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해외기사 분류

성경 이해의 핵심 원리, 이중 적용(Double Application) - 2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05월호>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도록 설정해 놓으셨다. 예레미야 38:17-23을 보라. 시드키야는 예레미야에게 주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물었다. 예레미야는 왕에게, 느부캇넷살에게 나아가면 그와 그의 가족이 살고 예루살렘도 구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빌론인들이 예루살렘을 불태우고 여자들을 욕보이고 아이들은 노예가 되고 시드키야는 타국 땅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드키야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섯 번이나 말하고 난 뒤, 예레미야가 시드키야에게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아는가? 『내가 바라오니 내가 왕께 고한 주의 음성에 복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잘될 것이며 왕의 혼이 살리이다』(렘 38:20). 그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바꿀 수도 있었던 것이다. 장로교의 칼빈주의 신학이 여기서 완전히 무너진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모든 “판결들”이 영원하다고 믿지만, 본문에서는 자유의지가 “영원한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이 경우 하나님의 “판결”은 “영원”하지 않고 “조건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가, 한 사람이 말씀에 따라 행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에 달려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두 경우 중 어떻게 진행되더라도 가능하도록 설정해 놓으신 것이다.
성경은 잃어버린 죄인들이 불못으로 갈 것이라고 말하며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한다. 칼빈주의식으로 말하자면 이것이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판결”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원한 판결”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잃어버린 죄인이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아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그 예언이 그에게 성취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판결”을 취소시킬 수 있다. 성령께서 내가 “택함받은 자들” 중의 하나임을 증명하시면서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압도하시도록 기다릴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약속을 신뢰하면 되는 것이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구약이 이와 같이 기록된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신약에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으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초림 때 천국이 가까이 와 있었다. 천국을 가져오시는 왕이 거기 계셨으며 유대인들이 그분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침례인 요한이 엘리야였다고 말하는 말씀과 엘리야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전파한 요한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면 그는 엘리야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랬더라면 변형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앞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되신 일이 『인자가 그의 왕국으로 오는 것』(마 16:28) 즉 재림이 되었을 것이다(벧후 1:16-19). 왜냐하면 초림과 재림이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곱씹어 보라. 이 진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것이다. 초림과 재림을 이렇게 배열해 놓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바뀔 수 있게 하셨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참되신 분이 되실 수 있는 것이다(롬 3:4). 어떤 개인도 어떤 단체도 이와 같은 책을 기록한 적도 없고, 죽었다 살아나도 이런 책을 기록할 수도 없다. 성경과 같은 책을 쓰기 위해서는 서로 다르게 펼쳐질 이중적인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 하나님께서는 이중적인 미래를 보실 수 있으셨으며, 이와 같이 말씀을 배열해 놓으셔서 둘 중의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예언에 단 하나의 실수도 없게 하신 것이다.
성경만이 지금까지 쓰여진 역사책들 중에 절대적 정확성을 가진 유일한 역사책이다. 나머지 역사책들은 온갖 종류의 오류들로 넘쳐나며, 핵폭탄과 같은 위력을 가진 <킹제임스성경>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기로 판결내려 그들의 죄값을 치러주시고 필연적으로 하늘 나라에 가게 하시며, 또 어떤 사람들은 버림받기로 이미 판결을 내려 지옥에 가도록 정죄하시고 그들을 위해서는 죄값을 치르지 않으셨다고 한다면(제한된 속죄), 당신은 칼빈의 엉터리 신학을 당장 버려야 한다. 영원히 버림받기로 정해진 판결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아는가? 간단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마 11:2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또 성령과 신부가 말하기를 “오라.” 하더라. 듣는 자도 “오라.” 말하게 하고, 또 목마른 자도 오게 하며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수를 값없이 마시게 할지어다』(계 22:17).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구원받는 것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벧후 3:9).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이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허용하시는 뜻이 있음을 안다. 곧 하나님께서는 다른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지 거부할지를 스스로 선택하게 하시며 그 선택에 따라 일어나는 일을 허락하신다.
