고 했고, 누군가가 시청 앞 플라자호텔 22층에서 저녁 식사를 뷔페식으로 마련하기도 했다. 럭크만 목사님의 사모는 이런 식당에 얼마나 자주 오시느냐고 내게 물었다. 우리의 형편이 이런 장소에 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닐 것이라는 의미였다. 오늘까지 세 번째인데 첫 번째는 나의 아내를 만났을 때였고, 그다음은 미국 펜사콜라에서 도노반 형제가 왔을 때 대접했으며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라고 말해 줬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필요를 충당해 주셨다. BB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