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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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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10월호>
<본문 : 사도행전 4장 25-37절>4:25-30 『“... 주의 종 다윗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니 ‘어찌하여 이방이 분노하며 백성들은 헛된 일들을 꾀하는고? 땅의 왕들이 일어서고, 또 다스리는 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도다.’ 라고 하셨나이다. 그들이 과연 주께서 기름 부으신 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를 대적하여 헤롯과 폰티오 빌라도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모였으니 이는 주의 손과 주의 계획대로 이루기로 예정된 온갖 일을 행하려 함이니이다. 이제 주여, 그들의 위협함을 살피시어 주의 종들로 담대하게 주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시어 병을 낫게 하시며, 또 표적들과 이적들이 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하소서.”』
『주의 종 다윗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니...』(25절). 본문은 시편 2:1,2이 인용됨으로써 초림과 재림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시편 2편에서 “거룩한 산”에 계신 왕은 갈보리 산에 있던 “그 선지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땅의 재판관들”(시 2:6,10)이 “그 발의 먼지를 핥는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시 72:9).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그밖의 다른 사도들)는 이스라엘을 위한 구약 예언의 문자적 성취와 더불어 환란을 향하고 있다(다니엘의 칠십째 주). 마태복음 1장부터 여기까지 모든 진로는 그 방향을 향해 일방통행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약속들은 초림에 적용될 수 있지만, 그것 하나하나에는 재림이 포함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대다수의 보수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고 천 년 동안 유대인의 왕국이 이 세계의 수도가 되는 일은 없다고 가르친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떤 구절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초림 : 사 53장, 시편 22,16편 등) 어떤 구절은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재림 : 사 2,11,65장, 슼 14장 등).
한델(Handel)은 이 구절과 계시록 11:15을 “크리스마스” 때인 누가복음 2:11에 맞추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대다수의 “보수주의 복음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는 것이 사도행전 1장에서 시작하여 계시록 20장까지 그런 식으로 계속되리라고 생각한다.
26절의 『땅의 왕들... 다스리는 자들』은 계시록 17,18장의 열 왕들이며, 계시록 13장에 따르면 그들은 적그리스도의 치하에 있게 될 것이다. 헤롯과 빌라도가 이 통치자들의 모형은 될 수 있으나 그것이 그들에 관한 성경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마태복음 17:10-12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1980-2000년의 “왕들과 다스리는 자들”이 로마라는 것을 독자에게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대다수(majority)의 보수주의 학자들”은 27절을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를 대적하는” 이들도 “다수”(majority)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편에 섰던 사람은 누구였는가? 마지막에는 그의 어머니와 한 제자와(요 19:27), 정죄받은 도둑(눅 23:40)뿐이었다. 바울의 경우에는 한 명의 의사뿐이었다(딤후 4:11). 바울은 그의 글에서 “양심”을 중시한다(행 23:1, 딛 1:15, 딤전 4:2). 오래 전 한 청교도는 사람들이 그에게 양심을 내버리라고 말할 때 이렇게 대답했다. “미안합니다만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루터는 그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묶여 있다고 말했다. 이 끈은 “자유의 법”(갈 5:13)과 함께하는 노예상태이다.]
대부분의 지역 교회 안에서 “다수”는 ‘성경적인’ 문제 대신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함께 모인다. 그 문제는 대개 소수로 시작해서(요 11:47) 다수에게 영향을 끼치다가(눅 23:23) 결국에는 다수가 그 문제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즉 그들이 소수의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그들은 “미혹된” 것이라는 말이다. 헤롯과 빌라도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공동의 ‘두려움’이 있기 전까지는 “함께 모일”(27절) 수 없었다. 많은 “교제”가 대개는 세상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독재자”의 학대를 받은 후에 서로 위로하기 위해 쫓기는 토끼들이 함께 구멍을 파는 것과 같다. 교제의 근거가 간접적으로라도 설교나 진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지역교회들이 미국에는 많이 있다. 그들이 함께하는 동기는 많은 경우에 어떤 문제에 관해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선전을 하거나, 자신들이 (그들의 적들의 눈에) 영적임을 증명하거나, 명성을 얻거나, 다른 교회에 되갚음을 하거나, 다른 교제권의 능력과 권위를 시기해서 그들과 떨어져 있기 위한 데 있다.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도다』(26절)라는 말씀은 여러 그리스도들이 있음을 암시한다(눅 2:26 참조). 마귀는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겔 28:14), 신약에서 그 단어는 헬라어로 ‘크리스토스’ 즉 “그리스도”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사도행전 4:26이 기록된 뒤 여러 해가 지나서 기록된 70인역이 마귀에게 가해질 이런 위협을 미리 보고서, 히브리 구약 성경 에스겔 28:14에서 “기름부음 받은”이란 단어를 번역하지 않음으로써 사탄의 발자국을 조심스럽게 감추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있는 일이다. 사탄도 하나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이다(살후 2:1-6 참조).
