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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 믿는 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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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12월호>
•사도행전 6:1-15 •6:1-4 『그 당시에 제자들의 수가 늘어나고, 그리스인들이 히브리인들에 대하여 불평이 일어나니, 이는 그들의 과부가 매일의 구제에서 소외됨이라. 그러자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서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 두고 식단을 돌보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로 충만하여 칭찬 듣는 일곱 사람을 찾아서 택하여,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하는 일과 말씀의 사역에 전념하리라.”고 하더라.』
지역교회 내의 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차들의 행렬에는 일산화탄소가 뒤따르는 것처럼, 부흥 뒤에는 문제가 따르게 되어 있다. 사도행전 5:42은 어떤 문제가 일어날 전조가 되는데, 이런 형태는 사도행전 6:7,8과 8:40에서 다시 반복된다.
“집사들”이란 단어(헬라어 ‘디아코논’)는 “식탁을 돌보기 위해 맨땅 위를 두루 다니는 사람”을 뜻한다. (헬라어 어원학자들이 해 놓은 확대된 설명에 의하면 그렇다.) “집사”라는 단어가 여기에는 없다 하더라도 “일곱 명”(행 21:8)이 집사들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디모데전서 3장에서 다시 나오는 등장하는 집사의 자격에는 다음 세 가지가 있다(3절).
1. 지혜
2. 정직한 평판
3. 성령 충만
“식탁을 차리는 사람들”이 여기서는 “사역”에 부름받은 영적인 사람들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역”은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을 섬기는 일이다. 성경에서 “집사”는 현대의 많은 교회의 재직들처럼 재정 위원회를통제하거나 운영하지 않았다. 목사나 이사진에게 명령하지도 않았으며, 설교자들을 고용하거나 해고하는 일을 하지도 않았다.
집사들은 “영적인 사역자들”로서(딤전 3장) 회중을 섬김으로써 그들에게 봉사한다(롬 12:7). 그들은 목사와 함께 교회의 영적 뼈대를 형성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도와 심방을 돕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교회 건물과 기물을 깨끗이 유지하고, 분열과 다툼과 박해 시에 목사와 의논하는 일을 한다.
이들 집사들의 임명으로 말미암아 이 최초의 교회의 열두 목사들(2절)은 세상 일에 그들을 연루시킬 수 있는(딤전 2:4)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과 방해물에서 해방되어 “말씀과 교리”(딤전 5:17)에 전념하며, 그들의 가르침과 설교를 통해 ‘영적인’ 권세와 권위를 가진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성령께서는 신약에서 영적 권위 외에 어떤 다른 지배권도 인정하지 않으신다(벧전 5:1-6, 행 20:28)].
『...말씀의 사역』(4절)은 바울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정진했던 사역이다. 사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바울의 사역을 사도행전 2-6장의 사역과 분리시키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도행전 2장에서 교회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바울에 의해서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 따르면 아직 교회시대가 시작되지 않은 사도행전 2-6장의 사역은 바울의 사역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사도행전이 교회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다루는 것은 사실이기에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설교했던 것과 13장 이후에 바울이 설교했던 것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바울의 사역이 사도들의 사역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다. 바울은 심지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한 몸”에 대해서 쓴 후에도 회중에게 여전히 구약을 설명하기까지 한다. “한 몸”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을 읽어야 하며(고전 10:1-6) 그것들로부터 위로를 얻는다(롬 15:4). 우리는 “모든 성경”(딤후 3:16)을 공부해야 한다. 신약의 일부나 절반만 공부하지 않는다(행 1:8 주석 참조).
말씀의 사역을 할 때는 말씀이 자신을 붙들게 될 때까지 말씀에 달라붙어야 한다(삼하 23:10)! 그리고는 피가 날 때까지(판 3:21) 말씀을 적용시킨다(렘 48:10). 그 결과는 말씀에 대항하는 자가 죽든지(히 4:12) 아니면 썩어가는 육신이 절단되든지(시 119:67) 둘 중의 하나다. 『말씀의 사역』을 하는 것은 마음의 상처에 말씀을 붓고, 심란해하는 사람에게 기름이나 포도주처럼 말씀을 쏟아붓는 것을 말한다(눅 10:34). 진리를 찾기에 갈급한 죄인에게 말씀의 사역은 오랜 기갈 끝에 마시는 깨끗하고 신선하며 차갑고 맑은 샘물과 같고(잠 25:25) 한 모금의 꿀과 같다(시 119:103).
