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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카톨릭의 비성경적인 교리 (2) 행위로 의롭게 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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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5월호>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영은 죽은 영이 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영이신 하나님과의 분리가 오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인간은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께 접근하려 했다. 선행으로, 금욕으로, 종교 행위로, 고행으로...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도달할 수 없었다. 인간에게는 그럴 능력 자체가 없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늘에 닿는 사다리를 만들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만들다 만 사다리를 제시하는 사람들의 거짓 교리와 그 근원을 살펴보겠다. <편집자주>
선행과 연관하여...
(1) 행위를 강조하는 이교도의 교리
갈대아 신비 종교는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 자신의 행위와 그가 쌓은 선행을 통해서라고 가르쳤다. 다음은 크리스티(Christie)가 우바로프(Ouvaroff)의 “엘류시스의 신비 종교”(Eleusis는 옛 그리스의 도시 이름이다-역자주)에 대해 말한 것이다.
“우바로프는 신비 종교의 주된 교리 중 하나가 타락한 인간으로 하여금 신에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 길이란 바로 선행을 말하는데, 선행을 통해서 죄가 깨끗이 되기 때문에 전 생애를 통해서 이를 행해야 한다고 한다. 그 신비 종교는 ‘텔레테’(Tele- te)로 명명되었는데, 이는 그러한 종교 생활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한 삶을 영위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렇게 해서 정결케 된 사람들은 그들 각자의 노력에 의해서 ‘완전함에 도달했다’고 인정되었다.”
또한 죽음 이후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인간 스스로의 선행이었다. 윌킨슨(Wilkinson)은 포피리(Porphyry)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집트에서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중요한 인물이었을 때에는 향유를 바를 때 창자를 따로 꺼내 항아리에 담는데, (죽은 자를 위한 의식을 몇 가지 치른 뒤에) 향유 바르는 사람 중 한 명이 그 항아리를 들고 죽은 자를 대신하여 태양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친다. “오 태양이시여, 우리를 통치하시는 주여!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모든 신들이여, 나를 받아 주시고 영원하신 신들과 함께 거할 처소를 내려 주소서. 일생동안 나는 나의 선친께서 일러주신 대로 신들을 철저하게 경배해 왔나이다. 이 육신을 낳아 주신 부모를 존경했고, 누구를 죽이거나 속이거나 누구에게 해를 끼친 일도 없었나이다.” 이와 같이 죽은 자의 선행, 순종, 순결이 신을 향한 탄원의 주 내용이었다.
(2) 행위를 측정하는 도구 - 저울
행위로 인해 죄인이 외롭게 된다는 것은 신비 종교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의 교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러한 사실 자체는 바빌론과 로마 카톨릭 양자의 일치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적다. 그도 그럴 것이 카인의 때 이래로 인간의 선행이라든지 자기 의와 관련된 교리는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 언제나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 우리가 상고할만한 것은 양 제도가 사용한 상징이 서로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카톨릭의 전설에 의하면 천사장 미카엘은 하나님께로부터 공의의 저울을 위탁받았다는데, 그 저울의 양 접시에는 죽은 자가 행한 착한 일과 나쁜 일이 올려지며 어느 쪽이 더 무거우냐에 따라 그 사람은 의롭다고 여겨지거나 저주를 받게 된다고 한다.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한 갈대아 신비 종교의 교리는 이집트의 유물들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데, 천사장 성 미가엘 대신 아누비스(Anubis) 신에게 저울이 주어졌다는 점과 선행과 악행이 각각 따로 저울에 올려졌다가 양자의 수치를 비교하여 그에 상응한 심판이 내려진다는 점 외에는 카톨릭의 신화와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죽은 자들이 낙원에 들어가기 전에 받는 심판의 장면을 그가 묘사한 것이다.
“안내자 세르베루스(Cerberus)는 입구에 서 있는데 그 입구에는 정의의 저울이 세워져 있다. 그 저울을 관리하는 사람은 아누비스인데 그는 저울의 한 쪽에 죽은 자의 착한 행실을 나타내는 병을, 나머지 한 쪽에는 진실을 상징하는 병을 달아 놓고 입장을 허가한다. 선행이 모자라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으며 죽은 자를 심판하는 오시리스는 저주의 표시로서 그의 홀을 기울여 당사자에게 심판을 언도한다. 그 사람은 돼지나 다른 부정한 짐승의 모양을 입고 땅으로 되돌아가도록 저주받는 것이다... 그러나 (옆에서 아누비스가 저울질한 결과를 기록하는) 토드(Thoth)가 기록한 그의 행실의 합계에서 선행이 더 우세하여 축복된 자의 거처로 갈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면 호루스(Horus)는 토드의 장부를 들고 그 사람을 오시리스 앞으로 인도한다.”
