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칼럼 분류
사탄을 벤치마킹한 가짜 목사
컨텐츠 정보
- 75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1월호>
당신은 소위 “목사”라는 이가 성도들에게 “사탄의 전략을 훔쳐보자.”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그런데 그와 같은 글이 국민일보에 올라와 있어 소개한다. 「교회를 떠나기로 했다는 이에게 묻는다. “왜 교회를 떠나요?” “하나님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 “그럼, 정말 하나님을 안 떠날 수 있어요?” “글쎄...” “그런데 왜 떠나요?” “하나님은 교회를 떠나실 것 같지가 않아서...” 어린 왕자의 혼잣말이 이어진다. ‘어른들은 정말 골 때린다니까.’ 한 조사에 의하면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많단다. 3040세대 이탈율이 제일 높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그들의 언어로 교회는 후지다. 그들을 붙잡을 방법이 없을까. 간단하다. 사탄의 전략을 훔쳐볼 필요가 있다. 사탄은 아담이 아닌 하와를 유혹했다. 미래학자들은 진즉 3F시대가 온다고 예견했다. ‘여성(Female)’ ‘감성(Feeling)’ ‘상상력(Fiction)’이다. 으뜸은 ‘여성’이다. 사탄은 알았다. 아담보다는 하와가 타깃이었다.」 이 내용은 송길원 “목사”라는 이가 “어린 왕자가 교회에 간다면...”이란 제목으로 기고한 칼럼을 발췌한 것이다. 송 목사는 「금단의 열매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했다. 미각을 자극하고 시각으로 유혹했다. 이어 ‘절대로’ ‘슬기롭게’라는 탐스러운 언어로 청각을 건드린다. 거기다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의 촉각도 함께한다. 오감 마케팅의 원조다.」라면서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비극”을 “교회 마케팅”의 본으로 제시했다. 이브를 유혹한 방식으로 교인들을 유혹하자는 것인데, 그는 교회가 3040세대를 유혹하는 데 실패했다면서 목회자가 교인(구도자)들을 유혹하려면 “불교”와 “카톨릭”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떨까... 정확하게 오감 마케팅 전략을 갖고 있다. 산사(山寺)에 들어서 보라. 자연 풍광이 시선을 끈다. 녹색의 싱그러움이 있다. 사찰 초입엔 시냇물이 흐른다. 다리가 놓여 있다. 속세의 때를 씻고 들어서란다. 사원 건축의 기본이 되는 가람배치를 따른 것이다. 풍경 소리와 범종, 목탁 소리... 소리 공양이다. 생수와 함께 발우공양(鉢盂供養)이 있다. 차와 풀의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발끝에 닿는 흙과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시름을 달랜다. 오감의 유혹이다. 가톨릭도 마찬가지다.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미사향, 그레고리안 찬트, 로사리움 묵주, 성찬이 그렇다. 최근 불교는 ‘나는 솔로’ 방송 프로그램을 차용한 ‘나는 절로’로 선남선녀들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장미꽃 같은 3040세대, 교회의 정원을 가득 채울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이번에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답해준다. “너의 장미꽃이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그 시간’ 때문이야.”」교회와 불교, 카톨릭을 “구도자”의 관점으로 접근한 송 목사는 거듭나지 않은 종교다원주의자다. 그런 그가 언급한 <어린 왕자>는 비행사이며 작가인 생텍쥐페리가 1943년 발표한 동화로, “실존주의” 사상과 연결되는 작품이다. “실존주의”는 본질을 추구하기보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이 현실 세계에서 자신이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철학이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말로 대표된다.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해 주었던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무한의 자유이며, 이 허무의 바다에서 인간을 구출하는 것은 그의 결단이고 사회참여다.”라고 했다. 이 사상은 한마디로 “잃어버린 인간성을 찾자,” “그래도 인간이 할 수 있다” 정도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런 몸부림이 인간 세계에서 노정되는 현상과 문제에 대해 일부 설명이 가능하고 탈출구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일시적, 한정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실존주의는 진리가 아니다. 『아무도 너희를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그것들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른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니니라』(골 2:8). 인간은 발전하는 문명 속에서 “인간 소외와 고독,” 전쟁의 참상 속에서 “인간의 잔혹함”을 보면서 자신의 죄악에 대해 심판을 받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들은 늘 저지르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뿐이다(전 1:9,10).
