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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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성경을 공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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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1월호>

박승용 / 성경침례교회 담임목사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자,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이 구절은 구원받은 성도가 마땅히 공부해야 할 “대상”이 무엇이고, 공부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으며, 또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우선 모든 그리스도인은 평생을 두고 “공부해야 할 대상”이 『진리의 말씀』(딤후 2:15)인 『진리의 성경』(단 10:21)이기에, 항상 배우고 공부해서 『진리의 지식』(딤후 3:7)에 이르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성경에는 “공부”(study)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앞서 언급한 디모데후서 2:15이고, 다른 한 번은 “전도서 12:12”이다. 『내 아들아, 이것들로 더욱 각성하라. 많은 책을 만드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은 공부는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공부”는 디모데후서 2:15과 달리 “세상적인 지식을 쌓는 공부”를 가리킨다. 정말로 『많은 공부』(전 12:12)를 하기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책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공부하면 된다. 1768-1771년에 전체 3권, 2,689페이지의 분량으로 초판이 처음 출간되었고, 이후 증보를 거듭하여 1974-2010년에 전체 32권, 32,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제15판이 출간된 이 책은 엄청난 양의 정보와 자료들을 수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 글을 기고한 4천여 명의 저자들 중 어느 누구도, 4,400만 개의 단어들로 구성된 많은 문장들 가운데 어떤 문장도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에 관해 말해 주지 않는다. 이렇듯 『많은 공부』는 눈을 쇠잔하게 하고 몸을 피곤하게 만들 뿐,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는 결코 이를 수』(딤후 3:7) 없게 한다.

“지식의 증가”야말로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이지만(단 12:4), 인류는 이런 지식을 통해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있다. 특히 “구원”과 “영생”을 얻지 못하는데, 이런 “세상적인 지식들”은 죄인들을 지옥에서 건져 내지 못한다. 셋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할 수도 없다. 이 땅에 “영원한 왕국”과 “지상 낙원”을 마련할 수 없다. “영원한 사랑”도, “영원한 기쁨”도, “영원한 평화”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생명 연장”은 물론 사람들을 『영원무궁토록 통치』(계 22:5)하며 살게 할 수도 없다!
다음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은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딤후 2:15)받기 위해서다. 그래서 “성경을 공부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물론, “현 세상”과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데메트리오』처럼 『진리 그 자체로 좋은 평판』(요삼 1:12)을 받아야 한다. “좋은 평판”(good report)이란, 일종의 “좋은 보고서”(good report)를 말하는데,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모든 것의 심판자』(히 12:23)이신 그리스도께 제출된 “보고서 점수”가 좋지 않으면, 그 『회계』(빌 4:17)와 “결산”의 자리는 최악으로 부끄러운 자리가 될 것이다. “좋은 보고서”를 제출하려면,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하지만 1885년 이후의 모든 “영어 번역본들”(“뉴킹제임스성경” 포함)을 위시하여 대다수의 한글 성경들은 “디모데후서 2:15”을 변개시킴으로, 성경에서 “성경을 공부하라”는 유일한 명령을 파괴시켰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개역한글판성경).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개역개정판).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쳐서」(쉬운성경).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표준새번역). 「correctly handles the word of truth[진리의 말씀을 옳게 다루어서]」(NIV). 변개된 성경을 쓰는 자들이 성경을 공부하는 데 “게으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부하라”는 명령이 삭제되었으니, 성경을 공부할 생각조차 안 하는 것이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을 흉내 내면서 “개역개정판”에 빌붙어 있기 좋아하는 정동수의 “흠정역”은 똑같은 영어 단어 “study”를 전도서 12:12에서는 「공부하는」으로 번역했고, 디모데후서 2:15에서는 「연구하라」로 번역했다. 그렇게 변개함으로써 “성경 공부”를, 강단에 서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목사들이나 신학자들, 신학교 교수 같은 자들만의 “연구 과제”로 만들었고, 일반 교인들에게는 “성경 공부 의무”에 대한 “면죄부”를 발부했다.


“흠정역”에 사용된 단어들은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번역한 <루터성경>의 독일어 “호크도이치”(Hochdeutsch, 독일의 일반 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 또는 언어적인 뉘앙스)와 거리가 멀다. 신약성경 원문의 언어인 “코이네 헬라어”(Koine Greek, “시장 거리” 같은 곳에서 사용되는 평민들의 언어 또는 어감)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흠정역”의 언어는 지극히 학문적이고 사전적인 언어로서 그 언어가 대부분 죽어 있다. 이런 이유로 거리에서 설교하고 구령하는 “복음 전파자들” 중에는 “흠정역”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Final Authority)로 믿는 사람이 없다! “죽은 성경”은 한 명의 “혼”도 살리지 못할 뿐 아니라, 혼들을 주님께로 이겨오는(잠 11:30) “구령자”를 양성하지 못한다.