행위로 의롭게 되는 교리의 상징물 저울은 바빌론에서도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손이 나타나서 벨사살 왕의 멸망을 알리는 글을 벽에 썼을 때 다음과 같이 썼던 것이다 - “메네 메네 테켈 우바르신” “그대는 저울에 올려졌으며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허드(Hurd) 주교는 중국인들이 지옥과 그곳에 사는 괴물들을 묘사해 놓은 것을 보면 “그들 중 하나는 항상 자기의 선행과 악행을 저울에 달고 있는 죄인을 나타내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리스 신화에서도 그와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3) 성경이 제시하는 의 - 하나님 자신의 의
그러나 그러한 선행으로써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은 우선 그 본질부터가 부패한 것이며, 깨어 있는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으로 인해 영원한 세계에서의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떠한 평안이나 확신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제아무리 도덕적이고 선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쌓은 “선행의 합계”가 양심이 말해 주는 그의 죄의 양에 비해 월등히 많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해 인간이 제시하는 모든 방법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하나님의 계획과 얼마나 다른가? 그것은 인간의 선행과는 절대로 관계가 없고, 오직 믿는 자 모두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 자신의 의와 관계가 있으며, 그 분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써 그 분께 참으로 결합된 자들을 단번에 영원히 “모든 저주로부터” 구원받게 하는 계획인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분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그들이 영원히 구원받았는지에 관하여 의심과 암흑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관한 한 그 분의 백성 모두를 위해 가장 확실하고 견고한 기반을 놓으셨고,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알고” 또 믿었으니』(요일4: 16)라고 했으며,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천사들이나 정사나 권세나 현재 일이나 미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떤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으리라』(롬8:38,39)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분명하다.
하나님 안에서의 그러한 확신과 구원의 확신에 반대하여 이교도 및 로마 카톨릭에서는 영적 압제가 세대를 거듭하여 존재해 왔다. 그 목적은 언제나 신도들을 살아 계시며 자비로우신 구세주와의 직접적인 교제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자연히 구원의 확신과도 멀어지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간 중재자의 필요성을 느끼게끔 하는 것이었다. 절대 무오성을 주장해 온 카톨릭이 중생(重生)과 죄의 용서에 있어서 사제들의 역할에 초자연적인 권세를 부여하고 있다면 그 신도들에게 그들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그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생이 끝나는 때까지 계속해서 의심하는 것을 의무로서 가르치고 있으며, 트렌트 종교회의의 한 신앙 개조는 “어떤 사람도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했는지에 대해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라고 단정짓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이 교령 자체가 로마 카톨릭의 사기성을 뚜렷이 증명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이 침례를 통해 거듭나며 죄악으로부터 깨끗케 된다고 주장하는 한편 모든 신도들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는, 양립할 수 없는 주장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4) 인간 중재자의 참 목적
이교도의 종교 체제 안에서는 사제들만이 아누비스의 저울에 관여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죄를 참회하는 자리에서 시시때때로 오시리스의 심판대를 모방한 “저울질”이 연출되었다. 사제는 고해자의 선행과 악행을 심판하는데, 그의 권한과 영향력은 단순히 신도의 공포심에 기초한 것이므로 그는 저울이 대체적으로 악행 쪽으로 기울어지게끔 신경을 쓴다. 그러므로써 신도들이 자신의 말에 더욱 복종하여 반대쪽 저울에 쌓일 선행을 더 많이 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선행을 할 것인지를 정해주는 것도 사제 자신이었으므로 그의 지대한 관심사는 자기 자신의 부나 권력을 증대시키는 데 도움이 될 일들을 지정해 주는 것이었으며, 신도의 선행과 악행을 이리저리 저울질하면서 결국은 신도 자신뿐 아니라 그 자손까지 갚아야 할 커다란 분량의 선행을 요구하였다. 그렇지 않고 신도들이 만일 자신의 구원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신하게끔 된다면 사제들은 그들에게 돌아올 몫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될 위험한 일이었다.
루이 16세의 고해신부인 페르 라 셰즈(Pere La Chaise)가 쓴 유명한 편지에는 그가 방탕한 군주로부터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 데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사용한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왕의 죄없는 위그노 신하들은 참혹한 일을 당해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성 미가엘의 저울에 대한 두려움이 그가 기대했던 결과를 가져오는 데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알 수 있다. 능란한 예수회 신부는 왕이 저질렀던 흉악한 죄악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가 내게 참회하러 올 때마다 나는 지옥에 대한 공포로 그의 귀를 뒤흔들어 놓았고 그에게 해결책을 제시하기 전에 그로 하여금 한숨을 쉬고 두려워 떨도록 하였다. 그의 반응을 보고 나는 그가 여전히 나에게 의지하고 있으며 내 명령에 복종할 자세가 되어 있음을 알았다. 따라서 나는 그에게 그의 죄악이 얼마나 사악한가를 보여 주고 그 죄를 상쇄할 만큼의 선행을 하지 않는 한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으름짱을 놓았다. 결국 그는 자기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고 나는 그가 그의 왕국에서 모든 이교도들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천사장 성 미가엘의 저울에 올려진 죄악과 평형을 이루어 줄 “선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왕은 이에 동의했고 그 “선한 행동”은 실행되어 “이교도”들은 그 땅에서 박멸되었으며 왕은 “죄를 용서받았다.”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이교도와 로마 카톨릭은 하나같이 사람의 혼을 상품으로 삼았다(계18:13). 전자는 아누비스의 저울로, 후자는 성 미가엘의 저울로써 배교한 에브라임에 대한 하나님의 묘사와 정확히 부합된다. 『그는 상인이요 그의 손에는 속임수의 저울을 가지고 부정한 짓을 좋아하는도다』(호세아12:7) 이집트의 아누비스는 희랍의 머큐리와 동일 인물인데 머큐리는 “도둑들의 신”이다. 성 미가엘은 카톨릭 체제 안에서 그와 똑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성 미가엘과 그의 저울, 그리고 인간이 선행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교리를 가지고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집이라 부르는 곳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었던 것이다. 돈을 빼앗는 것은 악하다. 그러나 그들의 혼을 훔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악한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