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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낮추시고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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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5월호>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보통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년에서 3년 사이에 군에 입대한다. 그 시기에 흔히들 나누는 대화 주제는 “언제 입대하느냐?” 하는 문제다. 입대 시기가 학업이나 직장 문제와 잘 맞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군대 내 같은 또래보다 일 년 더 늦게 입대하면 자기보다 한두 살 더 어린 선임병들에게 존댓말을 해야 하고, 또 그들이 반말로 하는 명령도 듣고 복종도 해야 하는데, 그런 일은 예나 지금이나 젊은 혈기를 지닌 남자에게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20대 후반에 입대한 병사들 중에 병영 안에서 총기 난사, 탈영, 폭행 같은 문제를 일으킨 병사들이 있었는데, 죄인들 안에 역사하는 그들의 아비 마귀로부터 물려받은 파괴적인 성품이 심하게 상한 그들의 자존심 사이로 강렬하게 분출된 것이다.필자도 직장을 다니다가 20대 후반에 입대했는데, 짧게 깎은 머리에 얼굴만 봐서는 나이가 잘 분간되지 않는지라 서로 친해질 때까지는 훈련소 동기들끼리도 나이를 알지 못했다. 동기 훈련병 중에는 다른 동기보다 한두 살 더 많은 23세의 훈련병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다른 동기들이 자기에게 반말하는 것을 굉장히 불쾌하게 여긴 나머지 “나이도 어린 자식들이 반말하면서 말을 건다”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의 군 생활은 앞으로 순탄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그것은 그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필자가 배치받은 부대의 선임병 중 하나는 “나이 많이 먹고 늦게 군대 들어와서 어린애들한테 욕먹는 게 억울하냐? 억울하면 일찍 들어오지 그랬냐!”면서 윽박질렀다.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수모는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로 다른 여러 좋은 전우들과 함께 즐겁게 복무할 수 있었고 아무 탈 없이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다(딤전 3:16). 육신으로 나타나시되 처녀에게서 나셨고, 으리으리한 왕궁이나 귀족들의 집안이 아닌 초라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다. 특히 “다윗의 씨”에서 나시어(롬 1:3)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는데(빌 2:7), 온 우주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께서 자기가 만든 피조물의 아들로 불리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복음서 곳곳에서 “다윗의 아들”로 불리셨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요셉의 아들”로, 때로는 “사마리아인”으로 불리셨고, 심지어 “마귀 들리고”(요 7:20) “미친”(막 3:21)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으시며 모독을 당하시기까지 했다. 마귀는 광야에서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눅 4:3,9)이라고 말하면서 그분의 정체성을 두고 두 번이나 도전했다. 이것은 그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면서도 그런 식으로 그분을 충동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려는 계략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셨던 바로 그 순간까지도 마귀는 주변 사람들의 조롱을 통해 예수님을 공격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고 조롱한 것에 대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진노가 자신의 머리 위에 머물러 있는지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는 실신하고 말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시인함으로써 구원받은 사람들의 사례가 사복음서에 많이 등장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아들을 무시하고 경배하지 않은 사람들의 머리 위에 머무른 격분과 진노가 마지막 날에 자비 없는 심판으로 쏟아질 것도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시 2:12).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을 그분의 격에 맞지 않게 대한다는 것은 실로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셨다. 침례인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침례를 받겠다고 하셨을 때 그분을 말리며 이렇게 말씀드렸다. 『내가 주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께서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해 침례에 순종하셨다(마 3:15,16). 그뿐만 아니라 온 우주와 생태계를 만드신 전능하신 설계자께서는 일개 가난한 목수인 요셉과 그분의 모친에게도 순종하셨다(눅 2:51).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대하시며 존경받기에 합당하신 이유는 “신성”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인성”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의 완벽한 표준이 되셨기 때문이다. 이분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형상이신 『둘째 사람』(고전 15:47)이시다. “첫째 사람,” 곧 『첫 사람 아담』(고전 15:45)은 불순종함으로써 세상에 사망을 가져왔으나, “둘째 사람,” 곧 『마지막 아담』(고전 15:45)께서는 그분의 전 생애가 오직 순종으로만 가득 차 있었고 불순종에 관한 한 단 하나의 사례도 찾아볼 수 없었다.
