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주석 분류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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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1월호>
드디어 이들은 눈이 열려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댓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들은 죄 하나를 짓고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낙원을 잃어버린 것이다. 오늘날도 이 부부를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 보라. 죽음의 공포, 세금, 질병, 가난, 전쟁, 범죄, 이 모든 것이 하나도 없는 지상낙원, 벌거벗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순진함, 하나님과의 교제, 완벽한 기상조건, 야외생활... 이 모든 것을 다 잃고 난 이들은 “문명”과, 태풍과 허리케인, 홍수, 지진, 화산폭발, 현재는 지옥불 위에 놓여있는 피조세계의 탄식(약3:6, 롬8:21, 눅21:10,11,25) 등을 그 댓가로 물려받게 된 것이다.다시 말해 이들은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제시되는 유토피아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버린 것이다. 다윈, 리옐, 헉슬리, 럿셀 등과 같은 사람들이 그 어딘가에서 풀라나리야나 아메바 단계에서 벗어나 달을 향해 가고 있듯이 아담과 이브는 이들 단계를 벗어나 땅 속의 구렁과 지옥을 향해 치닫게 된 것이다(어느 대학교수가 말했듯이 “모든 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둘 다 열려”
이 표현은 헬라어나 히브리어의 도움없이도 킹 제임스 성경에 정확히 정의내려져 있다(눅24:31과 왕하6:17을 볼 것).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과 하나님께 대해 지은 죄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약 중독자들은 분별할 수 없는 사실, 즉 자기들의 “옷”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 동물과 새들은 스스로 몸을 가리고 있는 데 반해 그들은 가릴 것이 없었다. 그들은 벌거벗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또다른 충격적 사실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모든 인간이 입고 있는 옷은 땅이나 다른 짐승들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4000년이 넘는 “과학”의 발전도 창세기에 기록된 기본적 사실을 바꿀 수 없었다. “내가 내 어미의 태에서 맨몸으로 나왔으니 내가 맨몸으로 그리 돌아가리이다”(욥1:21)라고 선언한 욥의 고백은 B.C.1400년에도 적절했으며, 바울이 이 사실을 디모데전서 6장 7,8절에서 다시 언급한 것도 참으로 합당한 일이었다. 과학이라고 해서 우리가 죽을 때 맨몸 말고 더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제껏 죽어간 모든 과학자도 완전히 벌거벗은 채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갖출 수 있는 덮을 것은 기껏해야 더러운 걸레(사64:6)에 불과할 뿐이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 여기서는 “무화과나무 잎”을 주목해보자. 이 무화과나무 잎은 오늘날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불교, 유교, 힌두교, 마호멧교, 개신교, 카톨릭, 유대교, 장미십자회, 제 7일 재림교, 공산주의, 무신론 등 외에도 인간의 거룩함과 의로움의 결핍을 가려 보려고 사용되는 모든 종류의 인간 사상들이 바로 그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유일한 나무이며(마21:19) 이는 “종교”를 예표한다. 열매없이 잎만 무성한 나무는 카인과 같이 입으로만 고백하는 종교인들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카인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애를 썼다(로마서 10:1-10과 로마서 4:1-10을 자세히 대비해서 읽어보라).
이들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은 이래 인간에게 있어 남에게 자기 잘못을 전가시키는 것과(창3:12,13), 하나님으로부터 숨는 것(창3:8) 이외에는 가리는 행위(덮어버리는 행위)야말로 인간들이 가장 자주 취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에 의해 세워진 위대한 종교와 철학들은 전부 죄인들에게 자기 자신의 의로움(무화과나무 잎!)을 고수하고 하나님의 의로움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 위한 것들이다. 하나님의 의는 자기 자신의 노력 대신 하나님이 이룩하신 피의 속죄(창3:21)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롬5:1-8, 행20:28, 골1:14).
