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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그의 보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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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4월호>
행 2:29-3629 형제 여러분, 내가 조상 다윗에 관하여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죽어 장사되어서 그의 묘가 오늘 까지 우리 가운데 있음이라.
30 그러므로 그가 선지자가 되어 육신을 따라 그의 후손 중에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시어 그의 보좌에 앉게 하신 다는 맹세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것을 알고
31 그가 미리 앞을 내다봄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말하되 ‘주의 혼이 지옥에 내버려지지 않았으며, 또 주의 육신도 부패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도다.’ 하였느니라.
32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셨으니, 우리 모두가 그 일에 관한 증인이라.
33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임을 받고, 또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의 약속을 받아서 지금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 다윗은 하늘들로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스스로 말하기를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온 집이 분명히 알 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처형한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것이라.”고 하더라.
『... 조상(patriarch) 다윗... 죽어 장사되어』(29절).
“patriarch”(족장)는 patros, “pater”, vater, “patriotic”, patria와 동류 단어이다. 이는 한 나라를 세우거나 시작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같은 단어로 칭할 수 있으며(히 7:4) 야곱의 열두 아들들도 마찬가지이다(행 7:9).
벌링거는 “죽어 장사되어”라는 말은 27절과 연결시켜서 “하데스”를 “스올”뿐만 아니라 “무덤”과도 동일시했다(<컴패니언 바이블> 부록 131번, II, p.163). 그의 제자인 탐 발링거(Tom Ballinger) 역시 그의 논문 안에 벌링거의 이 가르침을 담고 있다. 하데스, 스올, 무덤, 이 세 단어는 신약에서도 각각 다른 의미로 쓰였으며, 구약에서도 그 중 두 단어는 각각 다른 의미로 쓰였다. 구약에서 “스올”은 구원받았건 안받았건 어떤 사람의 죽은 후의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다. “하데스”는 스올의 뜻과 같거나 혹은 스올에서 “지옥”이라고 불리는 부분을 지칭하기도 한다. 히브리어로 “무덤”은 ‘스올’이 아니라 ‘케벨’이며, 헬라어로 “무덤”은 ‘므네메이온’이다.
시몬 베드로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으며, 다윗의 몸은 여전히 무덤 속에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의 묘가 오늘까지 우리 가운데 있음이라』(29절). 그러나 마태복음 27:50-54은 놀라운 사실을 말해준다. 즉 어떤 구약 성도들의 몸은 무덤속에 있지 않으며, 그들의 “무덤들”이 “오늘까지 우리와 함께”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몸은 사라진 것이다(엡 4:8-10 참조). 베드로는 『다윗은 하늘들로 올라가지 못하였으나』(34절)라고 말했지만, 그의 말로 다윗이 들리움을 받았다는 가능성을 배제시킬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2. 그것을 시도했던 유일한 인물은(사 14:12-14) 지옥으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3. 그러나 엘리야, 에녹, 모세는 어떤 방법으로든 모두 위로 올라갔다.
모세의 몸은 그가 죽은 뒤 들어 올려졌고(유 9절), 엘리야는 회오리바람 속에서 들려올려졌고(왕하 2장), 에녹은 옮겨졌다(히 11:5). 그들 중 누구도 요한복음 20:17에 나오는 단어의 의미로써 “올라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사전에서 그 단어(ascend)는 “자신의 힘으로 올라가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 육신을 따라 그의 후손 중에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시어 ‘그의’ 보좌에 앉게 하신다는』(30절).
지난 100년 간 최고의 두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위를 뒤엎고자 노력해왔다.
1. 아전인수격 주석이 본문에 스며들어 왔다(1973. 2. 28일자 <주의 칼, Sword of the Lord>에서 사도행전 8:37의 대한 존 R. 라이스의 파괴적인 비평을 참고할 것)
2. 퍼스 주교(Bishop Pearce)는 “육신을 따라”가 삭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3. 극도로 변개된 대문자 필사본 A, C, D에는 그 구 전체가 없다.
4. 그리스바흐(Gresbach)와 화이트(White)는 아홉 개의 단어가 삭제돼야 한다고 말한다(예후디의 칼로).
5. (밥 존스 3세가 추천하는) NASV는 말씀을 망가뜨려 놓는다.
“육신을 따라...그리스도를 일으키시어”는 종교재판을 실시했던 예수회 사제들이 1582년에 출판한 로마 카톨릭 공식 성경에도 없다. 유유상종이라고, 그 단어들은 1901년의 ASV, NASV, RSV(1973)에서도 삭제되었다.
6. 노울링(Knowling)이나 아담 클라크(Adam Clarke)는 “그의 보좌”에 대한 주석 달기를 전적으로 거부한다.