마태복음 23:37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당신이 배운 신학이나 개인적인 의견을 들먹거리지 말라.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찾아 읽고 그대로 믿으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며 너에게 보낸 사람들을 돌로 치는 자야, 마치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함께 모으듯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하나님께서 뭔가를 이루기를 원하셨는데 말하자면 인간의 “주권적 의지“ 때문에 성취되지 못한 것이다. 즉 인간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판결을 변경시킨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판결은 유대인들이 구원받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거절한 것이다.
이번에는 이사야 40:1-5이다. 1-2절은 재림을 말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싸움』은 아직 다 이뤄지지 않았으며 민족으로서 『그녀의 죄악』 또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아마겟돈에서 쳐부실 때까지 용서되지 않는다(사 40:2, 롬 11:26-27). 그러나 3절을 보라. 침례인 요한이 초림 때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선포하는 내용이 나온다(막 1:2, 요 1:23). 그러나 4-5절을 보면 다시 재림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것이다.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는 예를 들어 보자. 모든 유대인들과 카톨릭들과 후천년주의 개신교도가 지난 1,900년 동안 놓친 부분이기도 하다. 시편 89:28-39에는 “깨질 수 없는 언약”이 나오는데(34절), 그 언약이 깨지고 만다(39절).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19-27절은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재림하시는 모습이다. 그런데 38-51절은 그리스도께서 초림 때에 수치를 당하시는 내용이다. 초림과 재림의 순서가 뒤바꿔져 있다. 15,000명의 자칭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성경을 온전히 믿지 않는 자들과 10,000명의 랍비들이 여기서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다. 성령께서 초림과 재림을 뒤바꾸어 말씀하심으로써 성경을 등한시하는 자들의 신학을 망쳐 버리신 것이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은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콧대를 세우는 자를 벌하기도 하신다. 성경은 양날을 가진 칼이며(히 4:12-13), 믿는 자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를 파멸시키기도 한다.
거의 모든 학자들은 이사야 7:14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또 그들은 16절까지 내려가지 않는다. 16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보다 5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18절은 열왕기하 18-19장의 산헤립을 말하며, 앗시리아는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까지 존속하지도 못했다. 조금 더 내려가서 21-22절은 천년왕국에 대한 말씀이다. 이 예언이 성취되는 때는 천년왕국밖에 없다(암 9:13-15 참조). 그러나 24-25절을 보면 다시 산헤립의 침략을 다루고 있다. 초림이 천년왕국뿐만 아니라 산헤립의 침공과 함께 섞여 있으며, 북왕국 열 지파의 포로됨이 그 중간에 제시되어 있다. 전혀 순서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또한 모든 학자들, 곧 구원받았든 아니든 자유주의자든 근본주의자든 학자들은 모두 하박국 3:3과 신명기 33:2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이 두 구절이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신명기 33:2의 중간 부분을 보라. 『그가 수만 성도들과 함께 오셨으니』 무엇에 대한 말씀인가? 바로 재림에 대한 말씀이다. 『보라, 주께서 수만 성도들과 함께 오시나니』(유 1:14).
마찬가지로 신명기 33:28의 『이스라엘은 안전한 곳에 홀로 거할 것이요』라는 말씀을 누가 출애굽기나 민수기나 여호수아에서, 혹은 사복음서에서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은 대환란이 끝나기 전까지는 안전하게 거할 수 없다. 신명기 33:2과 33:28은 출애굽을 소재로 재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중적용인 것이다.
이제 왜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라고 명령하시고(딤후 2:15), 이것이 왜 성경에서 가장 중대한 명령 중의 하나인지 알겠는가? 어리석은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베드로의 메시지와 바울의 메시지를 나누는 데만 혈안이 되어있다. 그들은 한참을 더 배워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올바로 나눈다고 할 때, 때로는 한 구절 안에서도 나눠야 할 때도 있다. (가장 좋은 예가 이사야 61:2이다.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4:18-21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쉼표를 기준으로 초림과 재림을 나누셨다.)
성경의 이중 적용은 신약의 완성 이후로 모든 신학교와 신학대학원의 교수진과 학생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왔다. 그러나 바른 성경을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성령의 조명 아래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서 공부하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러한 오묘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그가 누구에게 교리를 깨닫게 해줄 것인가? 젖을 떼고 젖가슴에서 물러난 자들에게로다』(사 28:9). BB

전체 288 / 10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