이제 우리는 아담의 영적인 상태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럿셀주의자들은 [이 교리는 오늘날도 가너 테드 암스트롱(Garner Ted Armstrong)에 의해 설교되고 있다]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말하는 죽음은 육체적 죽음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당시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집단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표현에서 먹는 날이 천 년의 기간을 뜻하는 것이며 따라서 아담은 930세가 되어 죽었으니까 이 구절은 육체적인 죽음일 뿐이라고 억지 해석을 한다. 이러한 엉터리 해석에 대해서는 35가지 정도의 반론을 성경으로부터 제시할 수 있겠으나 중요한 다섯 가지 정도만을 지적해도 그 부당성이 입증될 것으로 생각한다.
1. 아담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전15:22). 그렇다면 이 말이 당신은 B.C. 4000년에 죽었다는 말인가?
2. 모든 사람은 거듭나기 전에는 죽어 있다는 것이다(엡2:1-8). 그렇다면 사람의 어느 부분이 죽어 있다는 말인가? 그들의 육체가 죽었단 말인가?(창1:27,28 주석 참조)
3. 그렇다면 이브는 언제 죽었는가? 그녀도 역시 선악과를 먹었다.
4.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고(눅9:60)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수 있는가?
5. 성경에 따르면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도 육체적으로는 영원히 살 수도 있었다(안식교의 메리 엘렌 화이트여사와 럿셀 그리고 암스트롱 등은 같은 장에서 22절을 읽을 줄 모르는 모양이다).
아담의 육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아담의 영이 죽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요한복음 3장 6,7절에 계시된 진리로 더욱 분명해진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아담의 죽음이 무슨 죽음인가를 잘못 해석하는 사람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아담이 그 선악과를 입에 넣자 세 가지 사실이 발생한다.
1. 그가 처음 창조시 피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의 피는 독에 중독된 것이다(만약 처음 지음받았을 때 피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바로 이때 잘못된 것으로부터 피를 얻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향후 6000년 동안 모든 그의 후손은 죽기 때문이다).
2. 아담의 영은 죽었고 이로써 그의 모든 후손은 죄와 허물로 죽은 채로 태어난다.
3. 그의 “혼”은 육신의 몸에 들러붙게 되었고 결국 아담은 벌거벗은 몸의 종이 되었으며 죄의 포로가 된 것이다(요8:34, 롬7:17-24).
아담은 900년이 지나(정확히는 897년) 심장이 멎었고 그의 폐는 파열되었으며 그의 몸은 그의 죽은 영을 따라 사망으로 들어갔다(롬5:12- 21).
이 세 가지 변화보다 더욱 중요한 사건이 아담에게 발생했으니 그것은 아담이 창조주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 재앙은 얼마나 후유증이 컸던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까지는 회복될 수 없었고 그것도 부분적인 회복만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 자신으로(고후4:3,4, 히1:2,3, 골3:9,10), 구원받은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아담으로부터 오순절까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아담의 형상으로 지어진 것이다(창5:3). 따라서 성경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하게 된다.
1.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
2. 모든 인간은 동물의 형상으로 원숭이로부터 나왔다.
이 두 가지 선언문은 모두 거짓이며 암흑시대의 유산물에 불과하고 대학 캠퍼스에서 유행하는 공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기” 위해서는 그 형상을 영접해야만 한다(요1:12).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종교, 교회, 성사, 사상, 철학, 정부, 가르침, 실행, 믿음, 개혁 혹은 마약도 이 형상을 재생해낼 수 없는 고로 현대인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이교도와 똑같이) 이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이,...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다(엡2:1-6; 2:12). 따라서 인간은 거듭나야만 하는 것이다.
주 하나님의 면전에서 피하여...
3:8 그들이 날이 시원할 때에 동산을 거니시는 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주 하나님의 면전에서 피하여 동산 나무들 사이에 자신들을 숨겼더라.
죄는 죄책감을 가져오고 죄책감은 수치심을 가져오며 수치심은 죄인으로 도망가서 숨게 만든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해결책으로 “상황에의 순응”(adjust)을 제시한다. 현대 심리치료법에 따르면 죄인들은 벌거벗은 채 (수치심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똑바로 고개를 들고 이렇게 말하게 된다. “우리는 다 실수하기 마련이지요. 아무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것 가지고 당황할 필요 없잖아요. 죄책감을 가지면 ‘현실에 순응하며’ 살기가 더 힘들어집니다.”(이런 현대인들에 비하면 아담과 이브는 훨씬 더 분별력이 있었다. 그들은 “선과 악”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숨어 버렸던 것이다). 이 구절에서도 우리는 보편적인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린아이들은 벌거벗고 다닌다. 그들은 “만지지 마라”라는 지시를 늘 듣고 산다. 이 아이들은 만지지 말라는 물건을 만지자마자 입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현장에서 붙잡힐 경우 도망가거나 숨으려고 한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이 태어나서 무슨 짓을 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으며 성경은 처음 시작부터 향후 6000년간 태어날 모든 인간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우연의 일치로 돌리고 말 것인가?