『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를 대적하여...』(27절). 그들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은 어느 구절이라도 없애 버려야 했다. 그래서 (바로 다윗을 종으로 언급하는 문맥에서) “아들”(child)이란 단어를 “종”으로 변개시킨 것이다(ASV, NASV, RV, NRSV 등). 그리고는 25절의 “종”이란 단어를 “아버지”로 바꾸었다. 이 본문(알렙, E, A, B에서 발견되는)에서 그들은 ‘파이다’(27절)를 “종”으로 번역했다. 왜냐하면 “아들”(child, KJV)로 번역하면 틀린 아버지, 즉 다윗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메시야로서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마 1:1 참고)일 수 있으며, 마태복음 1:20; 9:27; 15:22; 21:9에서는 그렇게 여겨졌다. 그러나 여기서의 기도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24절). 그리고 여기서 “주께서”(Thou, 27절)와 “주의”(Thy, 28절)는 다윗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NASV, RV, RSV, PDQ, NRA, NRSV, RFD 등은 다윗을 “우리 아버지”라고 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아들”을 “종”으로 변개시켜야만 했다. 이것이 칠십인역을 기록하고 “정통학자”라는 거짓 고백 하에 ASV(1901)를 지지했던 학자들의 배후에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아처 웨니거, 글리슨 아처, 윌버 스미스, 케네스 웨스트, A.T. 로버트슨, 그리스바흐, J.G. 메이첸, 더멜로우, F.F. 브루스, 래드, 노울링(그밖의 “유명한 권위자들”)의 변개된 본문을 성령께서 반대하신다는 가장 큰 증거는, 성경 어디에도 다윗이 “우리 아버지”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윗은
1. 족장(행 2:29)
2. 하나님의 종(시 132:10)
3. “나의 아버지”(대하 2:3 - 솔로몬이 한 말)
4. “그의 아버지”(대하 28:1 - 솔로몬의 아버지)로 불린다.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이 있는 곳에서(행 7:2,38) 다윗은 그 표현에서 분리된다. 이스라엘이 “우리 아버지”라 부른 인간은 다윗이 아니라 아브라함이었다(요 8:56; 8:33, 마 3:9, 눅 3:8; 16:24, 행 7:2,32, 롬 4:1,2,3,4,9, 갈 3:6,7,8,9 등 참조). 그러므로 NASV는 카톨릭 성경인 예수회의 <림즈 듀웨이>(1582)와 함께 무시해야 할 것이다. <킹제임스성경>이 옳다.
뿐만 아니라 모든 “근본주의자들”은 1880년 이후로 베드로가 방금 인용한 구절의 문맥을 거부했다. 시편 2편을 읽어 보라. 그 문맥이 여호와의 고통받는 종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낳으신 누군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시 2:1-12)
아직도 사도행전 4:27이 “아들”이 아니라 “종”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문맥을 벗어난 본문은 그럴싸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거룩한 아들 예수”(행 4:27)는 문맥상 시편 2편과 연결된다. 거기서 하늘과 땅의 주 하나님(행 4:24)께서는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노라』고 말씀하신다. 그의 “거룩한 산”에 있는 하나님의 왕(시 52:6), 통치자들이 멸망하지 않기 위해 입맞추어야 하는 그분이 “종”이란 말인가?
『...주의 종들로 담대하게 주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29절)[13절 주석 참조]. “아들”을 “종”으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에 다음에 나오는 “종”은 설 자리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인간 죄인들을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ASV에서는 반 세기가 넘도록 “종들”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NASV에서는 “노예”(bond servant; 급료가 없는 고용인)로 바꾸어야만 했다.
30절은 우리가 이제까지 강조해 온 가르침을 다시 한 번 확증시켜 준다. 즉 이 지점까지 사도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최고 지도자인) 모세에게 주어진 표적과 이적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두 번째 모세”인 주 예수께로 전해졌고, 그분에게서 다시 열 한 제자에게로 전해졌다.
이단적인 NASV 본문을 완전히 끝장내려는 듯 “아들 예수”가 다시 등장한다. 누가는 그의 첫 번째 저술(눅 2:27)에서 “주의 그리스도”(눅 2:26)를 언급하는 문맥 속에서 똑같은 표현을 썼다. 그것이 누가가 말한(눅 2:34,40,43) “아이”(child)이며 마지막 참조 구절인 누가복음 2:43은 사도행전 4:27의 “아들 예수”(child Jesus)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1611년 <킹제임스성경> 본문은
1.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누가의 문체와 일치한다.
2. “고난받는 종”이 아니라 왕이라는 문맥과 일치한다.
3. 다른 단어로 대체된다면 그리스도의 신성이 손상을 입을 것이다.