6:5-8 『그 말이 온 무리를 기쁘게 하니라. 그리하여 그들이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한 스테판과 빌립, 프로코로, 니카놀, 티몬, 파메나와, 유대교로 개종한 안티옥 사람 니콜라오를 뽑아서, 사도들 앞에 세우니, 기도한 후에 그들에게 안수하더라. 하나님의 말씀이 널리 전파되니,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었으며, 제사장의 큰 무리도 이 믿음에 순종하더라. 스테판이 믿음과 능력이 충만하여, 백성 가운데서 큰 이적들과 기적들을 행하더라.』
돈 문제와 관련해서 지역교회 안에서 행해진 첫번째 업무 처리는 『온 무리』(5절)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럼으로써 지역교회의 선례를 세우고, 목사와 집사들이 영적 권위를 행사하지만 제반 문제들을 결정하고 집사들을 “선출”하는 것은 회중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이... 뽑아서, 사도들 앞에 세우니』(5,6절).
사도행전 6장의 지역교회는 모든 일에 질서가 있으며 순조롭게 운영되어 가고 있다. 온 무리는 기뻐했고(5절) 기도했으며(6절), 하나님의 말씀은 전파되었고(7절), 더 많은 무리가 교회로 모여들고 있다(7절).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교회”다.
대부분의 학자들, 즉 브루스, 벌링거, 로버트슨, 빈센트, 메이어, 제미에슨, 래드, 퍼셋, 브라운, 클라크, 웨스트, 디엠, 윌리엄, 래드 박사, 램, 얼 등은 『그리스인들』(1절)이 실제로 『그리스인들』을 뜻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헬라파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즉 본문의 “그리스인들”을 “헬라파 유대인들” 또는 “그리스화된 유대인들”이라고 말한다. 빈센트는 이들이 <칠십인역>을 사용했던,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들이라고 말한다(빈센트, Ibid., p.473). 이에 대한 증거로 그가 제시하는 것은, 로마서 1:14에서 “헬라인과 야만인”이라고 말할 때의 “헬라인”은 “헬레시”라고 되어 있는 반면 사도행전 6:1에서는 “헬레니스톤”이라고 되어 있어 두 단어가 서로 다르게 제시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행전 6장의 “헬레니스톤”이라는 말은 단순히 “헬라어를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을 뿐, 결코 “헬라어를 말하는 히브리인”만을 가리켜야 할 이유가 없다. 이 단어는 “헬라어를 말하는 헬라인들”에게도 사용되었다(Cadbury, The Hellenists, Bauer, Griechisch-Deutsches Worter Buch zum New Testment, 1952). 이 단어에 대해 학자들이 틀렸다는 증거는 또 있다. 사도행전 21:27에도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을 가리켜서는 “헬레니스톤”이라고 말하지 않고 “유다이오이”, 즉 “유대인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헬레니스톤”이라는 단어가 “그리스인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와는 조금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들”에게 한정시킬 수는 없다.
『...기도한 후에 그들에게 안수하더라』(6절). 사도행전 8:17과 13:3로 볼 때 여전히 안수함으로 무엇인가가 전이된다는 것이 분명하다(레 1:4). 또한 “안수”에는 치유하는 능력과 나름대로의 권위가 있음이 분명한데(히 6:2, 딤전 5:22, 행 8:19; 14:3; 9:17; 28:8), 사도들이 사역을 수행했을 때에 그러했다(고후 12:12).
우리는 본문에서 또 하나의 “고기”(어려운 교리)를 맛보게 되는데, 이 “고기”는 『안티옥』(5절)과 『알렉산드리아인』(9절)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나온다는 사실에 있다. 『안티옥』은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성령 충만한 집사들과 관련되어 언급되는 반면, 『알렉산드리아인들』(9절)은 성령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박해하는 데 전문인 살인적인 산헤드린과 관련되어 있다.
제자들이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안티옥에서(행 11:26)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렸다는 사실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킹제임스성경>이 번역된 비잔틴 원문은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안티옥에서 왔다. 이방인들에게로 최초의 선교여행을 떠난 진정한 구령자들은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안티옥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정작 A.D.40-90의 안티옥 원문은 학생들에게 제시해 주지 않고, 대신 예수회 성경(1582)의 저본이 되었던 알렉산드리아 원문을 복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 것이다.