7. 제미에슨(Jamieson), 포셋(Fausset), 브라운(Brown)은 그 부분을 인용하지 않았으며, 순진한 독자들에게 사도행전 2장은 시편 132:11의 성취이기 때문에 본문에 언급된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34절 참조)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말하고 ‘다윗의’ 보좌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8. G. 캠벨 모건(Campbell Morgan)은 “그의 보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보좌에 관련된 모든 것은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구원의 핵심인 희생 제사가...보좌 위에 앉아 있다”고 말한다(Ibid., p.83).
9. F.F. 브루스(Bruce)는 1952년의 로마 카톨릭 성경 본문에 일치해서 그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가 인용한 “주의 보좌”라는 단어에 대한 주석을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완전히 생략했다.
10. 더멜로우(Dummelow)는 유대인의 정치적 왕국의 도래를 너무나 혐오한 나머지 그의 주석서에서 그 구절 전체를 그냥 지나쳐 버린다.
11. 래드(Ladd) 박사는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라고 담대하게 말한다. 그러나 그 진술이 학자 연맹 회원으로서 결격 사유가 됨을 깨닫고 재빨리 이 말의 뜻은 “부활”이라고 말한다(Ibid, p. 1128).
캠벨 추종자들은 다윗의 보좌는 ‘영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30절의 내용은 3-4절에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욱 영적인 성경 독자들은 30절의 “일으키시어”만이 “부활”(31,32,34절)과 관련되며, 30절의 “그의 보좌”는 가브리엘이 말한 것처럼(눅 1:30-33) 다윗의 보좌임을 안다. 게다가 이 보좌는 신약에서 언급될 때마다(마 25:31) “주의 영광의 보좌”(렘 14:21)로 불린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세워질(마 19:28) 지상 왕국이며 “높은 곳에 계신 위엄있는 분”의 “오른편”(히 1:3)과 혼동해서는 결코 안된다.
주께서는 그의 원수들이 그의 발받침대가 될 때까지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34,35절). 『... 땅... 그곳이 그분의 발판임이요』(마 5:35). 이 문제에 대해 여전히 의심스럽다면 사도행전 3:19,20과 스카랴 14:9을 읽어 보라.
사도행전 2:1-5이 요엘 2:28-32의 성취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34절도 시편 132:11 의 성취가 아니다. 보수주의의 허구와는 달리, 시편 132:11은 “부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시편 132편의 “소생”(fruit)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인용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보좌로 오르기 위해서는 살아나셔야만 하는데, 그들은 그분을 죽였다. 그러므로 “일으키시어”(행 2:30)라는 말은 시편 132:11이 성취될 것이라는 증거로서 주어진 것이다. “그의 보좌”(시편 132:11-“네 보좌”)가 그때 당시에 성취되었다는 말은 전혀 없다.
“일으키시어”라는 단어가 시편 132편에 들어 있는 히브리어 필사본은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그 구절은 어떤 시기에 메시야 왕이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보좌에 앉으리라는 사실만을 다루고 있다.
사도행전 2:30의 “그의 보좌”는 (시편 132:11의 “네 보좌”와 마찬가지로) 다윗과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앉았던 보좌를 말한다. 아담 클라크, 매튜 헨리, 렌돌, 알포드, 노울링, 해켓, 더멜로우, G. 캠벨 모건이 그 단어에 쩔쩔매는 이유는 그들 중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미리 앞을 내다봄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말하되 ‘주의 혼이 지옥에 내버려지지 않았으며, 또 주의 육신도 부패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도다.’ 하였느니라..』(31절).
본문에 나오는 구약 인용은 다윗의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내용이며, 인용된 부분은 시편 16:8-11이다. 여기서 시편 132편(“네 보좌에”)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되어 인용되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가 없다. 다윗은 시편 16편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시리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시편 16편에 있으며, 시편132:11의 성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임을 받고...』(32절)
이는 ‘물리적인’ 우주 안에서의 ‘문자적인’ 어떤 위치를 말해 주고 있다(엡 3:18 주석 참조). 이 표현은 계시록 5:1,7, 로마서 8:34, 에베소서 1:20, 골로새서 3:1, 히브리서 1:3,13; 8:1; 10:12; 12:2에서도 ‘물리적’이고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는 32절의 “일으키셨으니”에 연결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리라는 말씀의 성취가 결코 아니다.
이제까지 베드로는 부활과 재림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말했다. 시편 132편과 16편에 관해 그들에게 15분 간 설교한 후에 그는 이제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라는 그들의 질문에 답해 준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은 여기 33절에 있다.
『아버지로 부터 성령의 약속을 받아서 지금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33절).
사도행전 2:1-5에 대한 설명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요엘은 이 구절에서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요엘서를 인용한 것은 메시야가 다윗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기 위해 오시기 전에 일어날 일을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으며, 다윗의 보좌는 유대인들이 죽인 사람과 연결되어 있었다(23절). 이 사람이 다윗의 보좌에 앉도록 정해진 분이라는 증거는 그의 부활(시 16편)을 다루는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제시된다. 그리고 이제 베드로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에 대답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34절).
