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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믿음직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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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11월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 대해 자랑하시며, 『내가 그를 아나니, 그가 자기 자식들과 자기 뒤에 올 자기 집안 식구들에게 명하겠고 그들은 주의 도를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리니, 이는 주가 아브라함에 대해 말했던 바를 그에게 가져오려 함이라.』(창 18:19)고 말씀하셨다. 쉽게 말해서,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은 믿음직한 사람이지! 아브라함이라면 옳은 일을 할 것이라 믿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밥 존스 시니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음직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장 큰 능력이다." 즉 믿음직함이 다른 재능들보다도 더 큰 능력인 것이다. 사도 바울도 말했다. 『청지기에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실한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이라』(고전 4:2).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성공하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그분께서 보시기에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 그렇다면 "믿음직함"(Dependability)이란 무슨 뜻인가? 간단히 말해서 "그 대상을 믿고 기댈 수 있다."는 말이다. 필자가 설교할 때 자주 쓰는 예화 중 하나는, 목사인 내가 강단에 온몸의 체중을 다 실으면서 기대는 모습이다. 그렇게 강단에 체중을 실을 수 있는 것은 은연중에 내가 그것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성경에 관한 한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성경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NASV, RSV, NLT, CEV, NIV, NKJV 등의 변개된 영어 성서들은 신뢰할 수 있는 성경이 못 된다(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 등의 변개된 한글 성서들도 마찬가지임). 이런 변개된 성서들은 성경의 단어들을 바꿔서 성경의 진리 자체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적게는 500개(NKJV), 대부분은 6,400개 정도의 단어를 삭제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형성하는 중요한 교리들을 공격한다. 전혀 신뢰할 수 없는 것들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진리만을 전달해야 한다.
믿음직하다는 것은, 그 대상을 신뢰했을 때 마땅히 기대되는 일을 해 줄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작은 것 하나가 신뢰할 만한 상태가 못 되었을 때, 일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잘못되어질 수 있다. 이런 글귀가 있다. 『못 하나가 빠져서 말발굽을 잃고 / 말발굽 하나가 없어 말을 잃게 되었다네. / 말이 없으면 기수를 보내지 못하고 / 기수가 없으면 전갈을 못 보내며 / 전갈이 없으면 전투에서 패하고 / 전투에서 패하자 왕국을 상실했다네. / 이 모든 일이 말발굽의 못 하나가 잘못되어 일어난 일이라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직함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가? 바울은 디모데를 가르치고 진리의 지식을 맡기면서 말하기를, 『그리고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고 했다. 소위 "사도적 계승"이라는 것은 로마카톨릭과 무관하다.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를 가르쳤고 그들이 다시 신실한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그 사람들 또한 믿음직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서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이런 식으로 해서 성경을 믿는 믿음과 건전한 교리가 여러 세대를 거쳐 이어져 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음이 확산되도록 위탁하시고, 성도들이 믿음 안에 굳게 설 수 있도록 그 일을 위탁하신 이들이 바로 이런 신실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는 "불이 각 사람의 일한 것이 어떤 종류인지 시험할" 것이다(고전 3:1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의 크기나 양이 아니라 그 일의 "질"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다. 만약 세상적인 기준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사역을 판단한다면 그들은 "실패자"로 여겨질 것이다. 즉 예수님이나 바울이나 모두 당대에는 "공공의 적"으로 여겨졌고, 아내도 자식도 집도 자동차도 이렇다 할 일자리도 연금도 은행 계좌도 없이 사셨으며, 어느 정도는 다른 사람의 지원을 받기도 하셨지만, 국가가 베푸는 복지나 의료 혜택 같은 것은 전혀 누리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보시기에 예수님과 사도 바울을 성공한 사람들로 여기셨으니, 이는 두 분 모두 "신실"하셨기 때문이다(히 3:1,2, 딤전 1:12).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말씀을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신실하게 전파하셨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욥을 지극히 신뢰하셨기에 사탄이 그를 시험한다 해도 걱정할 것이 전혀 없다고 여기셨다(욥 1:8-12). 욥은 믿음직했고 하나님께서 신뢰하실 수 있는 그런 성도였다. 고난을 당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을지언정(욥 3:1), 욥은 마귀가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저주하지는 않았다(욥 2:9,10).
믿음직함은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인데,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이 구원받기 위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전혀 없다. 다른 누군가를 의지해야 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히 7:25).
믿음직함은 "지역 교회" 안에서도 필요하다. 필자가 목사로 사역하는 기간 동안, 나는 교회 성도들이 나를 지원할 것이라 믿었고 성도들은 나를 신뢰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먹이고 진리만을 전파할 것이라고 여겼다. 지역 교회 안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가정"에서도 믿음직함이 필요하다. 오늘날 이혼율이 높은 것은, 배우자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혹은 두 사람 모두 믿음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돈 씀씀이나 가정에서 의무를 다함에 있어 믿음직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된다.
