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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회개, 오지 않는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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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10월호>
지난 8월 24일 오전 5시, 서울역 광장에서 미스바 회개성령대성회가 개최됐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주제 아래 약 5천여 명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위해 모여든 것인데, 이들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불길이 회개에서 시작되었음을 강조하며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인 책임, 도덕적인 책임을 다하지 않음에 참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최자들은 참된 마음으로 회개하여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부흥의 주역이 되기를 소망하며 “미스바 성령대성회 공동 기도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공동 기도문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할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외형적 성장에 치우쳐 거룩함을 잃었으며, 연합하지 못한 것을 “회개”했다. 또한 인간 중심의 가치관과 경쟁으로 창조질서를 파괴하여 기후와 인구 위기를 초래했고, 약자를 돌보지 않고 왜곡된 경제 구조를 바로잡지 못한 것을 “회개”했으며, 갈등 속에서 평화의 중재자가 되지 못한 것도 “회개”했다.그 다음 달인 9월 8일 오후 4시에도 부산 해운대 광장에서 “2024 해운대성령대집회”가 개최됐다. 부산의 1,800여 교회를 비롯해 울산과 경남 지역 그리고 전국 33개 지역 교계가 참여해 약 10만 명 정도가 모인 대규모 집회였다. 이들도 “평양대부흥운동”을 언급하며 “회개”를 통해 영적 각성과 부흥, 그리고 민족의 복음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집회에서 어떤 목사는 회개는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시작하므로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잃지 않도록 두려워하라고 말했으며, 행위적인 열심을 계속하라고 전파했다. 이들 또한 마찬가지로 “9.8 해운대 성명”을 냈는데,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망각한 교회의 잘못을 인정하며 생활, 경제, 문화, 미래, 가정, 이웃, 도시에 대해서 “회개”했다.
위와 같은 형식의 집회들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평양대부흥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새벽기도회를 진행하던 도중 회중 앞에서 길선주 목사가 공개적인 회개를 한 적이 있는데,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이 회개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왔고 많은 회심자와 세례 교인이 나타났다는 것이 이 부흥운동의 시초인 것이다. 길선주는 새벽기도회를 한국식 기독교의 독특한 문화로 정착시킨 인물로서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지만 그의 영적인 열매는 처참하다. 그는 한국 교회 안에 성경에 없는 새벽기도회와 통성기도, 철야기도회 같은 샤머니즘적 실행과 기독교가 섞인 종교 행위들을 탄생시켰다. 또한 선행이나 계명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구원관을 자리 잡게 하여 많은 이들을 구원에서 멀어지게 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시작한 평양대부흥운동은 바른 복음과 바른 말씀이 없었기에 성경적인 부흥운동이 될 수 없었다. 그로부터 100년을 훌쩍 넘긴 오늘날에도 평양대부흥운동의 후계를 자처하는 많은 한국식 기도회가 열리나 그 뿌리를 바른 말씀과 바른 복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들이 원하는 부흥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을 뿐이다.
배교한 기독교계가 현재 부르짖고 있는 “회개”는 성경적이지 않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죄악 속에서 살던 삶, 육신적으로 살던 삶,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삶에서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회적인 역할을 다하지 못해서 슬퍼하는 것이나, 교회가 악한 현 세상에서 영향력을 잃는 것 때문에 회개하는 것은 결국 세상을 이전보다 더 사랑하자는 것이기에 성경적인 회개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알지 못해 세상과 타협한 삶을 살았음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진정으로 회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회개는 하나님의 방식에 따른 죄에 대한 태도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에(고후 7:9) 진정한 부흥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집회에 모인 사람들처럼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슬퍼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죄에 대해 슬퍼할 수 있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죄, 양심적으로 살지 못한 죄,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하지 않은 죄 등에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후 7:9).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도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 후회했지만(마 27:3) 성경은 그가 “회개”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세상의 슬픔』(고후 7:10)은 참다운 회개가 아니기에 자신의 잘못에 대해 슬퍼하기만 한 그 사람은 옛 생활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근래의 두 집회에서 나열된 “회개 목록들”은 한국 교회에서 수십 년간 들어왔던 것으로서 결코 신선하지 않으며, 그들은 앞으로도 똑같은 주제를 놓고서 “회개 쇼”를 벌일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회개한다고만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회개에는 대가가 따른다. 옳게 행하는 것, 옳게 생각하는 것, 옳게 행동하는 것, 옳게 말하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성경을 통해 진리를 배워 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성경대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 9:23). 배교한 교회들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든 예전과 똑같은 모습을 답보하고 있다. 회개를 외치지만 자기 손으로 붙잡고 있는 “세상”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대형 교회들은 언제나 교회의 사회적인 의무에만 매몰되어 있어 잃어버린 혼들을 구령해서 양육해야 하는 의무를 저버리고 있다. 정치, 교육, 사회 등 세상 모든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원하면서 사람의 혼을 다루는 일에는 그 어떠한 관심도 갖지 않는다. 지난 2천 년 교회사에서 회개운동은 항상 있어 왔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옛 생활을 포기하지 않는 지금의 교회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부흥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오늘날 말로만 회개를 부르짖는 무지한 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른 복음”과 “바른 말씀”이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하나님께 국가를 위해 통성기도를 하거나, 무더운 날씨에 수천 명이 모여 종교 행사를 갖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이 나라에는 그와 같은 종교 운동이 수없이 있어 왔지만 이 민족이 하나님 앞에 성경적으로 부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국 교회는 항상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기에 바빴지 성경에서 그 해결점을 찾으려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교회를 다니든 안 다니든 “바른 복음”이 필요하다. 죄를 반복해서 지음으로써 죄에서 자유롭게 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죄인은 자신이 죽어서 지옥에 갈 운명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자기가 치러야 할 죗값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함으로써 구원받아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새 사람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받기 전에 죄를 사랑하고 이기적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던 옛 모습을 벗어버리게 되는데(엡 4:24), 이로써 세상에 대한 그의 시선도 달라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한(요 15:18)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는 성경의 명령에 따라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받고 세상으로부터 성별되지 않고서는 성경적인 부흥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집회들을 인도한 목사들도 비성경적인 교단 교리에 따라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자신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자들이 어떻게 집회에 모인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알려 줄 수 있겠는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눅 6:39)라는 말씀이 정확히 이뤄지지 않겠는가?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한 사람의 개종자를 얻으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얻고 나면 그를 너희보다 두 배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때문이라』(마 23:15). 성경대로 믿는 새 사람을 탄생시키는 바른 복음이 없다면 올바른 부흥이 시작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한국 교회에 참된 회개가 있으려면 반드시 변개되지 않은 “바른 말씀”이 있어야 한다. 민족적인 부흥이 일어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민족에게 선포되어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유다의 부흥을 이끌었던 요시야왕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민족적인 변화를 가져왔다(왕하 23:2-14). 한국 교회가 변개된 개역성경을 버리고 변개되지 않은 <한글킹제임스성경>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삼는다면 성경적인 부흥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다(마 7:24,25). 그 말씀이 변질되었다면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회개하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모순이다. 바른 복음도, 바른 말씀도 없는 종교 행위는 지옥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이를 무시하고 교인들을 잘못 이끈 목사들이야말로 하나님께 회개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그들이 변하지 않으면 한국 교회에는 희망이 없다. 진리를 가로막고 서서 방해하는 자들이 바로 그 자칭 목사들이기 때문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