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사도행전 주석 분류

오순절에 일어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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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1월호>

2:1-13 『그 후 오순절 날이 되자 그들이 다 하나가 되어 한 장소에 모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친 강풍 같은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우더라. 거기에 불같은 모양으로 갈라진 혀들이 나타나 그들 각 사람 위에 머물더니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발설하게 하신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 당시 예루살렘에는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머물고 있었는데 그때 이 소문이 퍼지자 무리가 함께 모여 혼란이 생겼으니, 이는 각 사람이 자기 나라 말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라. 그러자 그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겨 서로 말하기를 “보라,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가 각자 태어난 나라의 고유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단말인가? 파대인과 메데인과 엘람인과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사람들과 유대와 캅파도키아, 폰토와 아시아, 프루기아와 팜필리아, 이집트와 쿠레네에 가까운 리비아의 여러 지방과 로마에서 온 여행자, 즉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과 크레테인과 아라비아인들인 우리가 사도들이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말하는 것을 듣고 있도다.” 하니 그들이 모두 놀라고 의아해하며 서로 말하기를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하더라.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조롱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새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하더라.』


사도행전 2장은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가장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주제를 다룬다. 사도행전 2장에서 생겨난 이단 교리들 중에 가장 두드러진 두 개는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도의 교회”(캠벨파 교회)에서 가르치는 “침례에 의한 중생”(행2:38)이라는 교리와 은사주의 교리이다. 특별히 여기 1-13절은 은사주의자들이 애용하는 본문이다. [은사주의 운동은 로스엔젤레스 아주사 스트릿 미션(1904)에서 시작되어 나중에는 캔사스의 토페카(1910-1930)로 퍼져나갔다. 현재 은사주의는 “체험을 나눔”으로써 근본주의자들을 로마와 연합시키고자 하는 로마 카톨릭의 노력과 연관되어 있다.] 본문을 통해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단 교리는 다음과 같다.
1. “성령침례”를 받기 전에는 구원받지 않았다(또는 거룩하게 되지 않았다).
2. 성령침례의 최초 증거는 방언이다.

이와같은 이단사상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상황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나오는 결과들로서, 우리는 본문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사실을 살펴 봄으로 “성령침례”에 대한 올바른 교리를 알 수 있다.
1. 베드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설교한 사도행전 2장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사도행전 11:26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2. 오순절과 베드로의 설교를 전후해서 아무도 방언의 은사나 성령침례를 받기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열 둘”은 앉아 있었다(2절). 무릎을 꿇고 방언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눅 24:49). 그들을 통해서 회심한 사람들 중에도 방언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41절).
3. 사도행전 2장 어디에도 “알지 못하는 방언”(unknown tongue)으로 말한 사람은 없다. 모든 언어가 나열되어 있고, 사람들은 그 언어들을 이해했다(8-11절).
4. 사도행전 2장 어디에도 누군가의 죄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는 언급이 없다(고린도전서 15:1-5와 비교). 마찬가지로 아무도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17절은 그 문제를 논의조차 하지 않았으며, 구원 역시 죄나 불못으로부터가 아닌, “이 사악한 세대로부터”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40절).
5. 그 누구도 성령과 “불”로, 또는 “성령의 불”로 침례를 받지 않았다(사도행전 1:1-3 주석 참조). 여기서 갈라진 혀들은(3절) “불같은 모양”이지 불이 아니다.
6. 120명의 제자들 중에서(1:15) “열 둘”만이 외국어를(7절) 했으며, 사도행전 4:4과 사도행전 17:34, 그 외 다른 구절들에서도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한 “최초 증거”로써 방언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문맥을 무시한 채 40구절 정도를 조합해서 자신의 이단교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문맥을 무시하거나 속임수를 쓴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성경으로 증명할 수 있게 된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없다”라는 말도 있고(시 14:1), “지붕 위에서 내려가지 말라”는 말도 있다(마 24:17). 그들은 문맥을 완전히 무시한 채 고린도전서 14:2을 사도행전 2:4에 맞추고, 사도행전 2:7-11과 사도행전 2:18을 요엘 2:23에 맞추고 있다. 그러나 요엘 2:23은 팔레스타인 땅에 삼년 반의 긴가뭄 끝에 비가 내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사도행전 2장에서 말하는 대환란 기간 성령님의 사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런 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지껄여댈 때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오순절은 해마다 정해진 때에 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유기체인 한 몸 안으로 침례주는(고전 12:13) 새로운 경륜이 시작되었음을 보이시기위해 성령님을 보내셨다. 이 “한 침례”(엡 4장)에는 방언들이 수반되기도 했고(여기서처럼), 그렇지 않기도 했다(41절). 때로는 이 “한 침례”에 안수가(행 8:17) 수반되면서도 방언들이 없을 때도 있었다(행 8:17). 때로는 안수와 방언들이(행 19:1-6) 같이 나타나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행 10:47).