성경을 번역할 때 “원천 언어”에서 “수용 언어”로 정확하게 옮겨 오는 일은 매우 중요한데, 이를 위한 첫 번째 원칙이 “철저한 직역”이다. “직역”은, “원천 언어”로 된 말이나 글을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에 충실하게” 번역하는 것이지, 단순히 어휘 하나하나를 “사전적인 의미”에 맞게 “일대일”로 옮겨 놓는 작업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원천 언어”인 “영어” <킹제임스성경>의 어휘를 “수용 언어”인 “한글”로 옮겨 올 때, <킹제임스성경>의 각 어휘에 담겨 있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의미를 정확하게 간파하고(이는 영어 <킹제임스성경>이 그 성경의 “원천 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의미를 온전히 전수했기 때문임), 그 의미에 맞는 적절한 “한글 어휘”를 선택하여 성경 안에 올바르게 옮겨 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번역해야 “성경은 성경다운 ‘살아 있는’ 말씀”이 된다. 여기에서 “성경답다”는 말은, 성경 문체의 특징은 물론, 수용 언어의 특징이 잘 살아 있어야 하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정서와 정감이 성경을 읽는 “원어민”에게 “읽는 즉시, 그 언어의 본래 뜻, 있는 그대로의 의미”로 고스란히 전달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은 원천 언어를 수용 언어로 옮겨 놓는 과정에서 생기는 “언어적인 간극”을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로 온전히 극복하고, 그 나라의 고유 언어로 “생동감 있게” 전달될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경 안에 “번역된 어휘들”은 효과적으로 살아 역사하지(살전 2:13) 못한 채 죽어 있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음식』(욥 23:12)이고 『빵』(눅 4:4)인데, 어떤 맛도 나지 않는 “음식”과 “빵”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누구나” 번역할 수 있지만, “아무나” 번역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므로 “어느 누구에게든지” 성경을 번역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권리”를 “아무에게나” 부여하시지 않는다. 그렇게 하실 경우 사람들은 어떤 성경을 사용해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성경을 올바로 공부하여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는 “바른 성경”이 필수적이다! “개역한글판성경”과 “개역개정판” 같은 “변개된 성경”이나 “흠정역” 같은 “짝퉁 성경”으로는 성경을 올바로 배울 수 없다. 배운다 해도 『진리의 지식에는 결코 이를 수』(딤후 3:7) 없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 속에서 그 나라, 그 민족의 언어로 온전히 보존해 주신 성경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승인하시고 그 권위를 인정하신 성경이 있어야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공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상의 요구들”을 온전히 충족하고 있는 “유일한 성경”은 <한글킹제임스성경>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본지 통권 제359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최종권위로 믿는 이유」(pp.22-27)와 제373호 「<한글킹제임스성경>만 진짜 성경인 이유」(pp.25-30)를 참고하라.



어떻게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가? 그 “방법”은 이미 성경에 나와 있는데, 『올바로 나누어[rightly dividing]』(딤후 2:15) 공부해야 한다. “성경을 올바로 나누는 것”은 “성경 공부의 제1원칙”이다. 왜 올바르게 나누어 공부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나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통합의 하나님”보다는 “분리의 하나님”으로 더 많이 언급된다.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를 한 몸으로 결합하시고(창 2:24), 성도들로 하여금 한 몸이 되게 하시며(엡 2,3장), 성도들끼리는 진리 안에서 서로 연합하도록 하시지만(고전 1:10), 기본적인 성품으로 보면 “나누시는” 분이지, “합치시는” 경우는 드물다. 하나님께서는 “민족들”을 나누시고(신 32:8,9), “인종들”을 분리하시며, “짐승들”도 구분하신다. “음식들”도 분리하시고, “옷들”까지도 남녀 구분을 두신다. 하나님께서는 “잡종”이나 “혼합”을 무척 싫어하신다(레 19:19). 이렇듯 하나님께서 이미 나누어 놓으신 것을 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성경에는 다섯 구절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나누다”는 단어가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그 빛을 어두움에서 나누시더라[God divided the light from the darkness]』(창 1:4).
322쪽 / 32,000원

