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창세기 주석 분류

사탄의 속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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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12월호>

3:4,5 그 뱀이 여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반드시 죽지는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의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되는 줄을 하나님께서 아심이라.” 하더라.

사탄은 하나님의 절대진리를 부인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Ye shall surely die”를 “Ye shall not surely die”로 변개했다. 비록 사탄이 not이란 말을 집어넣기는 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인용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surely, 반드시). 사탄은 오늘날 그 어떤 열심있는 근본주의자들보다도 성경을 더 잘 알고 있으며 잘 믿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반드시 죽지는 않는다는 말은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브의 말과 일치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오늘날 대학 교수가 로마서 6장 23절을 대할 때 “이 말씀은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라고 평하는 것과 사탄의 대답이 무엇이 다른가? 삯을 얻으려 애쓰는 죄인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라. 어떤 관점이든, 어디서, 어떻게, 왜, 언제이든 간에 이 구절을 아무리 바라보아야 답은 똑같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이 삯은 그 어떤 인플레이션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정확히 지불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인간 타락이라는 재앙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맨 먼저 하나님의 뜻을 거슬르는 반역이 있었고, 그후 하나님의 말씀은 부인되었으며, 결국 인간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을 저버렸다. 인간이 거짓말을 믿음으로(요 8:44-47) 잃어버린 바 되었듯이 인간은 진리를 믿음으로(요 5:24) 구원을 받는다. 사탄의 전략은 최초의 결혼 제도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요(3:1), 둘째 하나님께서 엄격하신 분이심을 부인하고서(3:4), 그리고 나서는 그 분의 선하심을 중상모략하는 것이다(3:5).

이 구절이 거짓인 것은 분명하나 독자도 감지하시다시피 적어도 네 가지 면에서는 진실을 담고 있다. 모든 효과적인 거짓말에는 4/5만큼의 진리가 들어있게 마련이다. 사과 상자 윗부분에 좋은 사과를 얹어놓지 않으면
나쁜 사과를 팔 수가 없는 법이다.
1. “하나님께서 아심이라” : 이 말씀은 절대적으로 진리이다.
2. “너희의 눈이 열리고” : 이 말도 역시 절대적으로 옳다(7절을 볼 것).
3.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서” : 절대적으로 진리이다(22절을 볼 것).
4. “선과 악을 알게 되는 줄을” : 이것도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다(22절을 볼 것).

그러나 루시퍼가 조심스럽게 감추어버린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이브에게 말씀하신 것 이상으로 더 아신다(대상 28:9, 10).
2. “눈이 열리는 것”은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합 1:13).
3. “신들과 같이 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신들”은 몇몇 경우 타락한 천사들을 지칭하고 있다(시 82:2, 고후 4:3, 4; 창 6:1-6절 주석).
4.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은 죄인을 정죄하는 근거가 된다(신 1:39; 롬 4:15, 5:13).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이 사건이 기록된 이후 1900년이 넘도록 위대한 사상가들도 이 유혹의 교활함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면 이브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알 수 있었겠는가? 이브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다. 그녀는 “속았던” 것이다(딤전 2:13, 14). 선거에 나선 어떤 정치가가 말하기를 “음식에 관한 한 나는 오하이오보다 알라바마를 더 좋아한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의 정적들은 후일 “나는 오하이오보다 알라바마를 더 좋아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인용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만이 진실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증언대에 서서 “당신이 이 편지를 썼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는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도 절반만 사실이었다. 그는 그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비서에게 받아적도록 불러주었던 것이다). 아주 간단한 문장 속에도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음흉함과 교활함이 잘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한 증언을 들어보라. “나는 그가 저 개를 훔쳤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저 개를 훔쳤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저 개를 훔쳤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저 개를 훔쳤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 한 마디 증언에는 이처럼 4가지 이상이 의미가 전달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속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겠는가? (렘17:9)

시험은 “쳐다봄”으로 시작되었다

3:6 “여자가 보니 그 나무가 먹음직하고, 보기에도 즐겁고, 현명하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라. 그녀가 거기에서 그 열매를 따서 먹고 그녀와 함께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니 그가 먹더라.”