『그들이 다 하나가 되어 한 장소에 모였는데』(1절). 이 사람들은 1장에 등장하는 120명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모임에서 여자들은 방언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고전 14:34), 마리아가 방언을 하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행 1:14 주석). 더군다나 1-4절에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열 둘임을 가르키고 있다.

『갑자기 하늘에서 거친 강풍 같은 소리가 나더니...』(2절). 이런 일은 은사주의자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결코 일어난 적이 없으며, 그들이 “영 안에서” 기도할 때도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즉, 사도행전 2장이 고린도전서 14장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약간 “이상한” 사람들이다. “바람”(wind, 2절)은 요한복음 3:8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조화를 이루며, 에스겔 37:9-14와 짝을 이룬다. 이것은 또한 열왕기상 19:11,12에서 “미세한 음성”으로 엘리야를 찾아오신 것과도 비교될 수 있다.

『불같은 모양으로 갈라진 혀들이...』(3절). “불침례”에 관한 모든 허튼 소리를 일소시킨다. 시몬 베드로는 사도행전 11:16에서 불침례에 대한 잘못을 조심스럽게 바로 잡아준다. 성경은 『그때에 내가 ‘요한은 정녕 물로 침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는 주의 말씀을 기억했노라.』고 말한다(행 11:16). 이들 가운데 불침례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진리의 지식을 찾아서 시리즈 「일곱침례」 참조). 이들 위에 머문 것은 불이 아니라 “불같은 모양으로 갈라진 혀들”이다. 이 부분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성경을 있는 그대로 살펴 보자.
1. 자, “독사의 독”(욥 20:16)이 있다. 내가 동물학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바로는 어떤 뱀들은 “갈라지 혀”를 가지고 있다.
2. “일구이언” (DOUBLEtongued : 딤전 3:8)이란 뱀의 혀를 말한다.
3. 주께서 시편 55:9에서 “혀들”을 가르신 것처럼, 시편 29:7에서 불의 “화염”을 가르시지 않았는가?
4. 주의 음성이 마귀의 음성처럼(사 29:4) 미세한 음성(왕상 19:12)이고, 주께서 “큰” 음성(눅1:42)으로 사람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마귀들의 음성도 이와 같다면(막 5:7), 주의 혀들이 진짜이고, 뱀의 갈라진 혀는 모방(고후 11:11-14)인 것이다.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4절). 성경은 여기에서 “충만하여”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1:5에 따라서 이것이 침례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은사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은사를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충만하여”라는 말을 빼어 버렸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세 장도 채 지나지 못해서 같은 제자들이 다시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행 4:31) 그들은 방언들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충만과 방언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방언은 그리스도인에게 하신 명령이 아니지만 “성령충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명령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으나(고전 12:13), 어떤 사람들은 방언보다 훨씬 더 좋은 은사들을 가지고 있었으며(고전 12:31), 방언은 열거한 은사들 중에서 가장 작은 은사였다.

