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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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사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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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3월호>

부정적 사고의 힘


수년 전,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이 “적극적 사고의 힘”에 관해 책을 썼는데, 그것이 미국을 매료시켰다. 그것은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을 종교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그것은 돈버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실용주의자들에게 매우 유용했다.
당시에 이미 듀웨이, 럿셀, 제임스가 미국교육협회(NEA)와 교육부를 매료시켜 놓은지라, 미국은 이편저편에서 실용주의자들을 양산하고 있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실용주의는 “도덕과는 무관하다.” 때때로 돈을 벌거나, 체면을 지키고, 인기를 얻고,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발명되고 창작된’ 것들 외에는 그것에 도덕적 기준들이란 없는 것이다. 실용주의에는 언제나 “가치규명”과 “행동수정”이 따라다니는데 그것들의 의미는 십계명을 제거하고 당신 자신을 세상 체계에 맞추라는 것이다.
“좋게 좋게” 말하면 ‘긍정적 사고’에는 당신을 치유하고, 당신을 위로하고, 당신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고, 좌절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좋게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상황윤리”는 실용주의자들의 “십계명”이다. 그것은 일종의 월 스트리트-CIA-환경보호국(EPA)-연방긴급시관리국(FEMA)-UN의 철학이다. “만일 그것에 효력이 있다면, 그것은 거룩한 것이다.” 십계명은 그 이유 때문에, 오직 그 이유 때문에 미국 교육 체계 밖으로 내던져져야 했다. 알다시피 십계명 중 여덟 계명이 ‘부정적이며,’ 여기에 “안식일 날을 기억하고”와 연관된 금지사항들을 덧붙인다면 그 중 아홉이 ‘부정적’이다.
이러한 신조는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모든 단체에서 절대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교실이나 법정에 모습을 나타낼 수 없다. 모든 범죄자들과 십대들은 그들의 난잡함에 굴레가 씌워지거나 “제한”이 가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만일 로마서 1-3장이 진리를 말하고 있다면 판사들과 변호사들, 의원들, 대통령들, 치리자들, 교사들, 학자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로마서 1-3장의 90%가 부정적인 것이다.
자, 당신이 당신의 창조주께서 친히 무언가를 실제로 기록하셨음을 처음으로 알게 될 때, 그분이 부정적 사고에 긍정적 사고보다 최소한 두 배는 더 강한 “힘”이 있다고 여기신다는 점을 주목하라. 그분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스피노자, 헤겔, 아인슈타인, 간디, 마호메트, 케네디, 헨리 포드, 다윈, 막스 또는 칸트에 구애받지 않고 그렇게 하시는데, 이는 결국 당신에게 당신의 삶 속의 죄를 보여 줄 “힘”이 십계명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고(긍정적 사고로는 이 일을 절대로 할 수 없다 - 롬 7:7; 3:20), 이것은 “저주”로 끝나는(말 4:6) 이 율법이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데려옴으로써 당신을 영생으로 이끌 수 있음을 또한 드러낸다(갈 3:24).
로마서 1-3,5장과 에베소서 2장, 요한계시록 20,21장, 이사야 64:6, 전도서 7:20, 시편 39:5에 따르면 당신 자신(또는 “인간”)에 대한 ‘긍정적’ 사고는 당신을 불못 속으로 데려다 놓는다.
“참으로”(Yea)라는 말(긍정적)은 어느 성경 역본에서건 창세기 3:1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것을 말한 자는 사탄이다.’
사탄의 일은 ‘부정적 사고자’를 ‘긍정적’ 사고자로 전향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그 일을 했다. 그는 그녀에게 100% 긍정적인 거래를 제안했던 것이다. 그것을 읽어 보라. 『여자가 보니 그 나무가 먹음직하고 보기에도 즐겁고 현명하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인지라. 그녀가 거기에서 그 열매를 따서 먹고 그녀와 함께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니, 그가 먹더라』(창 3:6).
나는 그것을 “읽어 보라”고 말했다.
죄는 긍정적 사고로 시작된다.
이브를 유혹한 것에는 단 하나의 ‘부정적인’ 면도 없다. 주목하라! “먹음직하고... 즐겁고... 현명하게 할 만큼...”이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언급되지 않는다면 어떤 부정적 요소도 연관되지 않을 테지만, 초자연적 존재가 여기에 관련되어 있으며, 이 경우 그 초자연적인 존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이브와 그녀의 남편에게 그것을 먹지 ‘말라고’(부정적) 말씀하셨다. “약간의 예방책”이 340,000,000,000,000,000,000톤의 “저주”의 가치를 지녔음이 드러났으니, 이는 그 저주가 향후 6,000년 동안 충분히 시험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치료법은 초자연적인 분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1945년 이후로 아흔 개의 전쟁이 일어났으며, ‘앞으로 세 번의 전쟁이 더 있을 것이다.’