4:31-37 『그들이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 진동하더니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더라.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의 무리가 한 마음과 한 혼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주장하는 자가 없고... 쿠프로 태생의 레위인 요세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라고 부르니 (이를 해석하면 “위로의 아들” 이라.) 그에게는 토지가 있어 그것을 팔아 그 대금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더라.』
타당한 동기를 가진 타당한 기도는 대개 응답된다. 그들이 모여 있던 장소는 경미한 지진으로 흔들렸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했다(31절). 섭리적으로, 이 성령으로 충만한 담대한 성도들 중 아무도 방언을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기 때문이다(고전 14:22).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 그들의 개심자들은 “기쁨”(행 8장)으로 가득찼고 “사두개파”는 “분노”로 가득찼다(행 5:17).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분명히 성령으로 충만한 것보다 더 쉽다. 왜냐하면 “자신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5)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던 고린도교인들은 “술취함”(고전 11:21)과 “음행”(고전 5:11; 6:18; 5:1,2)과 “시기와 다툼”(고전 3:3), 지식으로 인한 “교만”(고전 8:1)으로 책망받았기 때문이다.
32절에서는 기독교적 공산주의가 행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국제 사회주의와는 현격하게 다르다. 찰스 다윈은 요한복음 8:32을 이용했고 칼 막스는 사도행전 4:32을 이용했다. 초대교회의 공동생활과 UN이 추천하는 사회주의는 완전히 다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 거듭난 사람들이며, 그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가운데 형성된 한 몸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 모두는 구약의 약속들을 문자 그대로 믿었으며 그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에 적용시키고 있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사유재산제도를 믿는(행 5:4 참조) 성령충만한 사람들이다. 물건을 함께 쓰는 것은 전적으로 자원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며, 분배를 지시하는 정부 요원도 없고 분배를 감시하는 경찰세력도 없다. 더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여러 날이 지나지 않아 재림하실 것을 고대하고 있다(행 1:6; 3:19,20). 그러다가 그들은 마침내 큰 능력과 큰 은혜(33절)를 얻게 된다.
그들의 설교의 주제는 죽은 자들‘로부터’(from) 부활하신(행 2:30,31) 메시야이다(33절). 그들의 적들은 시체가 사라진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이 어떻게 계속되고 있는가를 설명해야 했다. 새로운 “교회”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움직이고 있다. 교회는 꿀이 교제를 더 달콤하게 할 수는 있지만 가스 탱크를 꿀로 채울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당밀은 끈끈하게 해 주며 후추는 더 맵게 해 주지만, 교제를 부드럽게 해 주고 성도들을 “한 마음과 한 혼이” 되게 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온 “기름부음”이다(엡 5:18).
그들은 ‘기도하기’ 위해 함께 모였다(31절).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초신자들을 목사에게 반대하는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었음은 그들의 “사교적인 친절함”이 아니라 영적 담대함으로 증명되었다. 초대 교회는 진정한 교제를 가졌으며, 그것은 그들이 한 마음이었기에 가능했다(암 3:3을 볼 것). 그들은 하나님께 전부를 드렸다.
용기있는 드림은 삶을 행복하게 만든다. 용기있는 드림은 순종의 증거요 사역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며 더 고상한 동기로 나아가게 하는 도전이다. 그것은 우주의 자연적, 물리적, 도덕적, 영적 법칙을 이해했음을 보여 주는 행동이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우리는 마리아와 유다가 이루는 대조를 볼 수 있다. 마리아는 “주는 자”였고 유다는 “얻는 자”였다. 그리스도인이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할 수 없는 것을 그를 위해 해 주신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주는 자들”이었다.
사도행전 4장의 성도들처럼 기쁨으로 드리는 자들은(고후 9:7) 그들 자신의 영적 생활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다른 책임들을 수행하는 것도 쉬워지며, 주는 데서 큰 기쁨을 얻는다. 또한 십일조 이상을 드리는 것도 쉬워진다(<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창세기> 14:20 주석 참조, 1970).
『레위인 요세...바나바...“위로의 아들”』(36절). 사도행전 11:23은 바나바가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심하게 변개된 대문자 필사본 알렙, A, B, D, E에는 “요세” 대신 “요셉”으로 되어 있다. 1982년에 나온 예수회 성경, 즉 로마 카톨릭에서 펴낸 성경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의 제사장 지파인데, 본문에서는 한 레위인이 어떤 제사장적인 지위나 호의를 요구하지 않고 다른 족속들과 같이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 제사장(priest) 지파 출신의 진짜 제자가 있다. 그는 “미사”를 집전하지도 않고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는다. 그가 바울을 따랐을 때에는 옳았으나(행 15:2) 베드로를 따랐을 때에는 잘못을 범했다(갈 2:13)! 그는 묵주를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으며, 묵주기도를 반복하지도, 물을 뿌리지도, 초에 불을 붙이지도 않았으며, 9일기도를 하지도 않았고, 오가는 길에 마리아에게 인사하지도 않았다!
이 구절은 과도기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7:7에서 레위 지파를 열 두 지파에 포함시킴으로써 과도기를 완전히 마무리짓는다. 회심한 레위인은 “대제사장”이 누구인지를 잘 안다(행 23:5 주석 참조). 회심한 레위인은 그분께 희생제를 드릴 때 인간 제사장을 신뢰하지 않는다.
쿠프로는 중요한 곳인데, 왜냐하면 사도 바울과 함께 바나바가 사도행전 13장에서 이 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더라』(37절). 사도행전 4장은 회중을 부양하고 사역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헌금을 지역교회로 가져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고전 9:6-10, 롬 15:26, 행 11:2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