그 구절의 처음 절반은 이미 설명했다. 34절의 인용은 시편 110편이며, 이는 신약에서 여러 차례 인용되는 부분으로(마 22:44, 막 12:36, 눅 20:42, 히 1:13 등) 신약의 결정적인 과도기에 인용되는 이사야 6:10보다 더 중요하다(행 28:26, 요 12:40, 롬 11:8 참조).
처음 “주”는 아버지이고 두 번째 “주”는 아들이다. 이것으로 오리겐은 그리스도가 “영원히 태어났거나” 혹은 “영원히 태어나고 있다”고 가르쳤는데, 이는 아리안주의의 교리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니케아 공회에서 논란을 부추겼던 사람은(<사탄의 걸작품 NASV>에서 요한복음 1:18에 대한 설명 참조) 아타나시우스가 아니라 오리겐이었다. 러더포드 판사와 러셀 목사(워치타워 협회)는 요한복음 1:18에서 로크만 재단의 입장을 그대로 취했으며 태어난 하나님과 태어나지 않은 하나님, 즉 하나님이 둘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말이 맞다면, “태어난 하나님은 언제 태어 났는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칼빈, 댑니, 스트롱, 쿠퍼, 핫지가 제시하는 신비로운 대답은 “그는 영원히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교리의 증거 구절로 그들은 시편 2:7을 드는데, 거기에는 분명히 “오늘”(this day)이라는 부사가 나와 있다. 영원은 시간이 없기 때문에 “오늘” 태어났다는 성경 말씀과 전혀 맞지 않는다.
여호와 증인들은 여호와가 그리스도보다 더 우월한 하나님임을 나타내기 위해 오랫동안 그리스도는 “주”(Lord)라 부르고 여호와는 “주”(LORD)라 불러 왔다. 그러나 계시록 19:16과 스카랴 12:10에서 그들의 신학 체계 전체가 무너져 버린다. <킹제임스성경>의 계시록 19:16에서 “주”(LORD)가 예수 그리스도께 사용되었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그것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말하려면, 여기 또다른 예가 있다. 스카랴 12:10에서는 십자가에서 손에 상처를 입은 분께 “주”(LORD)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동 성서>(NRSV)는 “나를”을 “그를”로 바꾸었다. [<킹제임스성경>에 있는 단어 하나하나를 주의깊게 살피는 것을 싫어하는 “근본주의자”는 조만간에 자유주의로 넘어가게 된다. 스카랴 12:10에서 “나를”을 “그를”로 바꾼 것이 정통 기독교계와 이단 워치타워 협회와의 차이점이다.]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34절).
이것은 재림 때 지상에서 왕이 돌아와서 실제 전쟁을 하는 것이다. 시편 110:2,5,6을 읽어 보고 그 내용을 믿으라. 그 본문은 “구원의 날”(고후 6:2)이 아니라 그의 “분노”의 날에 대한 것이다. 계시록 2:27의 “철장”이 시편 110:2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갈보리 산이 아니라 시온 산과 연결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시편 110편 말씀대로 돌아오셔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쓸어 버리시고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기 전까지 현재 하늘에서의 그분의 위치에 대해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온 집이 알 것은...』(36절)
벌링거, 베이커, 스템은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했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최소한 지상에서의 다윗의 보좌와 하늘에서의 다윗의 보좌를 혼동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베드로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며 사도행전 1:11에서도 발견되는 “이 예수”(same Jesus, 36절)라는 말은 앞으로 오실 통치자가 ‘사람’이신 예수, 즉 다윗에게서 나신, 나사렛 출신의 팔레스타인 사람인 유대인으로 오실 것을 분명히 말해준다.
메시지의 내용은 분명하며 해석도 확실하다. 고린도전서 15:1-7의 바울의 복음은 오순절 때 전한 베드로의 메시지에는 없다. 화해, 의롭게 됨, 양자됨, 구속, 성결케 됨, 값없는 은혜의 위대한 교리가 그 메시지에는 들어 있지 않다.
베드로는 여기서 그가 사도행전 3:19-26에서 설교한 것을 설교하고 있다. 그는 다니엘, 요엘, 이사야, 시편, 스카랴를 근거로 설교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행 1:3 주석 참조) 메시야가 돌아오실 때 세상에 있게 될 ‘도덕적 의’에 관한 것뿐이다. 그는 계시되어진 한도 내에서만 진리를 설교하고 있다. 그가 로마서 8-10장이나 에베소서 2-3장이나 갈라디아서 1-3장에 모순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계시들이 보다 나중에 주어진 향상된 계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