윌리엄과 벌링거는(스탬과 베이커와 더불어) 이때가 그리스도의 몸의 탄생이 아니고, 히브리인 교회의 “재탄생”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벌링거는 더 나아가서 거듭남은 이스라엘에게 적용되며(요 3:3-5 참고), 결과적으로 거듭남은 이 세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스탬과 베이커는 그렇게까지 난도질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명백히 거듭났기 때문이다(고전 15:8).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벌링거 추종자들(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어쩔수 없이 그리스도의 몸이 바울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스탬 추종자들의 걸림돌은 “어떤 일이 계시되기 전에는 존재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즉 바울에게 교회가 계시되었으니, 교회는 바울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몸된 교회”는 나중에 바울에게 계시되기 전에도, 존재할 수 있었다(엡 2:16).
자, 그리스도의 유기체적 몸이 사도행전 2장에서 시작됐다고 믿을 수 있는 이유를 살펴 보자. 사도행전 2장에서 이미 세워진 지역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제자들”이었다.
1.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요 17장)에서 주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안에서 같은 위치를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그의 몸인 교회” 안에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기도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2. 성도가 한 침례로 그 몸 안으로 들어간다고 언급한 서신서에 따르면(고린도전서 12:13과 고린도전서 15:49-55) 그리스도의 몸은 “눈깜짝하는 순간”에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3. 그리스도의 몸이 수백만 명과 더불어 갑자기 사라지는데 그것이 왜 한 사람으로부터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는가?
4. 오순절에는 이방인 개종자들이 있는데도(행 2:10), 단지 그때 당시에 하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교회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이유만으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갈 3:28)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던 “중간의 벽”은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께서 강림하시기 50일 전에 허물어뜨리셨다(에베소서 2:13-16). 참석한 사람 중의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3:19에서 시몬 베드로도 개인의 구원을 위한 피의 속죄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몰랐다고 해서 그것이 완성된 사실이(히 10:8-10)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사도행전 2:1-4는 휴거 때까지 지속될 교회시대의 시작이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인 벌링거와 스탬은 교회가 계시된 것과 시작한 것을 혼동했다. 그들은 이 상황에서 유대인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사도들이 어떤 계시에 대해 인식하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순절에 참석한 사람 누구도 유기체인 그리스도의 몸이 형성 되었음을 알지 못했다. 이것 때문에 극단주의자들은 잘못된 추론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골 1:18)가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에게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에(벧전 1:10-12) 계시될 때까지는 이 교회가 그 어디서도 시작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전혀 근거가 없다. 돼지고기와 바닷게를 먹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사실은 구약 선지자들에게는 계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가 사도행전 10장에서 그것을 알아낼 때까지는 골로새서 2:14이 효력이 없었다고 생각하는가? 아무도 그것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사도행전 2장에서 “몸”이 시작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령충만”이 방언들을 수반하지 않고도 사도행전에서 여러번 있음을 주목하라(행 4:8,31; 6:3,5; 7:55; 9:7; 13:52).
코넬리우스 스탬은 오순절이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의 시작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나타낸다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아홉가지 이유를 제시했는데,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이 스탬의 9가지 이유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본다면 그것들 중의 어느 하나도 합리적 주장이 아님을 알게될 것이다. 그가 제시한 첫번째 이유는 “오순절에 관한 기록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9-23장도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스탬은 사도행전 23장 이전에 그리스도의 몸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말처럼 사실상 사도행전 2장의 “기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나, 성도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행전 9-20장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보여주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어떤 것에 대해(엡 3:1-5), 오순절 사건의 언급을 해야할 이유는 없다. 오순절 사건 때는 조개를 먹어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골로새서 2:16에 따르면 그들은 요한복음 20장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물고기를 먹었던 날 아침에도 조개를 먹을 수도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다고 고백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이러한 것이 모든 극단적 세대주의자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잘못이다. 스탬이 제시한 8가지 다른 이유들도 단순히 “기록되지 않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5절은 스스로 설명이 된다. 열 두 사람이 14-15개 언어로 말하고 있다. 『파대인과 메데인과 엘람인과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사람들과...』(9절). 그런데 여기서 9절의 “유대(Judea)”와 10절의 “유대인”(Jews)과의 언어의 차이에 대해 다소의 논란이 있다.
9절은 극동에서부터 시작하여 파대인, 메데인, 엘람인... 등이 제시된다. 이것은 바빌론 포로기 때 흩어진 유대인을 나타낸다(왕하 17장). 이 지역은 페르시아만, 카스피해 근처로 티그리스 강 너머 현재의 페르시아 지방이다. “메소포타미아”(9절)도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사이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포함하는 이 그룹에 포함된다.
“이집트, 쿠레네, 리비아”(10절)는 아프리카 지역에 정착해 있던 남서쪽으로 흩어진 유대인이다. 이 그룹에서 필로와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그리스풍의 사람들”이 나왔다. 그들은 외경과 아리스테아스에게 보낸 편지를 기록했으며, 신약이 완성된 후 “칠십인역”을 기록한 오리겐을 예비시킨 세력이다.
“캅파도키아, 폰토, 아시아, 프루기아, 팜필리아”(9,10절)는 소아시아에 정착했던 북쪽으로 흩어진 유대인을 나타낸다.
로마에서 온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10절)은 서방 집단이고, “크레테인과 아라비아인들”(11절)은 섬사람들과 남동쪽 집단을 말한다. 주어진 지역들은 유대를 중심으로 지중해 둘레에 완벽한 원을 형성한다.
『그때 이 소문이 퍼지자...』(6절) (Now when “THIS” was noised abroad...). 여기서 “THIS”는 2,3,4절에서 언급한 전체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바람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그 소문을 들불처럼 퍼뜨렸다(행 2:22).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이 사람들이 새 포도주에 취하였다』(12,13절).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는 은사주의 집단이 일종의 암호로 채택해 온 말이다.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순복음” 이단에 대해 같은 질문을 하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은사주의자들이 지껄여대는 “알지 못하는 방언”을 들을 때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의아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장이나 다 음 장 어디에도 “알지 못하는 방언들”은 없다. 현대 방언 운동에 대해 들을 때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 중 아무도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묻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듣고 비웃으며, 그것이 무슨 뜻이든 간에 고려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간주할 뿐이다.
『... 이 사람들이 새 포도주에 취하였다』(13절). 성경에서 “새 포도주”는 포도나무에서 난(창 40:10) 포도 쥬스(사 65:8)로 정의된다. 포도를 짜서(창 40:11) 발효 되기 전에 컵에(마 26:29) 담는다. 그것은 “묵은 포도주”(눅 5:39)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사람들이 제자들을 비꼬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조롱하며 말하기를...』(13절).

사도행전 주석 15 / 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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