성경이 로마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형에 처했으며 바울을 로마 감옥에 가두었다고 말씀한다면, 우리는 로마에서 성경적 기독교를 찾아보는 것을 결코 기대할 수 없다. 성경이 이집트를 세상의 한 유형으로 정의할 때, 성경은 우리가 그 정보를 근거로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며, 성경 필사본들을 얻기 위해 스핑크스나 피라미드에는 가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우리는 성경을 더욱 정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했던(행 18:26) 한 구원받지 않은 연설가를 본다(행 18:24). 또 알렉산드리아에서 우리는 성령과 성경과 진리의 전파와 사도의 권세에 심하게 분개했던 리버티노와 쿠레네인을 본다. 우리는 그 정보를 근거로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6:9-15 『그때에 리버티노와, 쿠레네인과, 알렉산드리아인의 회당이라고 불리는 회당에 속한 어떤 사람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서, 스테판과 더불어 변론하더라. 그러나 그들은 지혜와 영으로 말하는 그를 당해 내지 못하더라. 그러자 그들이 은밀히 사람들을 매수하여 “우리는 그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노라.”고 말하게 하더라. 그리하여 그들은 백성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선동하고,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붙잡아 공회로 데리고 와서,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그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모독하는 말을 끊임없이 하였으니, 우리는 그가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 것이며, 또 모세가 우리에게 준 관례를 변경시킬 것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도다.”라고 하더라. 공회에 앉은 모든 사람이 그를 주시하여 보니,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부흥이 있은(행 5:16, 5:42 참고) 후에는 반드시 반대가 일어난다. 뒤이어 벌어지는 상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고 재판받는 것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에 그가 죽는 순간에 주 예수께서 나타나심을 보게 된 것에 대해 아무도 놀라지 않으리라(행 7:56).
1.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적들은 그의 주장에 답변할 수 없었다(행 6:10, 마 22:46).
2.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고용해서 그를 죽였다(행 6:11, 마 26:60).
3.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를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고소했다(행 6:11, 마 26:65).
4.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해서 그를 대적하게 했다(행 6:12, 마 27:20).
5.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가 율법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고소했다(행 6:13, 마 12:2).
6.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가 성전이 멸망할 것을 예견했다고 고소했다(행 6:14, 마 26:61).
7. 두 경우 모두 카이파(Caiphas)가 제사장이었다.
사도행전 21-26장의 바울의 사역에도 이와 동일한 일들이 뒤따른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종교적 박해를 가하는 전형적인 절차이다. 왈덴스, 알비겐스, 보도, 폴리시안, 롤라즈, 후스파, 형제파, 보고밀즈 등을 살해하는 데는 항상 거짓 고소, 안정된 생활이 파괴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진리에 대한 분개, 군중의 혼란, 신성모독을 빙자한 고소, 그리고 “공회”(12절)가 동반된다. 공회는 참으로 대단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약에서 “공회”(Council)는 성경을 거부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이며, 그들의 일이란 성령의 역사를 막는 것이었다. 역사상 그러한 규칙에 예외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들과 교제하는 것은 조심하는 것이 좋다. 성경은 실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여...』(11절). 단어의 순서를 눈여겨 보기 바란다. 하나님은 뒷전이다(마 23:16-22를 볼 것). 자기 의를 내세우는 의식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법보다 인간의 법을(요 8:5; 9:29 참조) 더 염려한다. 13절에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즉 물질적인 건물이 먼저 오고 하늘에서 온 율법(히 12:25)은 그 다음에 온다. [칼 막스 같지 않은가? 그는 항상 하나님에 앞서 “이웃”을 먼저 두었다(마 22:38,39).] 그뿐 아니다. 그들은 『모세가 우리에게 준 관례』(14절)에만 신경을 쓴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은 어떻단 말인가(신 5:22)? 그들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행 7:43).
사실 그들이 “모세”를 들고 나오는 것도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요한복음 8:39에서는 자신들의 마귀적 성품에 “아브라함”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들은 모세를 믿지도(요 7:19) 모세에게 복종하지도 않았다(행 7:39). 반대로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선지자들을 이용한 것처럼(마 23:29), “모세”와 “아브라함”을 이용할 뿐이었다.
『그를 주시하여 보니,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15절). 출애굽기 32-35장을 공부한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을 깨달을 것이다. 그들이 “주시하여” 그를 보고 있는(15절) 동안, 그는 그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히 12:1-3) 예수를 “주시하여”(7:55) 보고 있다.
성령충만한 증인의 빛나는 얼굴은 살인을 더욱 고무시킨다. 진정한 거룩함에 대한 거듭나지 않은 종교인의 반응은 ‘분노’이다. 바울과 야고보와 베드로는 후스, 사보나롤라, 크랜머, 라티머, 리들리, 그리고 러시아에서 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사형당했던 것처럼 그렇게 처형되었다. 스테판은 재정위원회 위원으로서 가만히 앉아 교회나 운영하고 있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살해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전파했던 것이다(딤전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