청교도 목사 존 길(John Gill, 1697-1771)은 “타락한 인간이 철학을 지지할 때는 자신의 마음을 신으로 삼는다.”고 했다. 자신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잘 해 보려는 어린 왕자는 종교인이요, 철학자요, 인본주의자다. 철학자는 자기 두뇌를 모든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로 숭상하는 우상 숭배자다.
세상 일간지에서 동화 속 철학자의 말이나 예찬한 송 목사는 마귀에게 미혹된 종교다원주의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교회가 3040세대를 유혹하는 데 실패했다면서 불교와 카톨릭의 “오감 마케팅 전략”을 벤치마킹하자고 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이브를 유혹했던 사탄이 오감 마케팅의 원조라면서 “사탄의 전략을 훔쳐보자”고까지 했다. 이 “골 때리는” 거듭나지 않은 자칭 목사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절간이나 성당을 기웃거리는 “구도자”로 보고 있다. 구도자의 사전적 의미는 “진리나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이다. 구도자들이 진리에 도달하거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렇기에 송 목사 같은 이들에게는 기독교도 도(道)에 이르는 한 가지 방법이고, 불교나 카톨릭도 도에 이르는 여러 가지 방법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자들이 만나는 “하나님”은 성경에 계시된 참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이 세상의 신인 “사탄”이다. 『그들 가운데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느니라』(고후 4:4). 그러한 자들이 이르는 곳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기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들이 가게 될 영원한 지옥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 종교들의 생각과 전통으로는 참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을 지으신 분을 계시하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된(엡 2:12) 죄인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어(계 1:5)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경에 계시된 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여, 자신이 죄로 인해 지옥에서 처절하게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면(롬 10:9,10), 바로 그 순간 성령님께서 그 죄인의 몸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의 죽었던 영을 살리시고 죄의 몸에 붙어 있던 혼을 몸에서 분리시켜 주시는 것이다(골 2:11). 그렇게 되면 그는 옛 사람(육신)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예수 그리스도)을 입게 되는데(골 3:9-11), 그의 영은 새 사람(예수 그리스도)과 합하여 한 영이 된다(고전 6:17).
성경적으로 이와 같은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영으로 그 사람 안에 거하시지 않는 사람은, 비록 그가 “목사”라 할지라도 지옥에 가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성경의 용어들을 사용해 가며 그리스도인들과 비슷하게 말하고 비슷하게 행동한다 해도, 그 사람은 주님께서 보실 때 죽은 자요, 마귀의 자식이며, 하나님의 원수에 불과한 것이다.
교회가 3040세대를 유혹하는 데 실패했다고 한탄하는 자칭 목사는 알아야 한다. 교회에서 재미를 못 느껴서 떠나는 자들은 그가 3040세대든, 5060세대든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오감을 만족시킬 수 없어서 교회를 떠난 것이라면 그 사람은 마지막 날들에 육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교회 안의 죄인에 불과한 것이다. 『또 이것을 알라.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오리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딤후 3:1,2,4,5). 지역 교회는 결코 죄인들의 오감을 만족시켜 주는 곳이 아니다. 죄인들에게 바른 말씀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선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역 교회의 사명이다. 세상 교회들과 그 교회들을 이끄는 가짜 목사들이 이 점을 알 수 있겠는가? 마귀들에게 제사하는(고전 10:20) 산사(山寺)의 자연 풍광, 녹색의 싱그러움, 사찰 초입의 시냇물과 다리, 사원 건축의 가람배치, 풍경 소리와 범종, 목탁 소리, 소리 공양, 발우공양, 또 역시나 『마귀들의 거처가 되었고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요, 모든 더럽고 가증한 새의 소굴』(계 18:2)인 카톨릭의 스테인드글라스와 미사향, 그레고리안 찬트, 로사리움 묵주, 성찬 같은 것이나 애찬하며 오감 마케팅을 가르치는 자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사이겠는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추구해야 할 “오감”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갈보리 십자가와 죄인들이 불타는 지옥 그림이 그려진 “배너”(시각)와 죄인들에게 복음을 외치는 “거리설교”(청각), 거리의 행인들에게 나눠 주는 “전도지”(촉각), 그들이 읽고 맛보게 될 “하나님의 말씀”(미각), 그리고 복음의 말씀에서 흘러나오는 “지식의 향기”(후각)이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거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여 죄인들을 주님께로 이겨오고, 그들을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로 인도하여 양육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오감 마케팅이다. 교회들이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다니다가 절간에도 가 보고 성당에도 들러 보는 지옥의 자식들을 양산하는 곳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