이브는 미끼를 물 준비가 다 되어 있다. 그녀는 이미 “만지지도 말라”라는 말 속에서 그녀의 숨겨진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합리적인 금지조치 였는데 이브가 “만지지도 말라”라는 말을 덧붙임으로 하나님께서는 지나치게 엄격한 분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이브는 로마서 1장 21절에 따르면 모든 죄들의 시작인(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에 있어서로 마찬가지이다) “숨겨진 불만”을 갖고 있음을 사탄에게 보여주고 만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이브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시킨 것이었지만 이미 그 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엄격한 주인으로 보이게끔 만들어버린 불평하는 영이 이브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마태복음 25:24의 종을 참조할 것.)
(밥 존스 시니어는 적어도 무릎 밑에까지 오는 치마를 입으라는 학교 규율에 반항하여 복사뼈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고 캠퍼스에서 퍼레이드를 하듯 걸어가는 여학생에게 “Good morning, Eve!”라고 인사를 한 적이 있다.)

드디어 시험이 다가왔다. 죄론에 있어서 언제 죄가 성립되는가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죄는 원하는 대상에 대한 인식과 행동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마음 속에서 따져보는 그 사이에 침투한다. 시험의 대상이 제시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분명히 시험 앞에 서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분께서는 죄가 없으셨다(마 4:8; 히 4:15). 원하는 대상에 대한 인식 역시 죄는 아니다. 이는 당신이 취할 행동의 결과와 도덕적 의미를 알기까지는 그것이 선한 행위인지 악한 행위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이 “논의(debate)”라고 부르는 그 다음 단계에서는 죄인 안에서 양심과 육체, 혹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의 사이에 싸움이 시작된다. 이때 시험당하는 사람은 자기 행위가 가져올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따져보게 된다. 바로 여기서 죄는 시작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그가 마음에 생각하는 대로 그도 그러한즉”(잠 23:7; 마 15:19절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동의 결정은 그 다음이고 행동은 마지막 단계이다. 그러니 죄 그 자체는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벌써 시작된 것이다. 마음 속의 논의가 시작되면 죄는 이미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원하는 대상인 선악과는 이미 이브 앞에 제시되었고 이브는 이 대상을 인식한 바 있다. 그런데 이때 이브는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시험하는 사탄에게 답하는 대신에 마음 속으로 따져보기 시작했던 것이다(3:1). 대세는 이미 기운 셈이다.

시험은 성경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세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시험은 우선 “쳐다봄”으로 시작한다(여자가 보니...). 아비멜렉(창 20:9), 롯(창 13:10), 다윗(삼하 11:2) 등도 눈에 의해 시험에 빠졌다. 오늘날 사람들이 아침, 낮, 저녁 쉴새없이 “광고” 홍수로 인해 눈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과 정확히 똑같다.

누가복음 4장, 요한일서 2장 16절, 그리고 창세기 3장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육체의 정욕 : 먹음직 하고 - “이 돌들을 명하여 빵이 되게 하라”
2. 안목의 정욕 : 보기에도 즐겁고 - “세상의 모든 나라들”
3. 생의 자랑 : 현명하게 할 만큼 탐스러운 - “뛰어내려 보라”

이브의 시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시험에 들어있는 모든 요소가 전부 긍정적인 것이요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야말로 성경의 이 기록이 영감받은 것이요 진리임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사실 이브가 취하려고 했던 행동은 그것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잘못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적극적 사고의 소유자(positive thinker)가 최초의 적극적 사고 방식을 적용한 결과 인류역사 6000년 동안 병원 침대와 무덤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만들었고, 수많은 영혼들이 자신의 창조주를 만날 준비도 못한 채 영원 속으로 내던져지고 말았던 것이다. “사물의 밝은 면을 바라본 것”치고는 실로 엄청난 댓가를 치룬 셈이다.