다른 어떤 상황보다도 믿음직함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은 바로 "전쟁터"이다. 전장에서는 그야말로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가"에 목숨이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미군의 사기가 그렇게 땅바닥까지 떨어진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 미군을 전투 부대에서 "사회적 실험"을 위한 집단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여자들뿐만 아니라 온갖 동성연애자들, 변태성욕자들을 모두 미군에서 복무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런 부대에서는 신뢰나 전우애가 형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남자들과 여자들은 이런 변태성욕자들의 희생자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하게 되고, 이들 변태성욕자들은 군인으로서의 의무와 명예와 부대의 응집력보다는 음행에 더 마음을 두기 때문이다.
"정부" 역시 믿음직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는 사실 신뢰할 만한 대상이 못 된다. 식견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상원의원, 하원의원, 국회의원 등의 정치인들이 정말로 자신의 입장을 잘 대변해 줄 것이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당 후보든, 공화당 후보든 미국 대통령이 미국을 위해 옳은 일을 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다.
또한 믿음직하다고 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을 의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 것이기도 하다. 형제들이여, 당신의 아내는 남편인 당신을, 꾸준히 기도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신뢰하고 있는가? 자매들이여, 당신의 남편은 아내인 당신을, 그가 일터에서 돌아왔을 때 저녁을 준비해 놓고 옷도 깨끗하게 세탁해서 기분 좋게 입을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을 사람으로 신뢰하고 있는가? 당신은 유아방에서 아기들을 돌보는 의무를 신실하게 행하고 있는가? 당신은 구령 모임에 신실하게 참여하여 다른 지체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사람인가? 또한 당신은 돈을 빌렸으면 성실하게 갚고, 당신이 뭔가에 대해 값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으면 그만큼 정확하게 지불하는 그런 사람인가? 과연 당신은 믿음직한 사람인가? 우리가 신실하지 않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우리가 지원하는 선교사가 지원을 받지 못해 선교지에서 돌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고 있다. 남침례교단 소속의 교회들만 해도 일만여 개의 교회들이 1년에 단 한 사람도 구령하지 못하고, 단 한 명에게도 침례를 주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신실함으로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교회 성도들 모두가 당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비율만큼 드리게 될 경우 정말로 교회의 운영이 가능하겠는지 생각해 보라.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가 신약 교회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쟁을 한다. 그들이 그런 불필요한 논쟁을 조장하는 것은 지역 교회에 십일조를 내고 싶지 않아서다. 그렇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불만이라면 마가복음 12:44을 실행해 보라. 과부가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만 드렸다고 얕잡아 보지 말라(막 12:42). 이는 과부가 하나님께 드린 것은 "생계비 전부"였기 때문이다(막 12:44). 십일조가 싫다면 그 과부처럼 월급봉투째로 드리는 것은 어떻겠는가?
결론적으로, 주님께서 당신을 필요해서 쓰시고자 하실 때 당신은 그 일을 기꺼이 수행할 수 있겠는가?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바로 기도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분께서 원하시는 일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실 때, 과연 당신은 신실하게 기도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몇 년 전에 마이애미에 있는 한 신학교의 졸업식에서 설교하도록 초청을 받았었다. 졸업식이 오후 6시여서 오전 6시에 "이스턴 항공"을 타고 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날은 최악의 날이었다. 우선 펜사콜라 공항에서 안개로 인해 비행기가 이륙하지 못했다가 오전 10시 30분이 되어서야 겨우 떠날 수 있었다. 또한 애틀랜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착륙하는 비행기가 많은 관계로 여덟 번이나 공항 주위를 맴돌다가 착륙했고, 예정된 오후 2시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4시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4시 비행기마저 착륙 장치에 문제가 생겨 버렸다. 결국 나를 초청한 사람에게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고, 밤 10시까지 기다렸다가 펜사콜라행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그마저도 착륙하려 할 때 안개가 심해서 펜사콜라가 아닌 모빌 공항에 내려야만 했다. 결국 딸이 그곳까지 마중 나와서 펜사콜라로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믿지 못할 항공편을 믿어서 낭패를 당했던 것이다. 나는 이스턴 항공사의 경영자, 에디 릭켄백커에게 편지를 써서 "환불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질세라 그도 "못 준다!"고 회신을 보내왔지만, 나는 다시 답장을 써서 몇몇 사업가들을 제외하면 나만큼 이스턴 항공을 애용한 고객이 없고 이번이 정식으로 처음 항의하는 것이니 환불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필자는 그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편지 끝에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덧붙였다. 『고난의 때에 신실하지 못한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마치 부러진 이와 탈골된 발 같으니라』(잠 25:19). 나는 결국 환불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죽을 때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 무엇을 신뢰하고 있는가? 갈보리에서 흘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한다면 헛물켜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당신은 믿음직한 사람인가? 주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내가 할 수 없는 어떤 일을 맡기셨다. 당신의 배우자도 자녀들도 친구들도 정부도 목사도 그 일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일을 신실하게 할 수 있는가? 과연 당신은 하나님께 "믿음직한" 사람인가? 『신실한 사자는 그를 보낸 자들에게 마치 추수 때의 차가운 눈과 같아서 주인들의 혼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