결국 남자와 그의 아내는 숨어버렸다. 현대인들은 무관심, 순진성, 무지, 그리고 탐닉 뒤로 숨어버린다. 이들은 이렇게 변명한다. “당신은 당신 종교에 충실하고 나는 내 종교에 충실하면 된다.”(마귀도 자기 종교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는가?) “사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거절하는 것도 아니다.”(그러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거부하는 것이다. 눅11:23) “지금은 때와 장소가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모든 일이 제 때와 장소가 있다고 믿거든요.”(아마 당신은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때에만 어떤 교회에 참석하고 나머지 날들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련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현대인들은 또 이렇게도 변명한다. “우리 기독교 국가 이외에 사는 이방인들은 어떻게 되는가?”(그러나 잘 들어 두라. 당신도 이방인이다. 이방인이란 “비문명화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오해이다. 이방인에는 문명화된 이방인이 있고 문명화되지 않은 이방인이 있다. 이방인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는가? 아프리카에 10-50년 이상 살았던 선교사들에 따르면 이방인들은 분별하기가 아주 쉽다고 한다.
1. 이방인들은 매우 종교적이다.
2. 이들은 옷을 벗기를 좋아한다.
3. 이들은 춤추기를 좋아한다.
4. 이들은 몸에 페인트 칠하기를 좋아한다.
5. 이들은 부인들을 사고 판다.
6. 이들은 담배 피우기를 좋아한다.
7. 그들은 계속해서 싸운다.
이것은 적도 아프리카인들의 모습인가 아니면 캘리포니아 대학교 여성 클럽의 모습인가?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발뺌한다. “하나님, 저는 이번 주 하루만은 교회에 가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외에도 USO, PTA, 보이스카웃 등과 같은 봉사활동 스케줄이 꽉 차 있거든요... 저는 정말 시간이 없어요.”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대꾸한다. “그거야 당신의 성경해석이고 당신도 죽으면 어쩔 수 없을 걸.” 이처럼 사람들은 진실을 회피해 버린다. 나는 어떤 사람을 알고 있는데 그는 대학에서 10년 동안 지질학을 공부하고서 (바위의 형태를 가지고 창세기 기록이 거짓임을 입증하려고 했다.) 결국 그 친구도 창세기 3장에서 보여주는 “도피”행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인자는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서 구원하려고 오셨으며 성령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잃어버린 자들을 부르셔서 이끌어 오신다(요12:32; 16:7-10). 그 분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계시며 성경 구절, 강력한 설교, 궁지로 몰아붙이심, 질병, 사별, 애절한 찬송, 사랑하는 자들의 기도 등을 통해 사람들의 양심의 초인종을 계속해서 눌러대신다. 사람들은 이미 주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롬10:18, 골1:23).
“날이 시원할 때에 동산을 거니시는 주 하나님의 음성”
이 구절로 미루어보아 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정해진 시간에 교제를 가지셨으며 그때는 아침 일찍이거나 늦은 오후였던 것 같다. 음성이란 단어는 정통 유대인들에 의해 “멤라”로 쓰여졌으며 이 단어는 요한복음 1장 1절의 의미로 쓰인, 말하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다(spoken word of God). 모세오경 중 하나님의 음성, 즉 “멤라”가 나와있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창6:6; 8:21; 9:12; 15:1; 17:2; 21:20; 22:16; 24:3; 26:3; 28:15; 31:49; 35:3; 39:2, 출3:12; 4:12; 10:10; 14:31, 레20:23, 민3:16; 4:37, 신1:10; 2:7; 3:22). BB