나는 사탄이 이브 앞에서 직접 선악과를 따서 먹어보임으로써 포도나무가 아무것도 아니며 겁낼 것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 유명한 “입에 사과를 물고 있는 뱀”은 나무와 너무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어서 사탄은 육체적인 의미에 있어서 그 나무와 관계가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실제 1970년대 군의 의무부대의 기장에도 동일한 표식이 담겨있었다(에스겔서 31장을 공부해 보라. 그리고 기회가 닿는다면 히슬롭의 결정적인 책 “두 개의 바빌론”을 읽어보라. 크리스마스 트리, 토템나무, 물속 마녀의 마술지팡이, 부적판, table tapping-여러사람이 테이블위에 손을 놓으면 테이블이 움직이는 심령현상의 일종, 나무를 두두리며 주문외기 등은 단순히 민속에서 유래된 것들만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과 이브 간에 있었던 교제의 비밀의 장막을 성령님의 도움으로 알아 볼 수 있다.

1. 이브는 처녀였다(고후 11:1-4).
2. 그녀는 속임을 당했다. 혹은 미혹당했다(고후 11:1-4).
3. 그녀의 첫번째 아이는 초자연적 아비를 갖고 있었다(창세기 4:1 주석과 요한일서 3:12을 볼것).
4. 그녀는 금지된 과일을 입으로 먹었다(창 3:6).
5. 그 과일은 “씨”를 가지고 있는 포도열매로 피를 예표하며 이브 안으로 들어가 피가 되었다(창 2:23).
그러니까 여자들은 이브가 포도를 따먹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붉은 립스틱을 칠하고 있는 셈이다(나는 Revlon사가 “액체 립스틱”을 개발했다고 선전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녀가 거기에서 그 열매를 따서 먹고 그녀와 함께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니 그가 먹더라” 우리는 이 구절의 속뜻을 살피면서 디모데후서 2장과 대비해서 읽어야 할 것이다(성경 구절들 사이에는 결코 모순은 없다.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잘 읽지 못했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확대해서 읽기 때문이다).

디모데후서 2장 14절에는 아담은 속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이 사실과 창세기에서 방금 읽은 귀절과를 대조해 볼 때 우리를 두 가지의 숨은 내용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1. 아담은 이브가 속임을 당할 때 없었다.
2. 아담은 이브가 나무 열매를 먹으라고 제공했을 때 그녀의 불순종이 야기한 결과를 보았었고 따라서 그 사실을 알고서도 그 열매를 먹은 것이다(엡 5:28, 29). 아담은 이브를 위해 죽을 만큼 그녀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열매를 먹은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아담과 이브의 관계가 갖는 독특한 보편성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진리에 있어 아마츄어인 공자, 모하마드, 조로아스터, 부처, 노자 등이 보기에는 이 예표가 너무도 완벽한 것이다. 헐리우드, T.V., 라디오, 신문, 잡지 등 인간활동의 그 어떤 영역에 있어서도 사랑과 죽음이 핵심 주제가 아니었던가? 미국을 방문했던 한 일본 사람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위대한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에 갔더니 T.V.프로그램이 두 가지 종류밖에 없더라고 말했다고 한다. “쪽.쪽”하는 화면하고 “탕.탕”하는 화면밖에는 못보았다는 것이다. 이 세상 여자치고 자기를 위해 죽을 만큼 자기를 사랑해주는 남자를 소유하고픈 꿈을 갖지 않은 여자가 있는가? 이 사실 이외에도 성경의 이 한 구절 속에는 또 다른 보편적인 진리가 숨어있다.
“그가 먹더라”는 부문을 주목하라. 위대한 영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종교 경전인 성경이 시작하는 창세기 3장에 먹는다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 사실은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창세기 3장, 1, 2, 3, 5, 6(6절에는 두번), 11, 12, 13, 14, 17(17절에는 3번), 18, 19, 22절에 걸쳐 먹는다는 말은 좀 불경스러워 보이지 않는가? 어째서 “입”을 이처럼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모세는 실로 프로이트보다 2000년을 앞선 것이 아닌가? 사람의 모든 수고가 자기 입을 위한 것이라면(전 6:7) 다른 모든 종교 경전들이 이처럼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이고, 실제적인 문제인 먹는 문제로부터 시작하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가 먹더라.”

아담은 “눈처럼 하얗던” 그녀의 신부가 더이상 하얗지 않고 핑크빛 혹은 자기처럼 붉은 갈색을 띄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이브의 얼굴이 벌겋게 된 것은 하늘에서 주신 은혜의 꽃다발이 아니라 둘째 사망의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아담은 그녀와 함께 죽기 위해 그 열매를 먹은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