명백히 말해 긍정적 사고로 성취되는 것은 거의 없으며,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나 성경이 아닌 당신 자신에 관한 긍정적 사고는 바리새인(마 23:30)을 양성한다.
“인간”과 “인류,” 또는 “세상”에 대한 ‘긍정적’ 사고는 20세기에 3개월마다 한 번씩 전쟁을 일으키고, B.C. 4000년과 A.D. 1900년 사이에 평균 열 달에 한 번씩 전쟁을 일으키는 ‘속된 바보’를 만들어낸다.
내 주제는 “부정적 사고의 힘”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이교도들”은 머피(머피의 법칙)와 성령이다(고전 6:9,10, 갈 5:19-21, 롬 1:29-32; 3장, 렘 23장, 마 23장, 요 8장, 계 6-19장, 사 24장, 벧후 2장, 딤후 3,4장, 그리고 전도서).
긍정적 사고의 ‘목표’는 스스로 우쭐해지고, 남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육신에 대해 자랑하고, 친구를 사귀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성공”을 찾거나 “경력”을 쌓고, 거액의 예금 계좌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육신적인 일이며, ‘그 언제든지’ 그것 어디에도 초자연적인 요소가 단 한 가지도 연루되어 있지 않다. 빌립보서 4:8의 가르침은 세계 인구의 90%에게는 주어지지조차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형제들” 간의 연합에 관한 가르침(요 17:21-23) 또한 기껏해야 100명 중 1명에게 주어진 것인데, 이는 그것들이 기록된 때에도 그러했고, 그것들이 기록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다. 구원받지 않은 죄인들이 그것들을 도용해서 “종교적 가르침들”로 사용한다면, 그들과 그것들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그들의 설교자들은 불못에 넣어질 뿐이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길이 있으나, 그 끝은 죽음의 길들이니라』(잠 14:12).
『나에게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되느니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아니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며,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하리니, 그때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하되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하니,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리라』(마 7:21-23).
금세기에 지옥에 가장 빨리 가는 길은 ‘종교’이지만, 그것은 창세기 4장의 카인의 제사 이후로 죽 그래 왔다. 그러니 당신의 구원이 마태복음 7:12이나 마태복음 5-7장 또는 고린도전서 13장, 출애굽기 20장, ‘코란,’ 사도행전 2:38에 있다고 여기라. 그리하면 당신은 그 문들이 굳게 닫혀 있고, 문의 열쇠가 그리스도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계 1:18) 지옥에 있는(부정적)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긍정적 사고의 바로 그 ‘본질’은 “자기 의”이다.
지상의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살전 2:15)를 살해한(행 7:52) 그 살인자들(행 3:15)보다 자기 자신에 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 자들(눅 18:11,12을 보라.)은 없었다.
“자긍심을 가져라!” “당신은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다!” “생각한 것을 실행하라!” “생각이 아름다우면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다!” “타인들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라!”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 “자신을 발견하라!”
이것이 “타락”에 대한 세상의 “치료법”이다(롬 1:28-32; 3:9-18).
여러분의 기독교 대학을 잘생기고, 말쑥하고, 점잖은 그리스도인 청년들로 세워 나가기를 원하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광고’를 낼 때 그 광고에 어여쁘게 미소를 방긋 짓는 십대 “소녀”를 최소한 한 명 혹은 가능하면 두 명 싣는 것을 잊지 말라. 아니면 (훨씬 나을 테니) 어여쁜... 남자 청년을 싣도록 하라.
왜냐고? 성적 충동이 그 이유이다. 성경 공부, 성경적 가르침, 성경 암송이나 성경을 배우는 것을 광고해서는 젊은이들을 결코 모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여성을 보여 주라.’ 그들은 모두 그렇게 한다. 나는 기독교 대학을 위한 그림광고 치고 성경보다 세 배나 큰 여학생의 “얼굴”을 싣지 않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사실, 1960년 이후로, 나는 광고에 성경 사진을 실은 대학에 등록한 학생수가 200명이 넘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모든 구독자들’이 광고를 볼 수 있는 주요 기독교 출판물에서만큼은 그러했다.