또한 성경이 “친히 나누어서” 말씀하고 있다. 마치 매 본문마다 “칸막이”로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 성경은 “시대”와 “대상”을 나누고 있다. 우리가 공부해야 할 진리의 말씀은 “한 가지 시대” 또는 “한 가지 대상”만을 위해 기록되지 않았다. “시대”만 해도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일곱 혹은 여덟 가지”로 구분되고[1 무죄 시대의 경륜, 2 양심 시대의 경륜, 3 인간 정부 시대의 경륜, 4 족장 시대(약속 시대)의 경륜, 5 율법 시대의 경륜, 6 교회 시대의 경륜, (“과도기적인 경륜”인 환란 시대의 경륜), 7 왕국 시대의 경륜, (8 때가 찬 경륜)], “대상” 또한 “세 부류”(유대인, 이방인, 하나님의 교회 - 고전 10:32)로 나뉜다. 보다 더 자세한 공부를 위해서는 “클라렌스 라킨 목사”의 <세대적 진리>, “피터 럭크만 목사”의 <어떻게 성경을 가르칠 것인가>, “이송오 목사”의 <열린 성경 닫힌 마음>을 참고하라. 이렇듯 “성경의 기록자”께서 나누어 놓으신 원칙을 무시한 채 성경을 공부하면, 서로 상충되는 성경 구절들에 직면할 때 모순처럼 보이게 되어, 그런 구절들을 억지로 끼워 맞춰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잘못 믿거나 아예 성경을 믿지 않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나누되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라”는 것은, 성경이 이미 나누어 놓은 원칙들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 믿고 수용하며, “있는 그대로의 원칙”을 따라 공부하라는 뜻이다.


어떻게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가?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고전 2:13). 성경과 성경, 본문과 본문, 구절과 구절, 단어와 단어를 서로 “비교하면서” 공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모든 단어와 구절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짝”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의 책에서 찾아 읽으라. 이것들 중에는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고, 하나도 자기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바로 나의 입이 명령하였고, 바로 그의 영이 그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그 “짝”은 완전히 “상반되는 짝”일 수 있고, “유사한 짝”이거나 완전히 “똑같은 짝”일 수 있는데, 다시 말해 “대조”(Contrast), “유사”(Similarity), “반복”(Repetition)을 활용하는 것만큼 “더 좋은 성경 공부 방법”도 없는 것이다.


우선 “대조”는 서로 같지 않은 것들, 곧 “조화를 이루지 않는 말씀들”을 서로 구분하여 비교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서로 같다고 하시지 않은 것들을 샅샅이 찾아내어 올바르게 나누어 공부해야 한다. 이에 반해 “유사”는 서로 조화가 되는 “평행 구절들”을 모두 찾아서 서로를 지지해 주는 근거 구절로 활용하여 공부하는 것이다. “반복”은 어떤 특정 본문이나 구절을 완전히 깨달아 알 때까지, 성경에 반복되는 본문을 중심으로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고 공부하고 외우는 것이다. 『명령을 명령 위에 반복해야 하고 명령을 명령 위에 반복하며, 줄을 줄 위에 반복하고 줄을 줄 위에 반복하여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니』(사 28:10). 실제로 성경은 특정 진리나 본문에 대해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대조,” “유사,” “반복”은 성경과 성경을 비교해서 공부할 때 매우 효과적인데, 그런 방식으로 꾸준히 공부하다 보면 『진리의 말씀』(딤후 2:15) 전체, 곧 “성경 그 자체”를 모두 온전히 깨닫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주시고 섭리로 보존하신 “바른 성경,” 곧 “올바르게 번역된 성경의 가치”는, 구원받은 성도가 바르게 번역된 성경을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읽기만” 해도 성령 하나님을 통해 언제든지 그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성경은 성경 스스로 해석한다는 사실”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구절의 의미를 해석하려 하기 전에 성령께서는 이미 그 의미를 성경 안에 해석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전에는 없었던 어떤 새로운 해석을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라, 성경 안에 이미 주어진 진리나 해석을 찾아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곧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 기록하시고 감추어 두신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캐내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안다는 것은, 어떤 특정 진리에 대해 말씀하는 내용이 “어떤 책,” “몇 장,” “몇 절”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또한 그 구절이 다른 연관된 구절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즉 그 구절이 그 연관된 구절과 어떻게 비슷하고(“유사”), 어떻게 똑같은지(“반복”), 그리고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대조”) 아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아 가는 과정이 바로 “성경 공부”다. 그렇게 볼 때, 성경을 부지런히 많이 읽은 사람이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는가? “킹제임스성경신학교”에서 배울 수 있다. “킹제임스성경신학교”는 “정통 신학의 요람”으로, <한글킹제임스성경>으로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가르치는 유일한 신학교이고, 성경과 성경을 비교하여 “성경 자체”를 가르치는 국내 유일의 신학교다. 성경을 잘 알고 싶은가? 그러면 성경을 공부하라! 진리를 위한 투자는 결코 손해 보지 않는 투자다.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삶을 빛나게 해 주고, 우리의 현 생애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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