흔히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즉 “참 사람 되심”에 관해 자주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보통의 인간과는 전혀 다르신 분이다.”라는 것인데,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육체의 생명인 피”(레 17:14)가 인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으신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행 20:28)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 인간과 똑같으셨기 때문이다. 초림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셨을 뿐만 아니라 “100% 완전한 인간”이셨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느끼는 모든 식욕, 수면욕, 목마름, 피곤함, 기쁨, 슬픔, 감사, 분노, 하나님을 향한 신뢰 등 모든 것을 “연약한 인간”과 똑같이 갖고 계셨다. 그러나 그런 연약함 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고, 생애 가운데 단 한 번도 아버지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를 짓지 않으셨으며,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단 한 번도 속죄제를 드리시거나 참회의 기도를 드리신 적이 없었다.
이렇게 항상 “거룩함”을 유지하신 목적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시거나 잘난 척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자 중의 남자”요, “위대한 인자”이신 이유다. 그리고 성경의 예언을 온전히 이루시고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셔서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갖고 계셨던 영광을 다시 얻으셨다(요 17:5). 만일 지금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해서 보게 된다면, 그분을 가리켜 단순히 “사람”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계 1:13-18). 이런 영광을 얻으실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즐거움을 위해 십자가를 견디셨고 수치를 개의치 않으셨는데, 바로 이분을 우리는 “구주”와 “주”로 부르면서 섬기고 있고, 또 사랑하며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그리스도인,”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확신하는 성도들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자세”이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셨다. 『자기 자신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만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참되며 그 안에 아무 불의도 없느니라』(요 7:18). 주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에 대해 때가 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타내 보이실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기에 자신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목적에만 집중하셨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사실을 언제든지 사람들에게 무력으로 나타내 보이실 수 있었다. 이에 하늘에서는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이 명령을 받기 위해 대기 중이었는데,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를 드리면 당장이라도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시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마 26:53). 소돔과 고모라 때 하셨던 것처럼 언제라도 하늘에서 불과 유황을 내리셔서 자신을 대적하는 종교적인 위선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을 깔끔하게 청소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정하신 때, 즉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리실 그때까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선포하지 않으셨다(롬 1:4). 심지어 변형산에서 그분의 영광을 미리 봤던 제자들에게조차 부활 때까지 그것을 함구하라고 명하셨다(마 17:9).
어릴 적 동네에서 술 취한 아저씨들끼리 다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 아저씨들이 가장 많이 썼던 표현은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또는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이었다. 정작 알고 보면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면서도 사람들은 이런 말 하는 것을 좋아한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나은 것처럼 드러내면서 상대를 제압하려 한다. 자신을 높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고 우리 안에 있는 새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옷 입기 원한다면 이런 썩어질 것들로 점철된 겉 사람의 일들을 단호하게 버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절대로 자신을 높이거나 자신의 영광을 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눅 9:23). 제자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갖고 계신 계획과 뜻을 실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만 행하시고(요 8:29), 또 아버지께서 언제나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셨듯이(요 11:42), 주님처럼 행하는 그 성도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그의 기도에 경청하신다(요일 3:21,22).
빌립보서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신 경위가 나온다(6-11절). 이는 그분께서 자신의 영예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셨으며,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자신을 낮추시되 십자가의 죽음, 곧 극악무도한 죄인들의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에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갖고 계셨던 “구원 계획,”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죄인들을 죄로부터 깨끗이 씻어 주시는 일을 시행하심에 있어서 아들 하나님께서 순종하시자 그분의 이름을 높이시고 존귀를 얻게 해 주셨다. 한편 우리를 “고난의 교제”로 부르신 것은, 이곳 지상에 있는 동안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면서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에 동참한 후에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를 알지 못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듯이 그리스도의 대사들인 우리를 멸시한다. 전도지를 나눠 주면 벌레 보듯 취급하고, 예수쟁이나 광대 혹은 교회의 전단지를 나눠 주는 가난한 아르바이트생 정도로 취급하지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들에 개의치 말아야 한다.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자기 자신의 헛된 영광을 구하는(갈 5:26) 일들에 쓸데없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라. 이것은 참으로 큰 유혹이지만 “높이시는 분”께서는 이미 누가 가장 낮은 위치에서 종으로 섬기고 있는지 알고 계시며, 그러한 모든 양상을 회계 장부에 일일이 쓰고 계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종으로서 섬기는 일이 힘겨울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받으신 모든 수치를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갚아 주셨듯이, 그분께서는 절대 잊지 않으시고, 기쁨으로 교제해 주시며,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기도에 경청하시어 보상해 주실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