긍정적 사고자라면 (많은 이들이 사역자가 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의 경우) 동물적 본능들에 “끌린다”는 것을 안다. ‘그것들은 긍정적이다.’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왜냐하면 그것들을 이용해서 등록자 수를 늘리고 “현금”을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이다. 실용주의, ‘그것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는 곳에서 당신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곳에서 부정적으로 생각할 때 얻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사 5:20; 55:8,9을 보라.)
1. 하나님은 세 경우에 “연합”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데, 주님의 몸(엡 1장, 고전 12장, 갈 4장)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겔 37장, 사 26:2, 렘 33장), 결혼한 구원받은 남자와 구원받은 여자(엡 5장, 창 2장)가 바로 그것이다.
2. 하나님은 세 경우에 “평화”(peace)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주님의 아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앉으실 때의 전 세계적인 평화(계 19:16, 시 2,46장, 슼 8,14장, 눅 1:31-33, 겔 40-48장)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구원받은 죄인들 간의 화평(peace)(고전 1,6장, 롬 14장, 빌 1장), 개인이 그와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이루기 위한 피의 대속을 믿으며 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그 사람 안에서 느껴지는 내적 평안(롬 5:1)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성경에 있는 긍정적 사고의 ‘한계’이다. 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모두 ‘부정적’이다.
당신은 그 성경에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라고 배웠는가? 부정적으로다.
세상, 그것은 악하고(창 1장), 그것은 덧없고(벧후 3장), 그것은 적그리스도적이고(요 17장), 하나님을 대적하며(고후 4장), 그것의 목적지는 바삭바삭하게 타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부정적 사고의 힘”인 것이다.
자, 당신은 창세기 3:1 이후로 실제로 문제가 되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 문제는 긍정적 사고가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기록하신 “말씀들”에 관해 긍정적이지 않다면, 그것이 결코 “진리”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말씀들이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말하자면 일단 그것이 당신과 당신의 우상들(종교, 섹스, 마약, 돈, 교육 등)을 정죄한다는 이유로 그 말씀들을 거부한다면 당신은 끝난 것이다. 당신은 성별된 그리스도인으로 끝나든지 아니면 성경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기 전에 이미 지옥을 향해 가고 있던 잃어버린 죄인으로 끝날 것이다.
인간과 인류와 세상에 관한 진리를 찾는 길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진리를 찾는 길은 ‘그분이 말씀하신 것’에 관해 그것이 무엇을 말씀하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1온스의 부정적인 면이 1파운드의 긍정적인 면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1. 에이즈를 치료하는 최선책은 절대로 ‘그것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2. 전쟁을 종식시키는 최선책은 절대로 ‘그것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다.
3. 지옥에서 벗어나는 최선책은 그것이 존재하고 있고 당신이 그것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4. “아파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죽는 것은 “회복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아파하는” 한,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종교의 진화, 사회의 진화, 육체의 진화, 감정의 진화, 과학의 진화, 영의 진화 그리고 우주의 진화를 믿는 이들은 다름아닌 ‘긍정적 사고자’들이다. 그들은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이다(약 4:1-4). “자부심”과 “자아개발,” “자아실현,” “자만심”을 강요하는 자들은 실제로는 “무신론자들”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대신 인간이 스스로 그 모든 일을 대행하는 것이다.
이런 “자아”(self)와 관련된 일이 진행될 때, 하나님의 말씀은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와 같은 정욕적이고 육신적인 무신론적 “혼란”에 대해 훌륭한 ‘부정적’ 입장, 즉 ‘성경적 입장’을 취할 때 우리가 깨닫는 것은, 교육받은 육신도 여전히 육신이고, 세련된 육신도 여전히 육신이고, 잘 훈련된 육신도 여전히 육신이며, 종교적인 육신도 여전히 육신인 이유가 “모든 육체가 풀이기” 때문이란 것이고, 부도덕한 육신이 육신인 것은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요 3:7).
『자신의 육신에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은 것을 거두고』(갈 6:8).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나』(롬 8:5).
『율법의 행위로는 그분 앞에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롬 3:20).
『그들은 모든 육체에게 가증함이 되리라』(사 66:24).
부정적이고, 부정적이고, 부정적이고, 부정적이며, 더 부정적이다.
그것이 바로 “부정적 사고의 힘”인 것이다.

추신 : 그러나 만일 “무엇이든지 ‘사랑스러운’ 것들을 생각하고” 싶다면, 어여쁜 그리스도인 ‘소녀들’을 잊지 말기 바란다!(빌 4:8)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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